Reversing Life With Future USB! RAW novel - Chapter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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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화 폭식 준비 (2)
잠시 머뭇거리던 대표가 입을 열었다.
“혹시 문제집의 대표저자 자리를 양보해 주실 순 없을까요?”
살짝 긴장한 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는 폼이 자신도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것 아는 모양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일단은 묻는 게 예의일 것 같군요. 왜죠?”
그러자.
대표가 결연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설득시키겠다는 의지가 묻어났다.
“내부적으로 판단했을 때, 아무래도 아직은 여러모로 무리가 아닐까 싶어서요. 선생님, 이번만 참아 주시면 제가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헛소리도 이런 헛소리가 없다.
아니 내 이름을 걸고 문제집을 만들자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무리인 것 같으니 대표 저자를 양보해 달라고?
방금 전까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대표의 인상이 순식간에 부정적으로 변해 버리는 순간이다.
“···‘여러모로’라, 어떻게 여럿인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내가 굳이 한 번 더 되묻자, 대표가 살짝 시선을 피하며 말을 골랐다.
“아, 물론 선생님 능력이야 제가 제일 잘 알죠. 그런데···선생님도 아시다시피 회사라는 곳이 오너 혼자 힘으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저로서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
내 표정을 살피던 대표가 간곡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둔 듯, 나에 대한 칭찬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감정 팔이를 시전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별 영양가는 없는 이야기다.
그가 하는 말이라는 게 결국, 나중엔 이런 일이 없을 테니 지금은 참아달라는 말에 불과했으니까.
물론 대표가 감정에만 호소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저희가 다음부터는 확실하게 이런 일이 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아니면 다른 것들은 어떠세요? 저희가 따로 집필실도 마련해 드릴 수도 있고, 의 증쇄계약도 살짝 조정을···.”
대표는 차후 있을 계약에 대한 이익을 제시하며, 은근슬쩍 내 마음을 돌리려 했다.
확실히 집필실 마련과 증쇄 계약 조건 수정이라면 제법 괜찮은 제안이라고 볼 수 있었다.
대표가 말한 것들은 모두, 작가들이 출판사 쪽에 바라는 워너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대표저자라는 알맹이를 넘겨준 이상 그 모든 것들을 껍질에 불과하다. 겉껍질 암만 씹어 봐야 나오는 단물의 양에는 한계가 있는 법.
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달아올랐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사실 이쯤 되면 글로비언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보인다.
어차피 내가 전속 계약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한 작품을 계약한 것뿐이었으니, 이대로 내가 문제집 기획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해도 출판사 측에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먼저 약속을 어긴 쪽은 그쪽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글로비언과의 관계를 끝내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 있었다.
대표의 얼굴을 바라보자.
침중한 안색으로 지금껏 했던 말을 반복하는 대표의 얼굴이 보였다.
“선생님···저를 믿으시고 이번 한 번만···”
그는 간절한 어조로 내 마음을 돌리려 애쓰고 있었다. 절박한 감성 팔이.
분명 글로비언 정도의 되는 대형 종합출판사의 대표가 보일 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뭔가 이상한데?’
대표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뭔가 괴리감이 느껴진다.
처음 대표의 말을 들었을 땐 그가 나를 놀리려는 것인가 생각하기도 했지만, 시종일관 내 마음을 돌리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어쩌면 이 모든 일이 그의 본의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다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작가와 척을 지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왜 이런 짓을 저질러 버렸을까?
순간.
대표가 했던 말 중에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단어가 있었다.
그 단어는 바로.
‘양보.’
사전적인 의미는 길이나 자리, 물건 따위를 사양하여 남에게 미룸.
일반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내 자리를 넘기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를 떠올리자 내가 느꼈던 괴리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양보를 하려면 양보를 받는 사람도 있어야 하니까.’
사실 출판사 쪽에서 ‘문제집’을 만들자고 했을 때부터 걱정하긴 했었다.
글로비언 정도의 대형 출판사에서 기획하는 문제지라면 분명 그것을 노리는 작자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어쩐지 날파리가 안 꼬인다 했다.’
일반적으로 교과서나 참고서, 문제지 같이 어느 정도 수요가 예상되는 학습서적 같은 경우, 저자의 입장에서는 먹을 수만 있으면 꼭 먹어야 하는 꿀 중의 꿀이었다.
자식이 공부를 하겠다는 데 돈을 아끼는 부모는 없는 법이니 만큼, 학습서적은 출판해 놓기만 하면 여타 다른 장르의 서적들처럼 안 팔려서 창고 보관비를 걱정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으니까.
그러니 교육밥 먹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자신의 이름이 학습서적 위에 박히기를 바랄 것이다.
아무리 영세한 학습서적 출판서에서 나온 책이라도 자신이 들이는 노력에 비해 괜찮은 정도의 인세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기획 출판을 하는 쪽이 영세한 학습서적 출판사가 아닌 글로비언처럼 전문적인 인력을 갖추고 있는 출판사라면, 어떻게든 빨대를 꽂아보려는 늙은 날파리들이 꼬일 만하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빤한 일들.
정리가 된다.
내 책의 성공과 올해 수능 대박으로 시작된 대표의 문제집 기획.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내게 들어온 대표저자 제안.
그 뒤에 이어지는 갑작스러운 제안 취소.
이해할 수 없었던 사건들의 아귀가 딱딱 들어맞았다.
빠진 톱니가 맞춰지자 비로소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떤 분입니까?”
내가 묻자, 이어진 대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면서.
나는 능글능글한 미소를 양 입가에 걸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봐줄 수도 있다는 태도.
“제가 대표저자로 나서는 걸 반대하는 작가가 누군지 묻고 있는 겁니다.”
그러자 대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뻔한 일이었다. 절박한 상황에 놓인 그만이 못 보고 있는 것일 뿐.
대표가 야심차게 기획하던 것을 한순간에 뒤엎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용의자 선상은 애초에 뚜렷하다.
‘설마 임원이나 직원이 그랬을 일은 없고.’
주가에 민감한 임원들이 그런 짓을 벌일 리 없다. 직원들이야 권한이 없으니 당연히 제외.
그러니 남는 것은 출판사에 소속되어 있는 작가들뿐이다.
그것도.
‘제법 경력이 쌓인 작가들이겠지?’
글로비언처럼 역사가 오래된 출판사의 경우 오래전부터 같이 작업을 해 오던 작가들이 있었다.
보통 때라면 그런 작가들의 풀 자체가 출판사의 경쟁력이었겠지만.
그것은 대표가 그들을 잘 제어할 수 있을 때의 일이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 대표의 아버지 시대 때부터 활동해 오던 작가들.
대표직을 넘겨받은 지 1년밖에 안 된 그로서는 노회한 그들의 요구를 그저 무시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은근슬쩍 대표에게 압박을 가했겠지.’
하긴. 대표가 야심차게 준비하는 수능 문제지인 만큼 그들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먹음직스러운 먹이로 보였을 게 분명했다.
잘 만들어진 학습서적일수록 잘 팔릴 테고 그만큼 그들에게 떨어지는 떡고물이 훨씬 더 클 테니까.
문제는··· 그들이 원하는 자리가 바로 내 자리라는 거였다.
출판사 쪽에서 대세 제안해 온 나의 자리.
대표저자.
대표저자란 학습서적 같은 공동저작 출판물의 대표자격인 저자를 이르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교과서나 참고서, 문제지 같이 분량이 제법 많은 서적의 경우 개인이 혼자서 집필을 하고 감수를 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집필에 참여한 저자들의 전공에 따라 분야를 할당, 취합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출판사 쪽에서 학습서적 출판을 기획하고 그에 맞는 저자들을 섭외할 때 책의 방향을 총괄할 대표저자와 세부적인 내용을 채워 넣을 공동저자를 따로 섭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고등학교 수준의 학습서적에 들어가는 내용이야 거의가 다 비슷비슷한 만큼. 이때 대표저자와 공동저자의 차이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책을 낼만한 경력과 성과가 있느냐 없느냐 정도였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그 둘이 받는 대우는 천양지차.
저작물로 인한 대부분의 과실은 대표저자의 입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니 대표저자의 자리에 오를만한 경력을 지닌 자라면 인맥, 학맥, 학연, 지연, 혈연을 모두 동원해 대표저자 자리를 꿰차려 눈에 불을 켠다.
“말씀해 주시죠?”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뒤 다시 한 번 말하자.
“···그런 분은 없습니다.”
대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하긴 대표로서의 위신이 있는 만큼, 자신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작가가 있다는 것을 시인할 수는 없겠지.
그리고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이 경영자의 마인드. 도의적으로는 이것이 맞다.
하지만 나는 듣고 싶었다.
어쨌든 내가 최초로 책을 출판한 회사가 아닌가. 겁에 질린 개처럼 이대로 물러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다.
대표는 타는 목을 물로 축인다.
나는 그런 대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되물었다.
“방금 전까지 대표님 입으로 제가 대표님 안목의 ‘증거’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아까 대표가 했던 말이다.
방금 전 자신의 발언이 인용되자 이어진 대표는 또다시 움찔했다.
“···휴.”
한숨.
대표가 침중한 안색으로 미간을 짚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이 천천히 식어 간다.
갈 곳 잃은 손은 애꿎은 찻잔 테두리만 만지작거린다.
“······.”
“······.”
질문으로서의 침묵.
그리고 대답으로서의 침묵.
솔직히 이런 분위기에서는 나올 이야기도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순간.
‘······!’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야기를 꺼낼 만한 분위기가 아니라면 꺼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닌가?
주변을 돌아보자 식사가 끝난 테이블과 차갑게 식은 찻잔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식사도 다 끝났으니 슬슬 일어날 때이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대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할까요?”
그러자, 이어진 대표는 마치 여벌의 목숨이라도 얻은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나는 너무 기대하지 말라는 듯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이다.
“······.”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서는 복잡한 계산 수식들이 오간다.
절대 손해를 보지 않으면서도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
그래, 잘하면 있을 것도 같다.
내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서 있자,
“네, 네 작가, 아니 선생님. 다음은 어디로 모실까요?”
대표가 황망한 표정으로 겉옷을 챙긴다. 입을 시간도 없이 곧바로 나의 페이스에 맞추러 나오는 모습.
어차피 주도권을 확실하게 뺏어온 마당에, 나는 아까부터 거슬렸던 것을 정정하고자 한다.
“이번에는 제가 아는 데로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