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ion | Lonelyheart RAW novel - Chapter 12
12화.
12화. 연극처럼
어머니의 어이없는 히스테리와 부닥칠 때마다 시은은 일정한 자세를 유지했다. 표정은 깊숙이 감춰두고 팔은 떨어뜨린 채 잠자코 있는 모습을 보면 호흡까지 멈춰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첫 몇 주는 이 여사를 마음으로는 적절하게 무시해 넘기는 것이라 생각했다. 까다로운 사모님 시중을 잠시 들어줘야 하는 비서나 점원처럼 시은은 감정을 조율하는데 능숙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날, 그녀의 등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믿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탄력성과 재생성이 좋은 질기고 튼튼한 마음의 일부만 방패처럼 내세워 그런대로 잘 견뎌낸다고 말이다. 마치 오래전 내가 습득한 방식처럼.
처음 말을 걸었던 날도 그랬듯 나는 종종 시은의 뒷모습을 감상하듯 쳐다보곤 한다. 시은의 등은 섬세한 어깨선과 맞닿는 부근이 앞으로 말려있는 듯했지만 초라해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가는 목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등뼈의 선이 우아하게 살아나고 어린 새의 날갯죽지 같은 어깨뼈가 도드라져 애틋한 느낌을 줄 때도 있다. 하얀 블라우스 아래로 달달 떨리던 날갯죽지를 본 것은 어쩌면 왜곡된 기억일지 모른다. 그래서 가끔 그녀의 여린 뼈를 만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것도 왜곡된 감정일 것이다.
시은은 성북동에선 늘 비슷비슷한 차림이다. 허리선이 꼭 맞는 긴 스커트와 블라우스. 나의 고집 때문이다. 평소에는 그녀의 차림새에 대해 일절 추임을 넣지 않지만, 성북동에 갈 때만큼은 양보가 없었다. 치렁거리는 치마나 블라우스가 움직이기에 불편할 뿐 아니라 어머니에게 미움거리 하나를 추가하겠지만, 어떻든 내 아내로 서는 여자에게 반드시 요구하고 싶은 한 가지였다. 누가 안주인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과장된 검소함과 반여성성은 어머니로 족하다. 비슷비슷한 옷 몇 벌 중에서 그날 시은이 입었던 옷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속살이 희미하게 비치는 블라우스 아래 애틋한 작은 뼈만이 각인되듯 박혔을 뿐이다.
어젯밤, 밀어내기를 포기한 듯 손으로 바닥을 짚고선 시은은 눈을 감고 있었다. 호흡도 멈춰버린 것처럼. 입술을 붙이고 혀를 밀어 넣은 채 나는 그녀의 날개 죽지를 더듬었다. 손아귀에 잡힌 새처럼 등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나는 날개를 꺾을 기세로 힘을 더했다.
*
오셨어요, 마치 번호 키 누르는 소릴 듣기 위해 현관 앞에 웅크리고 앉았기라도 한 듯 문을 열자마자 시은이 인사한다. 열 두 시가 넘었다. 얼굴은 아직 부석부석하다.
“늦는다고 전갈 못 받았어 ”
“아니요, 들었습니다.”
시은이 장롱문을 열고 돌아서서 손을 벌리다가 가만히 내렸다. 아직 채워져 있는 재킷 버튼을 보더니 얼굴을 살핀다. 비언어적 소통에 특별한 재주를 타고났거나 특별한 재주를 가지도록 단련된 여자다. 장롱문 안쪽에 붙은 거울은 마주 선 두 남녀를 비추고 있다. 내 손끝만 바라보는 여자는 어떤 정보를 입력하고 있는 중일까. 이마와 콧날, 볼과 입술, 목덜미와 어깨, 가슴과 배, 손과 발……. 내가 읽어낼 수 있는 건 없다. 나는 재킷 단추를 풀었다. 내미는 손을 쳐다보면서 직접 옷걸이를 빼어냈다. 재킷을 걸고 눈을 쳐다보면서 넥타이를 푸르고 와이셔츠를 벗었다. 벨트 버클을 풀자 곤혹스런 표정이다.
“나는 이 계약을 지속시켜야 해. 네가 계약으로 얻는 돈 수천 배가 걸려있어. 수천 배만큼 절실하지.”
“……네.”
“그런데 이렇게는 안돼.”
바지를 걸고 침대 끝에 앉아 양말을 벗고 나서 시은을 보았다.
“어떻게 하면 좋겠어 ”
“어제는…….”
“어제 이야기가 아니야.”
나는 조금 웃으면서 팔을 벌렸다. 발가벗을 순 없으니 속옷만 입고서는 현건일 대 정시은으로 말해보자고. 가까이 오라 손짓하자 머뭇머뭇 몇 발을 다가선다.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 만큼에 세워놓고는 올려다보았다.
따지고 보면, 바보가 아니고선 할 수 없는 계약을 했다. 계약이 가족에게 알려지는 것은 기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은 측에서 언론에 흘리는 경우를 가정해 본다면 말이다. 아무리 몇 겹의 장치를 했다고는 하나 얼굴 몇 번 보지도 않은 여자에게 덜렁 현건일 인생을 한방에 질식시킬 수 있는 목줄을 맡긴 셈이다. 목줄을 맡겨 놓고도 단 한 번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왜 얘를 이렇게나 믿고 있는 걸까.
“앉아봐.”
옆자리를 툭툭 쳤다. 발개지는 귓등을 보고 있자니 잔뜩 긴장해서 말한다.
“맘에 안 드는 부분 말해주세요. 노력할게요.”
“너부터 말해볼래 ”
“없습니다.”
“전혀 ”
“네,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정말로 잘해주세요.”
“이대로만 하면 좋겠다는 말 ”
“네.”
빛줄기라도 잡은 듯, 안도감과 다행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이것 봐, 나는 지금 빤스 바람으로 펼치고 있잖아. 너도 하나는 내보여 보라고. 싫어 미칠 것 같다던 말이 이 침실 바닥에 아직도 식지 않은 채 드러누워 있어.
“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데, 그래서 문제를 좀 해결해보자 했더니 너는 이대로가 제일 좋다라니. 갈수록 문제 각이 안 잡힌다 ”
“아니에요, 제 말은, 불편하시다면, 문제가 있다면 제 탓이라고……. 본부장님이 뭔가 더 어떻게 해주실 부분은 없어요. 정말 그렇지 않아요. 지금도 충분히 많이 배려해주시는 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눈을 맞추고 꼭 시선으로 쓰다듬기라도 하듯이 천천히 천천히 이마와 눈썹, 코와 턱을 살핀다.
“힘든 사람은, 뭔가를 견디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당신인 거 알아요. 그래서 가끔 맘이 불편해요. 그거 말곤 저는 다 좋아요. 뭐든 지금보다 더 노력할 필요 없으세요.”
거짓말. 이번에 내미는 얼굴은 첫날 후원을 설명할 때와 같은 것인가 차분차분한 목소리와 진정을 담은 설득. 목줄을 몇 번이고 쥐어주고도 붙들고 싶은 포근한 온기는 무의미한 덤이겠지.
“왠지 이렇게 너 생긴 대로 쭉 살다 죽으라 소리처럼 들린다 ”
“아니에요.”
시은이 대화를 자르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에는 생떼잡이 어린아이를 꾸짖는 눈빛이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뭘 원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원래 말 안 해도 잘 아는 거 정시은 특기 아니었나 ”
무슨,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대꾸를 반사적으로 하고는 그만이었다. 제가 일어선 침대 자리만 보더니 어른스럽게 마무리 짓는다.
“지금은 말하고 싶지 않나 봐요. 정리되면 말해주세요.”
“정리할 거 없어. 정리한 결론이야. 이대로는 못해.”
시은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린 새 울음 같은 한숨을 쉬고 표정을 깊이 밀어 넣고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만하고 싶으신 거라면 그럴게요.”
명치를 세게 걷어차인 기분이었다. 시은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만두자 말하고는 사뿐사뿐 걸어가 문고리를 잡았다. 나를 매혹시키고 나를 흔들던 등을 보이고서. 그 등에 화살이라도 꽂듯이 내뱉었다.
“어제, 키스했는데 ”
시은은 움찔하더니 그만이었다. 돌아보지도 않고 문고리를 마저 돌렸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
고개만 반쯤 틀어 잠시 서있더니 결국 돌아서지는 않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등은 착각이 아니었지만 시은은 평소처럼 조심스런 동작으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닫히는 문에 대고 소릴 높였다.
“그러고 싶으신 거라면 그럴게요, 또 그렇게 답해봐!”
잡아다 방으로 도로 끌어다 놓을 기세로 움직이는데 코앞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숨이 부딪도록 바짝 붙어 서서는 시은이 말했다.
“그러세요.”
“뭐 ”
“그러고 싶으신 거라면, 그러시라고요. 취향이 바뀌었나 보죠. 솔직한 여자에서 답답한 여자로 ”
“뭐라고 ”
원피스 단추를 하나씩 푸는 동작은 고요했다. 날갯죽지만 또 떨고 있겠지. 하나, 둘……. 여밈이 벌어지고 속옷이 사이로 드러난다. 끔찍하군, 웬 신파야. 욕정은 차갑게 식어간다.
손을 잡아 옆으로 내리게 하고 버튼 홀에 반쯤만 끼워진 마지막 단추를 잡았다. 시은이 호흡을 멈추는 게 느껴진다. 빠져나가려는 조그만 단추를 꼭 쥐고 버튼 홀에 완전히 밀어 넣었다. 올려다보는 시선을 무시하면서 천천히 거꾸로 채워나갔다.
“오늘은 아니야. 하지만 네가 동의했다는 사실은 기억해두지.”
*
회장과 같이 하는 직계가족만의 식사 시간 동안 대체 입은 외부의 음식물을 내부로 넣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으로 존재한다. 오늘 아침도 시작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밥을 삼분의 일쯤 비웠을 즈음 회장이 조갯국에 대해 타박을 놓았다.
“이거, 대체 누가 끓였어 ”
“아니 회장님, 국이 입에 맞지 않으신가요 ”
“그럼 네 입에는 이게 맛이야 ”
어머니 얼굴이 시퍼래졌다. 좀 싱겁다 싶긴 했지만 조갯국이 조갯국이지 별다른 맛이 무엇이란 말인가.
“쟤, 요리는 가르쳐 이따우를 국이라고 올려 차라리 멸치대가리만 넣어 끓인 물이 낫지.”
식탁 옆에 손을 모으고 서있던 시은이 움칫 어깨를 떤다. 지난 몇 달 그리도 애를 썼는데도, 부리부리한 눈동자에 손자며느리에 대한 애정이라고는 멸치대가리만큼도 비치지 않는다. 하긴, 평생 누굴 예뻐했을까. 쯔쯧, 혀 차는 소리가 메아리를 만들 만큼 밀도 높은 정적이다. 다들 숨도 멈춘 모양이다. 국그릇이 날지나 않을까 말이다.
“다 애미 너 하기 나름이지.”
그래도 이 여사가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렸다. 국그릇을 빼어내면서 머리를 조아린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어머니가 다른 국을 데우라 마라 지시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얼어붙어 있던 시은이 겨우 한 발을 떼는 것과 동시에 나는 숟가락을 들어 국을 퍼먹기 시작했다.
“나는 이거 한 그릇 더 줘.”
시은이 우두커니 멈춰 서서 쳐다본다.
“가져 와.”
이 여사가 치미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는 숨소리가 선명하다. 회장은 수저를 놓았다. 움직이는 것은 볼이 미어지도록 맨밥을 퍼 넣는 나와 국 냄비를 올린 가스레인지뿐이다.
“밥도 더 줘.”
“저…….”
시은의 턱에 서러운 물방울이 맺혔다.
저리 조용히 우는 것도 참 재주지. 나 외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국 달라니까. 목메인다.”
그새 부르르 끓었는지 어제저녁에 먹었던 우거짓국을 최 씨 아주머니가 받쳐 들고 온다. 시은이 내미는 손을 탁 쳐내고는 이 여사가 받아들고 회장에게 다가선다. 회장이 퉁퉁 숟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면서 ‘됐다. 관둬!’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돌아서려다 말고 어머니를 매섭게 쳐다보면서 물었다.
“성일 어미랑 이야기해봤어 ”
어머니가 무슨 소린가 눈을 둥그렇게 만들었다.
“성일이 김형기 의원네랑 혼삿말 있다고.”
“네에 ”
어머니가 목이 졸린 음성을 낸다. 실세 중 실세라는 김형기 의원은 A 일보사 사위이다. 고명딸은 미술사를 전공한 재원이라 했던가. 그 집안에서 하는 A 갤러리에 있다고 했지.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프로필만은 정확히 기억한다. 이 여사가 노래 불렀다. 저쪽에서 그렇게 공을 들이는데, 제발 한번 만나보기만 해보라고. 햇수로 삼 년은 된 듯싶지만, 분명 나와 선 자리에 마주앉았던 여잘 텐데. 꿩 대신 닭인가, 아니 이제 꿩과 닭이 자리를 바꾼 것이었나. 회장은 새삼스레 못마땅해 견딜 수 없는 모양이다. 혀를 차는 소리가 쏟아진다.
“쯔쯔 쯔쯔쯧, 집안이 거꾸로 가도 한참 거꾸로지. 장손이 저 꼴이니.”
송구스럽다는 제스처를 위해 나는 차려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고개를 들지 않고도 알 수 있다. 한심한 새끼, 모자란 녀석, 죽자고 일군 재산 홀라당 가져가는 운 좋은 놈, 그럼에도 고마워하지 않는 배부른 자식. 심장과 연결된 핏줄과 허파로 이어지는 기도를 볼끈 졸라매는 눈길일 것이다. 내 아버지를 미치게 만들었음이 틀림없는 그 눈길은 아버지가 사라진 후 내게로 고스란히 옮겨졌다. 그러기에 나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증오하고 진심으로 존경한다. 매번 새살을 벗겨낸 듯 새롭게 모멸감을 느껴도 나는 그처럼 훌훌 버리고 돌아서지 못한다. 다행,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에게 그가 비딱한 반항기는 물려주었을지언정 보헤미안의 피까지 내려주지는 않았다.
회장님이 노하신 덕분에 차 옆자리의 지위는 박탈당했고 아침으로 눈에 띄지 말라는 선고도 받았다. 회장 차가 출발하자마자 이 여사가 마치 썩은 나무 쓰러지듯 뒤로 넘어갔다. 흰자위가 반쯤 보이도록 눈이 뒤집히고 부들부들 사지가 경련을 일으킨다. 스트레스성 발작이다. 이 여사는 그럴 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들리지도 않는다 하는데 수차례 정밀 검진에도 아무 이상을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짤막했다. 수분 만에 정신을 차리고는 바락바락 악을 썼다. 원망과 한탄과 분노라는 건 알겠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반밖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얼음물을 받아오고 수건을 적셔오고 베개를 높이고 안절부절 못 하는 시은을 향해 ‘꺼져! 꺼져! 이 집에 발도 들이지 마! 이 재수 없는 년아!’ 목이 쉬도록 소리를 내질렀을 때 시은의 손목을 움켜쥐고 그 집에서 같이 꺼져줬다.
서너 음절마다 가파르게 꺾어지던 이 여사의 목소리가 바늘처럼 뒤통수에 꽂혀있다. 거지 같은 년, 이라고도 했는데 언젠가 어머니가 그랬다. 가장 참을 수 없는 말이 거지 같은 년이었다고.
스스로 인식하진 못하겠지만 어머니는 시은에 대해 세 가지 차원의 복합적인 혐오를 품고 있다. 어느 여자였어도 내 아내가 된 여자에게 당연히 퍼부었을 증오 외에 이 여사는 시은이 그녀를 너무 닮지 않아서, 그리고 너무 닮아서 싫어한다. 성격은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얼굴형, 체형뿐 아니라 손가락의 생김새까지 두 사람은 정 반대라고 해도 좋을 만큼 공통점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은에게는 이 여사의 뿌리 깊은 열등감과 상처를 환기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같은 구석이 있다.
기우는 집안 형편, 환영받지 못하는 결혼, 회장이 인정하지 않는 존재.
상업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회사에 경리직으로 취직한 당시를 말할 때면 어머니는 늘 자랑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다리가 예뻤는 줄 아니 당시 미니스커트가 유행이었는데 길을 다니면 사람들이 모두 다 쳐다봤어. 남자들은 또 얼마나 귀찮게 따라다녔게. 한 소대는 되었어.
사진 속의 그녀는 말대로 부풀린 쇼트커트 머리형에 미니스커트와 물방울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카메라를 향해 어색한 듯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남자 한 소대가 따라다닐 정도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지금보다는 사랑스러웠다. 평범한 것에서 특별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심미안을 가졌다는 아버지는 아마도 그녀에게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발견했을 테다. 아버지가 한눈에 반했다 했으니.
한눈에 반했다. 한눈에…….
‘한’눈에 반했다는 말은 다른 한 눈은 감아버렸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스무 살 어머니와 아버지는 멀리멀리 도망을 쳤다. 강원도 깊은 산골로, 새파란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동해 바닷가로 남해의 작은 섬으로. 어머니는 그 시절 이야기는 결코 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정확하게 들은 적은 없지만 난 암호 같은 단어 몇 마디로 검붉게 얼굴을 그을린 건강한 사내와 순박한 여자의 그림을 그렸다.
매일매일 정직한 땀을 흘려 번 돈을 가슴에 품고 집으로 돌아가는 남자는 늘 맘이 바빠 뛰다시피 했을 것이다. 남자가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연탄불에 올렸다 내렸다 맘을 졸이던 아내는 경옥아, 부르기도 전에 골목길을 울리는 그의 발소리를 듣고 이미 마당까지 달려 나갔을 것이다.
“……괜찮으세요 ”
시은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살펴보고 있다. 나는 운전에만 집중하는 척한다. 실은 어젯밤 단추를 채워준 이후, 처음 하는 말이다. 새벽에 성북동에 가는 길에도 내내 서먹하니 눈도 맞추지 않았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릴게요.”
“됐어. 집으로 가.”
“아니에요, 집에 들렀다 가시면 늦으실 거예요.”
“회사 안 갈까 싶은데 꼴도 보기 싫다 하니 까짓 거 하루 놀지 뭐.”
혼자 지하철을 태워 보내기 싫어 한 소리였는데, 시은이 딱하다는 얼굴로 잠시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저한테 언짢으신 거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당신까지 눈에 나서 마음이 좋진 않겠지만 그건 시간이 지나 당신이 제자리로 돌아가면 그만인걸요. 그냥 연극하듯 그러면 되는 거, 아니 훌륭하게 연극하는 거 아니에요 ”
“연극 ”
“그렇잖아요. 우리, 어른들은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너무 뻔뻔하게 연극하고 있잖아요.”
소리 없이 떨어지던 눈물이 연극이라면, 국을 퍼먹으면서 참아야 했던 분노와 맨밥을 삼키면서 눌렀던 정체 모를 뜨뜻한 감정들도 연극이다. 장자의 나비도 아닐진대, 연극 잘하라 격려했던 내가 연극이라는 말에 분노를 느끼는 건, 연극 속인지 연극 밖인지 구분할 수도 없다. 어느 편이 무대인지도. 나는 미간을 문질렀다.
“아무튼 지금 회사는 안가. 그 정도 충성심 없어. 집 말고 다른데 갈까 어디 갈래 ”
“저는 집으로 갈래요. 회사 가세요. 회사 안가면, 뭐할 건데요.”
차분하게 꾸짖는 소리에 나는 제멋대로 튀어 오르는 공처럼 마음껏 비뚤어졌다.
“섹스나 할까 ”
말가니 쳐다보기만 할 뿐 대꾸도 없다. 경멸하는군. 피식 피식 웃음이 났다. 할아버지는 한심한 놈이라 경멸하고 어머니는 배신자라 경멸하고 아내는 저질이라 경멸하는군.
“왜, 섹스도 연극처럼 해봐.”
기어이 상처를 내고야 만다. 상처받았음을 채 감추지 못했다는 점이 다시 소녀다운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을 기어이 보고야 만다.
“싫음 말든가.”
눈에 들어오는 아무 지하철 역 앞에 차를 세웠다. 내려, 말하기도 전에 시은이 문을 연다. ‘다녀오세요.’ 인사까지 하면서.
제기랄. 문득 진심으로 시은을 발가벗기고 싶었다. 무자비한 창을 들고서 설마 이렇게까지는 차마 이렇게까지는 당신이 이렇게까지는, 하는 방어선을 단번에 뚫어버리는 야만스런 공격이 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