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ion | Lonelyheart RAW novel - Chapter 11
11화.
11화. 현건일, 나 좋아해
평온한 일상이었다. 일주일 동안 세 번은 방배동 빌라에서 두 번은 성북동에서 아침을 먹고 출근했다는 것만 차이였다. 이 여사가 줄곧 심기가 불편하다는 내색을 하는 것 외엔 주말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넓은 강이 흐르듯 시간이 표시 나지 않게 흘러갔을 뿐이다.
시은은 발소리가 매우 작다. 마치 신중한 고양이처럼 고요하게 움직인다. 게다가 영리한 고양이처럼 실수라고는 하지 않는다. 대접에 국이 비어가면 조심스레 의사를 물어 더운 국물을 더 내어 오거나 시원한 물이 마시고 싶다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물을 따르고 있다. 식사시간뿐 아니라 내내 그러하다. 정확하게 시간을 맞춰 회장의 약이니 양파즙 따위를 챙겨 들고 와서 바둑판에 돌을 두드리고 있자면 살며시 꿇어앉아 손닿기 좋은 자리에 두고 물러나는 식이다. 집에 일찍 들어가는 날이면 뜨거운 물로 욕조를 채우고 적당한 양의 배스 솔트를 풀어 둔다. 욕조 옆에는 가벼운 캘리포니아 산 와인 한 잔, 구김 없는 속옷 한 벌이 정해진 자리에 어김없이 놓여있다.
화요일이다. 저녁 약속을 마치고 퇴근한 시각이 아홉 시였다. TV 뉴스를 들으면서 양복을 벗어 시은에게 건네고 넥타이를 풀었다. 시은이 타이를 받더니 위 칸 제일 왼편에서 세 번째에 걸어 둔다. 넥타이는 마흔 개가 넘는다. 색깔별이나 브랜드별로 정리하지는 않는다. 아무 규칙 없이 엉망으로 걸려있는 듯이 보이지만 편하게 자주 손이 가는 타이는 아래 칸, 용도가 있을 때 착용하는 타이는 위 칸이다. 저녁 약속은 건교부 차관이었다. 문상용을 제외하고 제일 묵직해 보이는 타이를 선택했었다. 영리한 여자다.
나는 시은이 내어온 차가운 오미자 물을 마시면서 넥타이 자리까지 정확하게 맞춰 넣은 시은에게 부당한 불쾌감을 느꼈다. 오미자 물은 새콤하고 달콤하고 동시에 떫고 썼지만 기름진 저녁 식사로 피곤해진 위장이 씻기는 느낌이었다. 불쾌하군. 시은은 완벽한 무시와 동시에 완벽한 친절을 베풀어준다. 얼음 조각처럼 매끄럽고 차가운 친절이다. 떫은 입맛을 다시는데, 서재 방 노크 소리가 두 번 들렸다. 삼 초 후에 문을 열고 시은이 들어섰다.
“목욕물 받았습니다.”
“필요 없는데.”
그제야 시선을 맞추었다. 오늘 처음이다. 아침 먹는 동안에도 맞은 편 자리에 앉아서 국 대접이 얼마나 비는지, 젓가락이 어디에 가는지, 숟가락질을 몇 번 하는지는 지켜봤을지언정 내 얼굴은 쳐다보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일주일 내내 그랬다. 주차장에서 어깨를 붙잡고 세경이가 왜 싫어, 물은 뒤로는 말이다.
더운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지만 심통을 부리듯이 말했다. 영리하게 굴어 준비한 목욕물 같은 거 필요 없다고. 시은은 마치 내가 늘 변덕을 부려왔던 것처럼 차분하게 다시 물었다.
“다른 필요한 건 없으세요 ”
늘 저 대사가 마지막이었다. 괜찮아, 가서 쉬어. 그러면 인사를 하고 문을 닫고 나가버린 후 끝이다. 완벽하게 준비한 아침상을 마주하고 앉을 때까지. 그 아침에 또 철저하게 무시를 당하면서 출근하면 다를 바 없는 밤으로 마무리된다. 꼬박 일주일이 넘었다. 웃지도 말하지도 옆에 앉으려 하지도 않는 것이. 불분명한 이유로 눈치를 줄곧 보고 있다. 이런 성가심은 나와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무섭다고 울던 어리숙한 여자애와 짝꿍을 했던 초등학교 이후 처음이다. 일주일, 아니 이제 일주일 하고도 하루가 지났다. 선물을 줘도 말을 시켜도 농을 걸어도 가차 없이 잘라내는 매끈한 예의만 보이는 것이. 그다지 깊지 않은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언제까지 그럴 건가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한마디를 더한다.
“다른 필요하신 거 없으시면…….”
“알았어. 나가.”
시은이 우뚝 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가라니까.”
왜 그러냐는 말 대신에 시은은 입술을 힘주어 다물었다. 또 우물처럼 말을 먹어버릴 참인가 보다. 대신 유달리 큰 눈동자가 첫날처럼 안개에 젖은 듯하다. 질색이다, 정말.
“안 나가 ”
나는 서재 문이라도 활짝 열어젖힐 기세로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시은이 주춤 주춤 뒷걸음질 쳤다. 후욱 한숨이 나오는데 시은이 문고리를 잡다 말고 돌아서서 말했다.
“오늘,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제일 친했던 동료 생일이에요. 괜찮으시면 만나고 싶어요.”
“왜, 모여서 생일 파티라도 하나 ”
“네.”
“맘대로 해. 나가.”
손짓을 하면서 책상에 앉았다. 서재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현관문 소리도 들렸다.
아무 소리도 못들은 듯 꼼짝도 않고 앉아서 하릴없이 포털 사이트 기사들이나 클릭했다. 꼬리에 달린 제목을 물고 물고 들어가 4,50대 여성의 우울증 양상을 다룬 기사까지 도달했을 때 윈도 창을 모두 닫아버리고 일어섰다.
냉수나 마실까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제일 위 칸 리본까지 그대로 묶여있는 초콜릿 박스를 발견했다. 물 생각도 잊은 채 단단히 매듭진 리본을 풀고 박스를 열었다. 열어보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건드리지도 않았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 한 조각이 얼추 구내식당 점심 값인 초콜릿 스무 개 중, 단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지난 목요일에 사 들고 온 것이었다. 여자 친구 선물이신가요, 하길래 아내에게 줄 거라니 점원이 너무 좋으시겠다는 직업적인 멘트에 판촉을 더했다. 푸른색 벨벳상자에 낯간지런 리본 장식까지. 양복재킷을 벗으면서 시은에게 초콜릿 상자를 건넸다.
너 초콜릿 좋아하잖아.
시은은 상자만 한참 보더니 고맙습니다, 얌전히 받았을 뿐이었다. 한 번 웃어주지도 않고. 양복을 거는 뒷모습을 보면서 넥타이를 제자리에 두는 손끝을 보면서 이유 없이 내내 초조한 기분이었다. 와이셔츠 단추를 세 개쯤 끌렀을 때 시은이 말했다.
과일 준비할까요.
캐모마일 티와 과일 접시를 거실 탁자에 놓고 그만이었다. 잠시 옆에 앉으라는 말을 할 틈이라고는 주지 않았다.
초콜릿 박스를 쓰레기통에 쑤셔 넣을까 하다가 냉장고에 다시 처박았다. 냉장고 문을 터엉, 소리 나게 닫고는 성마른 걸음으로 거실 한 바퀴를 돌았다. 화를 애써 가라앉히고 샤워부터 해야겠다고 욕실 문을 여는 순간 와인 향이 코를 찔렀다. 잘 개켜놓은 속옷과 배스타월이 얌전하게 자리 잡고 있다.
옷을 벗고 한 발을 물속으로 넣었다. 미지근하게 식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반쯤 드러누워 와인을 마셨다. 뒷목부터 천천히 근육이 이완되기 시작했다. 잔을 쥔 채로 눈을 감았다. 목욕물 같은 거 필요 없다 퉁명을 부렸더니 다른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라고 했지.
왜 그러세요, 라든가 무슨 일 있으세요 같이 마음을 담은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아.
발칙한 녀석. 건방진 녀석……. 나쁜 계집애.
솔직함으로 상대를 할퀼 수 있다고
예의와 다정함으로 목을 조를 수도 있다고 대구라도 만들어 알려줘야겠다. 나는 와인을 마저 들이켰다.
시은 핸드폰으로 전화를 한 건 열두 시 십 분이었다. 한참 만에 전화를 받은 여자는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 변명을 뒤죽박죽 늘어놓았다. 전달해야 할 정보는 단 두 가지였다. 시은이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과 시은이 지금 있는 곳. 그나마 하나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정보였다. 몇 번이나 골목길을 돌고 다시 전화를 해서 점원에게 설명을 듣고서야 자그마한 일식 주점을 찾을 수 있었다. 안쪽에서 두 번째 방문을 열었다. 방 위치 설명만은 제대로였다. 반쯤 남은 오뎅탕이나 튀김 부스러기가 담긴 접시 등이 놓여진 상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여자는 시은이었다.
“저 시은이 남편 분, 현 이사님이시죠 ”
엉거주춤 파마머리 여자가 일어섰다.
“얘, 시은아. 일어나봐. 응 ”
여자가 등을 두드리자 시은은 귀찮다는 듯 오른손을 한 번 휘젓기만 했다. 남자 하나가 좀 들어오셔서……, 말하다가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다물어버린다. 나머지 여자 하나가 파마머리 여자 옆구리를 쿡 찔렀다. 파마머리가 죽겠네, 중얼거리면서 시은을 흔들었다.
“야아, 정신 차려. 그러게 술은 왜 먹엇!”
시은이 으응, 신음소리 비슷한 대답을 하며 머리를 들다가 다시 바닥으로 툭 떨어뜨렸다. 어우, 야아! 여자는 이제 거의 울상을 하고선 시은을 마구 흔들어댄다. 그런다고 정신을 차리겠어, 인상을 그리면서 방으로 들어서는데 그때까지 구석에 잠자코 있던 자식이 시은 곁으로 다가섰다. 머리를 짧게 쳐내서 다소 차가운 분위기로 바뀌었지만 분명 왈츠에서 신파를 찍던 그 자식이 틀림없었다. 취기로 홍조를 띠고 있지만 여전히 허여멀건 한 그 얼굴은 문을 여는 순간 알아차렸다. 이제 화를 참느라 어금니가 아플 지경이었다. 허여멀건 한 자식이 파마머리 손을 붙잡았다.
“흔들지 말아요. 머리 아프다고 그랬어.”
“어휴, 잠든 거 같기도 하고.”
자식이 무릎을 꿇고는 시은 옆에 앉더니 고개를 기울이고 얼굴을 살피면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몹시도 조심스럽고 신중한 동작이었다. 다정도 하시긴, 이제 기가 막혀 코웃음이 났다. 하긴, 왈츠에서도 끝까지 젠틀하게 쳐다보고만 있다가 물러났지. 소리 한 번 안 높이고 말이다.
“선배, 일어나요. 데리러 오셨어요.”
“으응 누가 ”
시은이 얼굴을 반쯤 들었다. 현 이사님이요, 시은을 일으키려다 말고 그 자식이 나를 쳐다본다.
“비켜.”
자식을 밀어내다시피 하면서 시은 옆자리를 차지했다. 어깨를 안듯이 감싸니 시은이 고개를 들고 빤히 쳐다보았다. 뺨으로 약한 알코올 냄새가 섞인 더운 숨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일어날 수 있어 ”
시은이 빠져나가려는 듯 몸을 비틀었다. 꽉 잡고서 놓지 않자 억지로 손 하나를 빼어 얼굴을 밀었다.
“싫어.”
낮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싫어, 시은은 한 단어를 발음했을 뿐인데 귓속에서는 웡웡 수십 마리 벌레가 날개를 파득파득거렸다. 막무가내로 잡아 일으키니 여윈 몸이 힘없이 달려온다.
“죄송해요, 저기 시은이가 이런 적 한 번도 없는데, 오늘 이상하게…….”
그 말은 아까 전화로 다섯 번은 했다고 말해주려다가 파마머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했다.
“언니, 괜찮아. 이 사람 그런 거 신경 안 써. 생일 정말 축하해.”
시은은 지나칠 정도로 또박또박 한 음절씩 끊어 발음했다. 그녀의 취기는 발음이 흐려지는 형태가 아니라 반대로 드러나는 모양이다. 과장된 명확함으로.
테이블을 돌아나가자면 시은의 상태로는 비틀거릴 것이 틀림없었다. 번쩍 들고는 걸어가는데 안녕히 가세요 어색한 인사말들과 같이 허여멀건 녀석이 뒤를 따랐다. 방문 앞까지 나와 그랬다.
“오늘 사케 다섯 잔 마셨어요. 저녁을 안 먹은 거 같던데 결혼하고 처음이라고 사람들이 한두 잔 권하다가 그렇게 됐습니다. 원래 술을 전혀 못하잖아요. 멀쩡하게 말하는 거 같아도 지금 무슨 소리 하는지 전혀 몰라요. 아마 내일도 못 일어날 겁니다.”
“그래서 ”
내가 시은이 술을 전혀 못하는지 술고랜지 저녁을 두 공기를 먹었는지 걸렀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꼭꼭 짚어주는 것만 같다. 그래, 너는 뭐하러 몇 잔인지 세고 있었냐 물으려는데 시은이 안긴 채로 손을 저었다.
“민우 씨, 이 사람 그런 거 신경 안 써. 멋진 분이라니까. 얼마나 쿨한데.”
멋진 분, 멋진 분.
시은을 조수석에 밀어 넣으며 보니 맨발이다. 차를 빼러 나온 점원에게 지폐 몇 장과 카드를 주었다. 그 테이블 계산을 하고 신발을 찾아오라 그랬다.
뮬을 받아 넣고 차를 출발시키려다 보니 시은이 구겨지듯 웅크리고 있다.
“좀 기대봐.”
벨트를 채우고 조수석 등받이를 젖히려고 하는데 시은이 눈을 떴다.
“의외로, 세심한 거 알아요. 그런데 이러지 말라고 했죠.”
“뭘 ”
시은은 답하는 대신 고개를 창으로 틀었다. 왈칵 소리가 높아진다.
“뭘 하지 말라는 건데! 술 먹고 주점에서 엎어진 사람 데리러 오는 거 너 도대체 제정신이야 누굴 옐로페이퍼에 또 오르내리게 하고 싶어 ”
“그러니까 안 왔으면, 내버려 뒀으면, 좋았잖아요. 내가 누구 아낸지 알게 뭐예요. 나도, 내가 누군지……,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정말이지 내가 뭔지, 누구 아낸지 모르겠는데.”
억지로 물고 있던 뜨거운 돌을 뱉어내듯 시은이 말했다. 취기 때문에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를 거라 그랬나, 기억하든 안 하든 성별 나이 불문하고 술 취한 사람과 오래 말을 섞지는 않는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누구 아낸지 모르겠는데.
귓속이 내내 쟁쟁거린다. 툭, 툭. 차창에 굵은 빗방울이 두드리듯 떨어지더니 이내 쏴아 시원하게 쏟아져 내린다. 와이퍼가 창을 닦아내는 소리가 날 때마다 빗물이 가로선을 그리면서 옆으로 물러간다.
“안 데리러 갔으면 비 쫄딱 맞을 뻔했지 ”
쓰윽 쓰윽, 와이퍼 소리에 묻어 말을 시켰다.
“비 좀 맞아도 뭐 대수라고.”
맹맹한 콧소리다. 창으로 들어오는 불빛만으로도 알아챌 정도로 눈가가 발개져 있다. 술 취해서 우는 여자라니.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근데 너 은근 반말이다 ”
이제 집 앞 골목길이다. 퍼붓는 소낙비로 만들어진 물웅덩이 위로 바퀴가 구르면서 찰박 물소리가 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문을 열었다. 시은이 맨발로 내려서더니 차가운 듯 발가락을 움츠렸다. 지하주차장은 아직 식혀지지 못한 열기에 습도가 더해져 온실이라도 들어온 듯 후텁지근했지만, 살이 없는 발등과 가느다란 발가락은 눈밭에 신발이 벗겨진 성냥팔이 소녀의 것 같다.
“업혀라.”
내민 등을 향해 싫어요, 그런다.
“나 팔 아프거든. 보기보다 너 되게 무겁다. 또 못 안아줘.”
“신발…….”
“몰라. 니 신발을 왜 나한테 물어.”
다리를 당기자 어맛! 소릴 지르며 등으로 넘어진다. 읏차, 일부러 소리를 내면서 엉덩이를 받치고 몸을 폈다. 시은이 어깨를 두른 팔에 힘을 더한다. 뺨을 목덜미에 대자 물기가 옮아온다. 정말, 우는 여잔 질색이다. 이런 식으로 술기운을 빌어 가면을 벗는 것도. 역시 이 여자에게 뻔뻔한 연극은 무리였나.
여자와 몸을 섞지 않듯이, 마음 역시 섞고 싶지 않았다. 인간의 신체 중 가장 예민하고 여린 표피 간 마찰로 서로를 교환하듯, 가면을 벗어던지고 발갛게 피가 올라온 속살을 드러내고 서로를 핥아주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대인관계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해야만 하는 것과 같은 룰의 집합이다. 한 치 한 치, 조금씩 견주어가며 룰을 형성시키는 관계도 있겠지만, 대체로 처음부터 정해진 룰들 속에서 상호작용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 여자와의 관계 역시 그러하다. 몸도 마음도 섞지 않아야 할 관계.
실은, 여자는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바짝 붙어있다. 세상의 모든 규칙은 다 지킬 것 같은 답답한 융통성의 소유자지만, 정작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는 크고 작은 파격이 오랫동안 나를 흔들어 놓고는 했다. 어울리지 않게 나는 근엄한 얼굴을 만들고선 출렁거리는 마음에 둑을 한 단 더 높여야 했다. 이중적이긴. 대수롭지 않게 훌렁 훌렁 살자가 목표면서.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시은이 중얼거렸다.
“난, 다정한 남자가 좋아요. 가슴이 따뜻한 남자가 좋아.”
“그런 모호한 기준이라니, 그게 어떤 남잔데.”
“생전 모르는 사람인데도 길 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도와주는 남자요. 그렇게 다정하고 가슴이 따뜻한 남자가 좋아.”
“그러시든가.”
“그렇다고 내가 동하 씨를 좋아하진 않아.”
돌아보려는데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신호음이 울렸다. 상관없다고 퉁명스럽게 말해줄 참이었는데 웬일인지 피식 웃음이 났다.
“왜 웃어요.”
“일찍도 답해준다. 내가 물은 지 일주일 넘었거든.”
더운 숨이 목덜미를 간질인다. 맞닿은 부분이 또 젖는다.
얜 왜 자꾸 우는 거야. 끅끅 소리도 안 내고 이렇게나 조용히.
현관 키를 누르고 신발을 벗고 침실로 들어갈 때까지 시은은 숨도 죽여가면서 눈물만 흘렸다. 침대에 눕히니 고개를 최대한 옆으로 틀어버린다. 얼굴을 양손으로 잡아 고정시켰다.
“나는 우는 여자가 싫어. 청승맞아.”
엄지손가락으로 발개진 눈가를 문질렀다. 시은이 눈을 감았다. 도르륵 눈물방울이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흘렀다.
뜨거운 물에 수건 두 개를 적셔 와서 얼룩진 뺨을 닦고 입술도 닦았다. 손도 닦은 뒤에 발치쯤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발목을 붙잡았다. 시은이 화들짝 상체를 일으키다가 머리를 짚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도로 눕히면서도 발을 버둥거린다. 빼어내려는 걸 꽉 잡고는 허벅지 위로 올렸다.
“지저분하긴, 바닥에 아까 섰잖아. 그대로 내 침대에서 자겠다고 ”
“씻을 거예요.”
“씻겨 주는 거 까진 못하거든.”
“누가 씻겨 달래. 여기서 안 잘 거야. 내 방 갈 거야. 쫓아낼 땐 언제고.”
이런, 취하니 애 같은 구석이 있다. 떼쓰는 여자 역시 질색이지만, 또 가슴이 출렁한다.
‘왜…… 내가 안심이 될까요, 난 당신에 비하면 허점투성인데.’
유람선을 개조한 카페에서 경련이 일던 눈가를 눌러주던 약지나, 안쓰럽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동자나 그리하여 얼마간 나를 퓨즈나간 전구처럼 만들어버리는 파격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꾹꾹 누르듯이 발을 닦아주는 동안 시은은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자라, 일어서는데 시은이 불렀다. 상냥함과 예의는 벗겨내버린 낮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현건일.”
이제 대놓고 이름도 부르는구나. 이 여자가.
“왜, 정시은.”
“나 좋아해 ”
팔로 눈은 여전히 가린 채였다. 하얀 팔뚝과 작은 팔꿈치가 불빛 아래 도드라져 보였다. 아이 같은 뺨과 뾰족한 턱이 실룩거렸다. 어깨부터 쏴아 차가운 빗줄기가 관통하는 듯하다. 소낙비가 창을 두드리는 소리만 공간을 차곡차곡 채우는 동안 멍하니 빗소리를 세듯 서있는데 시은이 붉어진 입술을 깨물었다가 뗐다.
“좋아하지 마. 좋아하는 척도 하지 마. 누구 좋아하냐 물어보지도 마. 나보고 웃어주지 마. 초콜릿 같은 거 사오지 마. 자상한 척 챙겨주지 마. 이런 거 다 하지 말라고! 나는 현건일 니가 싫어. 그럴 때마다 싫어서 어쩔 줄 모르겠어. 정말, 미칠 거 같아!”
팔목을 거칠게 잡아 얼굴에서 떼어냈다. 젖은 눈동자는 막막한 슬픔으로 꽉 차있다. 느닷없이 주점 앞까지 몇 발 떨어져 시선으로만 시은을 좇던 자식이 떠올랐다. 허여멀건 그놈 이름이 민우라 그랬지, 그래, 다정한 남자였지. 진심을 담은 눈빛이었지.
어깨를 둘러 일으키자 한 팔에 다 들어오는 작은 몸이 출렁했다. 두통 때문인지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찡그린다. 입을 열어 이러지 마, 라고 하기 전에 입을 맞췄다.
*
“어머, 본부장도 같이 왔어 ”
대문 앞까지 나와 회장을 기다리던 어머니가 반색을 한다. 회장을 향해 아버님, 하면서 허리를 다시 숙이고는 잰걸음으로 옆에 붙어 서서는 아예 팔짱이라도 낄 기세다.
“웬일이야, 웬일. 전화도 없이. 어쩐 일이야.”
걸음을 멈추니 슬쩍 팔을 풀면서 얼굴을 살핀다. 결혼 이야기를 꺼낸 이후부터 어머니는 늘 속에 화덕단지라도 품고 있는 듯 입에서는 푸푸 열이 나고 눈동자는 온통 하얘졌다 까매졌다 했다. 삐지는 웃음을 참지 못해 입술이 비틀어지도록 힘을 주는 건 참 오랜만이다.
“어쩐 일이야, 전화 좀 하지이. 본부장 좋아하는 거 해놓을 텐데.”
눈초리가 홱 돌아가는 건 의례 탓할 대상을 찾았을 때이다.
“김 비서는 뭐하는 애야, 최 기사는 또 뭘 하고. 다들 그 모양 그 꼴이니…….”
“어머니.”
이 여사가 입을 다물고 쳐다본다.
“그 사람들 업무 아닙니다.”
“업무 그럼 지네가 뭘 한대 월급만 꼬박 꼬박 챙기고는. 머리가 안 돌아가. 사람이 센스가 있어야지. 그렇게 머리가 안돌아가서 어디다 쓸까.”
이 여사가 검지를 들어 머리 쪽을 가리키고는 빙빙 돌려보는 시늉을 했다. 모르는 척 넘기려는데 이제는 주차를 하고 몇 발 떨어져 오던 최 기사를 훑어보며 함부로 손가락질이다. 정말이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헤헷 웃으면서 손으로 까닭 없이 등을 쓸어댄다.
“아유, 본부자앙. 최 기사가 좀 돌대가리잖아. 그건 맞지. 응.”
이 여사 나름의 분위기 전환 방법이다. 귓속말 흉내만 낼 뿐, 나와서있는 집안사람들과 최 기사까지 모두 들리도록 하고선 돌대가리, 라는 표현에 앙증맞은 유머감각이라도 발휘한 듯 어깨를 움츠려가면서 웃는다. 삼십 년이 넘도록 회장의 숱한 구박과 꾸지람을 들었어도 결코 바뀌지 않는 부분이다.
강자에겐 비굴하다 싶도록 구부리고 약자는 원 없이 밟아주는 속물근성 외에도 원색적으로 바닥을 드러내는 이 여사를 대할 때마다 불쾌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가끔은 정말 견딜 수가 없다. 오늘은 다행히 그 가끔은 아니었다. 가끔에 해당한다 할지라도 퇴근길에 들렀다는 이유로 당실당실 춤추는 발걸음이 되는 어머니에게 성질을 부릴 순 없었다. 짜증을 삼키면서 어금니를 물고 말았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이 여사는 날렵하게 움직였다. 사실 날렵하려고 노력한다는 표현이 맞다. 오래된 마룻바닥이 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울렁울렁 댄다. 여자치고 크다 싶은 키에 도독도독 붙은 살 때문에 어머니는 평생을 다이어트 중이었고 일이 주일에도 4,5킬로는 족히 오가는 요요현상에 시달린다고 했다. 지금은 실패 주기인 듯하다. 봄 이후 더 심해진 건가 싶다. 지난봄, 겨울을 지나고 살이 좀 붙었나 정도였는데 모 그룹 사모님이 술통 같은 몸매라고 뒷말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맹렬한 다이어트와 잡다한 양한방 요법은 강력한 후유증만 남겼을 뿐이다. 아무래도 최근 몇 년간 최고치를 경신했겠다.
훅 훅 숨소리도 가쁘도록 분주하게 이쪽저쪽 마룻바닥을 굴리면서 움직이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둥그렇게 살이 오른 어깨나 늘 움츠린 까닭에 굳어버린 구부정한 등과 만 원짜리 한 장도 안 했을 반팔 셔츠 아래로 늘어진 팔뚝은 그녀가 버텨왔던 세월만큼 가엾다. 최 씨, 이거 좀 봐! 바락 올라가는 목소리까지 가엾어 하는 건, 피와 살을 받은 자식이기 때문일까.
회장 방과 거실을 열심히 오가면서 필요 없는 질문이나 넘치는 웃음을 보이거나 주방에 뭔가를 수선스레 지시하기도 할 때에도 이 여사의 뒤로 이 지긋지긋한 집에 대한 애증이 긴 휘장처럼 펄럭거린다. 나 역시 기억을 할 수 있는 나이부터 줄곧 이 집에서 살았다.
바닥과 기둥의 기조를 이루는 붉고 검은빛이 나는 목재는 삼십 년 시간을 묵는 동안 제 스스로 생존력을 가진 생물체처럼 진화한 듯하다. 햇빛이 들이치는 낮이면 반질반질 야생 동물의 털가죽 같은 윤기가 흐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한 한밤이 되면 거대한 수목처럼 솨솨, 호흡이 느껴지곤 했다.
식구 수에 비해 지나치게 넓을 뿐 아니라 천정이 보통 집 배 반은 높은 집은 여름에도 한기가 돌았다. 1년 내내 온기라고는 없는 셈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30와트 노란 전구 불빛으로 견뎌야 한다는 할아버지에게 겨울에 훈기가 돌 정도로 기름을 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름에도 데도록 뜨거운 국물을 먹고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그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다.
붉고 검은 목재 다음으로 이 집의 분위기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괴목으로 만든 가구들과 기암괴석들이다. 젠장할, 아직도 이따금씩 그것들과 기싸움이라도 하듯 노려본다. 괴목에 있는 검은 구멍은 요망스레 늙은 자의 허기진 눈동자 같고 회색의 돌들은 비틀어진 웃음을 짓는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가구 주제에, 돌멩이 주제에. 할머니가 그랬어. 사람이 훨씬 힘이 세다고. 주먹을 꼭 쥐고 버티고 선 꼬맹이가 보인다.
이 집은, 내게도 족쇄였다. 어머니와 극명하게 다른 점이라면, 그녀에게 이 집은 죽도록 벗어나고 싶은 동시에 죽을 악으로 움켜야 할 대상이었고, 나에게 이 집은 주어진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늘어진 티셔츠나, 화장실 휴지나 이쑤시개 따위의 온갖 잡스런 것들까지 신경을 곤두세워 회장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하는 일만이 인생의 전부인 듯 구는 그녀를 보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자신이 없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스스로를 학대합니까, 종종 묻고 싶어진다.
괴목 탁자에 뚫린 눈을 보고 있자니 스멀스멀 등으로 찬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땀이 식은 셔츠를 비집고 매끈하고 축축한 냉혈동물 한 마리가 등을 타고 쓰쓰쓰 올라오는 기분이다. 갈라진 혓바닥이 목덜미에 닿기 전에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얘, 피곤하니 너 안색이 안 좋구나.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쉬어.”
눈을 떠보니 이 여사가 팔을 끈다. 가늘가늘 상냥한 투의 목소리를 만드느라 살에 묻힌 턱까지 빳빳하니 경직되어있다.
“곧 갈 텐데 뭘요.”
마지못해 일어서서 이 여사 손을 떼려는데 표정이 획하니 바뀐다. 심통스럽게 부푸는 볼과 깜박거릴 때마다 파랗게 까맣게 변하는 구슬 같은 눈동자를 보니 무슨 말이 나올지 알만하다.
“왜애! 집에 꿀단지라도 묻었어 버릇대기도 없는 것. 오늘 아침에 안 왔으면 낮에 와서 인사라도 해야는 건 상식이다. 너도 똑같아. 둘 다 똑같아가지고선, 그렇게 둘이서만 죽고 못 살겠어 연로하신 할아버지도 팽개치고 둘만 그저 죽고 못 살지 잘해봐. 언제까지 그렇게 죽고 못 사나. 둘이만 언제까지 행복하나 두고 보자고. 너 언제 결혼하고 한번 집에 와서 나 살펴본 적 있어 할아버님 본 적 있냐고!”
그 주말과 주말과 주말들은, 그 새벽과 새벽과 새벽들은 모두 내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처음으로 한 번 들러놓고선 삐죽 고개만 디밀고 가겠다고 가라 가! 안 잡어! 별 웃기지도 않은 거 하나 데려다 놓고선. 그게 시어머니 무서운 줄 몰라서 말야, 내가 사람이 좋으니까. 니가 날 이렇게 무시하니까!”
검은 피부가 불그죽죽 물드는 걸 지켜보다가 손을 잡았다. 어떻든 내가 결혼이라는 형태로 더군다나 못마땅한 결혼이라는 형태로 그녀를 검고 붉은 나무와 회색 돌, 희미한 노란 전구와 한기 속에 남겨두고 떠나버렸으니.
“네, 있다가 갑니다. 뭐가 문제겠습니까. 그저 어머니 피곤하실까 그런 거죠.”
놔라, 놔. 네가 언제 내 생각했다고. 손을 뿌리치는 시늉을 몇 번 하더니 결국 눈물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시은에 대한 북받친 설움과 원망과 증오는 이후로도 간헐적으로 지속되었지만 나는 귀를 닫아버렸다.
현건일, 나는 니가 싫어. 싫어서 미칠 거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정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