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ion | Lonelyheart RAW novel - Chapter 14
14화.
14화. 해바라기 밭
하늘색이 파랗다. 창가에 서서 고개를 꺾어가며 하늘을 살펴보았다. 조금 파래졌나 회색빛 산이 머리끝을 잠그듯 희미하게 경계가 뭉개진 하늘이나 건물에 가린 하늘이나 보이는 이쪽, 저쪽 모두 그만그만할 뿐이다. 달력으로는 분명 가을 절기가 맞지만 아직은 대부분 사람들이 반소매 차림이다. 하늘도 기온도 분명 공기까지 다른가 보군.
모니터를 다시 들여다본다. 정직하게 색칠이나 한 듯 파란 하늘 아래 유치하다 싶게 노란 꽃들이다. 질기게 태양을 향해 목을 빼는 꽃들. 목이 꺾여 죽는 날까지 태양을 바라는 억센 의지는 보는 사람까지 질리게 하는 면이 있다. 대충 살다가 죽어.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진심으로 조언해주고 싶은 충동이 솟는다. 자잘한 꽃무늬 원피스는 처음 보는 옷이다. 도톰한 핑크색 카디건은 기억난다. 사진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몸과 팔이 닿는 자리가 똑같이 보풀이 일어나고 팔꿈치 부분과 소맷부리가 느슨하게 늘어져 있을 테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며칠 지나지 않았을 즈음이었다. 저녁 약속이 생각보다 일찍 마무리되었다. 자리를 바꾼 국장은 절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까닭에 술자리는 결코 사양이었고 식사시간에 곁들인 반주 몇 잔으로 충분하게 된 셈이었다. 봄의 끝자락에선 시드는 꽃도 시원한 바람 한 줄기도 아쉬운 법이다. 봄밤만이 줄 수 있는 야릿하고 알싸한 느낌도. 차에서 내려 걸음걸음 봄밤을 잡듯이 골목길을 천천히 오르던 중이었다.
‘저…….’
뒤돌아보니 제가 불러놓고 더 놀라 했다. 집에 있다 잠시 나온 건지 저지 면 원피스에 카디건 하나만 걸치고 맨발에 캔버스화를 신고 있었다. 얘는 결혼하고 일주일 만에 아줌마로군.
‘어떻게 지금 늦으신다고 들었는데요.’
무겁다 싶게 불룩 채운 마트 봉지를 턱으로 가리키며 퉁명스레 물었다.
‘그게 뭐야.’
과일이 떨어졌어요. 토마토 샀는데. 들른 참에 세제도 사고.
‘이리 줘. 내가 들게.’
‘아니에요. 무겁지 않습니다.’
안 무겁긴, 손끝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묵직했다.
‘어두운데 왜 다녀.’
‘금방 다녀오려고 했는데. 매일 그러지는 않아요. 토마토주스 하려구요. 좋아하신다고 그래서요.’
최 씨 아주머니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 싶었다.
‘아니세요 ’
가로등 불빛에 보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긴, 이런 걸 살만한 마트는 한참 아래 큰길가에나 가야 있을 테다. 멈춰 서서 보자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토마토 안 좋아하시면 다른 걸로 해드릴게요. 집에 딸기 있어요. 오렌지랑 사과도 있구요.’
과일이 떨어졌다더니 많기도 하다.
‘아니야, 토마토 좋아해.’
무안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던 얼굴이 금세 확 펴졌다. 시은이 웃으면서 옷소매로 이마에 솟은 땀을 닦았다. 순간, 바람이 스치면서 냄새가 묻어왔다. 나는 흐흠, 필요도 없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증조모가 바르던 코티 분 향기 같기도 하고 여린 살 냄새 같기도 한, 뇌 속 어딘가를 쏜살같이 파고들어 탁 하고 꽂혔던 그 냄새의 기억이 그리 특별하지는 않을 것이다. 싱싱한 과일을 쪼개거나 한밤 창문을 열거나 혹은 걷다 지쳐 기댄 담벼락에서나 예상치 못하게 만나는 급작스럽고도 뚜렷한 향기. 새콤한 과육이거나 비릿한 빗줄기이거나 담을 넘어 아무렇게나 자란 꽃가지 거나, 살아오며 그런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충격들은 늘 있는 법이니까. 다만 예고 없이 재생된 기억이 혼돈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점이 문제일 따름이다.
모니터를 들여다볼 뿐인데, 마치 보풀이 인 낡은 카디건에 얼굴을 묻었던 것만 같이 포근한 감촉마저 선명하다. 몰래 가지고 놀다가 온통 옷이며 머리에 뒤집어써버렸던 연한 핑크색 분가루가 건져 올린 추억과 여자의 살내음이 만드는 유혹이 봄밤처럼 야릿하고 봄밤같이 매혹적이다.
시은은 자잘한 꽃무늬 원피스에 하얀 운동화, 그리고 핑크색 카디건차림이다. 가슴 높이까지 오는 해바라기 밭 사이를 걷고 있다. 좁은 길에 어깨가 닿을 듯이 나란히, 혹은 한발 뒤에 선 남자는 여전히 다정하고 진솔한 눈이다. 두툼한 책 한 권을 건네고 시은이 무안한 웃음을 지으면서 받는다. 시은이 가슴에 책을 안고 해바라기 밭을 건너간다. 태양이 내리쬐는 해바라기 밭. 파란 하늘과 맞닿은 해바라기 밭. 질긴 사랑, 해바라기 밭.
미치겠군. 그들의 사랑이 구역질나는 건 결코 아니지만, 욕지기는 계속 올라왔다.
동하자식, 좀 말리지 않고선.
하루 종일 괴롭혔던 토기와 끔찍한 두통은 저녁때가 되어서나 진정되었다. 침대에 누웠다가 화장실로 뛰쳐나가고 다시 비틀거리면서 드러눕고 그러다가 꼴딱 하루해를 넘긴 셈이다. 그러면서도 침대 옆에 끌어다 둔 노트북으로 이메일은 계속 열었다. 봤던 사진을 또 보고 새로운 사진을 기다리고. 말대로 주접스럽긴. 바람난 아내, 아니 떠나간 여자 스토킹이다.
뒤통수를 펑펑 쳐대는 듯한 두통에 머릴 감싸다가도, 마구 긁혀 퉁퉁 불어버린 것 같은 위장을 끌어안듯 온몸을 둥그렇게 말다가도 파란 하늘과 노란 해바라기 밭과 분홍색 카디건을 떠올렸다. 알싸한 살냄새와 이마에 맺힌 땀, 토마토주스에서 그쳐주면 좋으련만 두통 있으시죠, 손가락 두개를 이마에 겹쳐 올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기억의 고리란 때론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속 안 좋으시죠, 조그맣게 답하던 목소리가 영수증 고깔을 씌운 지폐를 잡던 떨리는 손이 비참함을 깨물던 입술이 여지없이 떠오른다. 경련이 이는 눈가에 약지를 대고 왜, 제가 안심이 되어요, 조용히 묻던 날이 떠오른다. 여린 약지에, 무거운 내 머리까지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이제 그만, 제발 그만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더욱 다양하게, 릴 필름이 다르륵다르륵 돌아가듯이 끝없이 연결되는 장면들에 정수리가 얼얼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물을 마시고 좁은 통로를 건너 시은의 방문 고리를 잡았다. 일주일이 넘도록 주인 없는 빈방과 기싸움이라도 하듯이 한 번 쳐다보지도 않으려 했다. 문을 열면서 나는 옅게 깔려있는 시은의 향을 맡았다고 착각한다.
시은이 누웠을 소파에 앉고 시은이 앉았을 화장대 앞에 앉는다. 내놓은 로션 하나 없는 화장대 서랍을 하나씩 차례로 열었다. 차곡차곡 모은 영수증이 제일 위 칸에 들어있었다. 월별로 정리해 집게로 고정시킨 영수증 묶음 옆에는 필기구가 빡빡하게 들어있는 지퍼 달린 필통 하나, 아래에는 쓰지 않은 노트 세 권이 있었다. 두 번째 서랍 안쪽으로는 컴필레이션 시디 몇 장과 껌 한 통, 박하사탕 반 봉지가 들어있고 화장품을 두었던 자리인 듯 앞쪽은 텅 비어있었다.
마지막 서랍은 A4용지에 복사된 레시피 파일 두 권, 머리핀을 넣어둔 상자 하나, 빗과 솔, 그리고 엎어놓은 결혼사진 액자로 꽉 차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주례 앞에 서있는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액자 발을 벌려 화장대 위에 두었다. 시은은 아래만 다소곳이 보고 있고 나는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꽉 쥐고 있다. 그 순간, 빛의 속도로 대기권 밖 우주로 튕겨 나갔다가 돌아온 것만 같았던, 적어도 그 순간만은 나는 슈퍼맨처럼 용기 충천했었다. 스파이더맨 옷을 훔쳐 입고 그 녀석이 식장 창을 뚫고 들어온다 해도 빼앗기지 않으리라 자신만만했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냈다. 이미 늦었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때 돌아가도 받아줄 녀석이 지금 돌아간 시은을 받아주었다 해도, 그리하여 사랑을 믿는 쪽에 배팅한 시은이 결국 깜찍한 성공을 거두었다 해도 나는 상관없었다. 어깨에 두른 빨간 망토를 펄럭거리면서 거미줄을 모조리 끊어버리고 질긴 사랑의 결정체 안에 서있는 시은을 채어올 테니까.
나는 처음부터 사랑을 믿지 않았으니,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도망가지 않고 버진로드에 섰다던 아내의 배신에 대해 상처 입을 가슴은 없었다. 다만, 시은은 좀 더 내 아내여야 한다. 이곳, 이 집, 내 옆에서. 마치 강물이 바다로 흘러야 하듯,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듯이, 그리고 해바라기가 태양을 보듯…… 그녀는 내 아내여야 한다라는 명제만이 선명했다.
연결이 되지 않아 어쩌고 하는 여자 목소리를 세 번 째 거푸 듣고는 친절한 설명대로 메시지를 녹음하리라 했지만 삐이, 소리가 나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결국 숨소리만 몇 번 내다가 끊고는 다시 버튼을 눌렀다. 전화는 받아야 할 것 아냐, 화가 불끈 솟았다. 또 한 번 ‘삐이’ 소리가 났을 때 가라앉았던 두통이 펄쩍 널을 뛰었다. 이를 꽉 물고선 말했다.
“머리가 아파 죽겠어. 두통약 어디 둔 거야.”
결국 당장 오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식의 협박성 멘트와는 거리가 먼 녹음을 하고는 핸드폰을 소파에 처박아버렸다. 찔꺽찔꺽 널뛰는 박자에 맞춰 관자놀이가 춤을 추었다. 어후, 지겹다. 소파에 드러누워버리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집 나간 아내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다가 끄응 신음소리를 냈다.
-여보세요
“응.”
-두통 심하세요
“죽겠다고. 못 들었어 ”
-혹시 술 드셨어요
“그래.”
-속은 괜찮으세요
“괜찮겠어 ”
시은이 잠시 가만있더니 약 위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냉장고 오른편으로 부엌 장이요. 바로 옆 말고 그 옆, 위쪽 여닫이문을 열면 두 번째 칸에 약 상자가 있어요. 흰색에 하늘색 줄무늬가 있는 박스예요. 까만 박스 아니구요. 약 상자가 두 갠데 하나는 먹는 약 아니에요. 구급함 같은 거고 다른 박스 열어보면 약병들 말고 약국 봉지가 몇 개 있는데 표시되어있어요. 아마 ‘두통, 속 아플 때’라고 써뒀을 거예요. 아시죠 그날, 처음 심부름시키신 날…….
시은이 말을 멈췄다. 말을 하려다 말고, 하려다 말고 숨을 두어 번 내쉬었다.
-그날 드셨던 약이, 있어요.
“나더러 찾아 먹으라 ”
-……뭘 좀 드셨어요
“왜, 숭늉 끓이는 것도 가르쳐주려고 ”
-본부장님.
“왜.”
-성북동 가세요. 죄송합니다.
“뭔 소린지 못 알아먹겠어. 냉장고가 어쩌고 거기까지 밖에 몰라.”
-……성북동으로 가세요.
좀 닥치라 소릴 꾹꾹 누르면서 어금니 사이로 말을 밀어냈다.
“성북동 누구 머리 터져 죽었다 기사 나는 꼴 볼래 ”
-가서 뭐 좀 드시고 약 드세요.
이런 걸 쇠심줄이라고 하지. 결국 폭발했다.
“닥치고 당장 와! 내가 가서 끌고 오기 전에 니 발로 기어들어오라고!”
-저는, 이제 못 해요.
“내가 해.”
-이대로 안 된다고 한 사람은 당신이세요.
“되게 할 테니까!”
-못 해요.
“정시은.”
-아니요, 못해요. 못해요. 저는, 저는, 못해요.
시은이 숨을 몰아쉰다. 분명 속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을 것이다.
-돈은…… 지금 드릴 수 있는 만큼 돌려드리고, 버는 대로 갚…….
“보고 싶어. 와.”
눈을 감으니 봄날같이 아지랑이가 어른댄다.
“나 머리아파. ……죽겠어. 당장 오라고.”
시은은 잠시 그대로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면서 일으킨 음파가 소리가 되어 핸드폰을 통해 분명 들렸다고 믿었다. 뭐든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적어도 ‘내일 다시 전화 드릴게요’ 정도로는 답해주지 않을까 기대가 빠르게 부푸는 순간 시은은 어떤 반응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다시 번호를 눌렀을 때, 이번에는 고객님의 핸드폰 전원이 꺼져 있어, 라는 설명을 들어야 했다. 칼로 베인 듯 속이 아프기 시작했다. 솟구치는 피를 막는 것처럼 위장 부근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TV 채널을 10초에 한 번꼴로 바꾸었다. 뉴스는 끝까지 시청한 후 다음 채널로 넘겼다. 코미디 프로그램이나 보면 좀 나을까 싶었지만 방청객은 자지러지게 웃는데 도무지 언제 웃음을 터뜨려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노려보다가 그대로 패스했다.
드라마 채널에서는 예전 프로그램을 재방영 하는 것인지 말 그대로 철이 지나 겨울옷을 입고 있는 철 지난 드라마에서 어느 놈이 개폼을 잡고 섰다. 돌아서는 여자를 확 낚아채서는 ‘너는 내 여자야. 아무한테도 못 줘.’ 사뭇 비장하게 소리 지른다. 여자는 손목이 잡힌 채로 다른 손으로는 남자를 밀어낸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몇 번을 말해야 알아요. 우린 끝난 사이라구요.’
얼씨구, 남자가 억지로 키스를 한다. 진짜 키스다. 언제부터 한국 드라마가 이렇게 야했더라.
‘이민혁 그런 보잘것없는 놈한테 가겠다고 ’
‘당신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이에요.’
유치하군, 욕을 하려다가 얼굴이 홧홧해진다.
김민우, 시은보다 한 살 아래, 그러니까 나보다는 무려 일곱 해 아래. 부친은 영세한 출판업을 하고 아래로는 남동생과 여동생 하나씩을 두고 있다.
TV 속에 여자는 끝내 돌아서 걸어가고 남자는 벽에 주먹질을 해댄다. 채널을 돌렸다. 게임 채널과 뮤직 채널을 넘어가니 이제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아 처음 채널로 돌아왔다. 02번 지역방송에선 먼지 날리는 야외에서 어설픈 테이블을 놓고서는 식어 빠진 음식을 시식 중이다.
‘아우, 넘 맛있어. 입에서 살살 녹아.’
TV를 껐다. 하루 종일 앓느라 땀에 젖은 몸이 갑자기 견딜 수 없이 찌뿌듯해 욕실로 들어갔다. 거품이 잔뜩 일도록 양치질을 하고 뜨거운 물에 샤워를 했다.
머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살살 털면서 욕실에서 나와 속옷을 챙겨 입었다. 한층 개운해진 기분으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창으론 밤이 짙어가고 있었다. 노트북 터치패드를 문질러 노란 해바라기와 핑크색 카디건을 한 번만 더 본다. 속이 얇게 저며지듯 또 아프다. 위가 단단히 탈이 났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이마에 떨어진 햇살이 사금파리처럼 부서지고 있다. 눈이 시려 나는 노트북을 덮고 내 눈도 덮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직접 보은에 내려갈 것이다. 아무리 싫다 그래도, 울고 애원하고 소리를 질러도 끌고 올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돌아오기 전, 해바라기 밭도 통째로 사버릴 것이다. 모조리 갈아엎어야지.
얼마쯤 지났는지, 머리를 꼭 죄는 통증에 잠이 깨었다. 이러다간 내일도 드러눕겠다 싶어 기억을 더듬었다. 냉장고 옆 뭐라 그랬지. 되는대로 열어젖혀 보다가 여기저기를 헤집고 뒤집어 상자를 찾아냈다.
‘두통, 속 아플 때 드시는 약.’
달필이군.
꼭꼭 눌러쓰는 하얀 손과 글을 쓰느라 아래로 기울인 얼굴의 옆선까지 보이는 듯하다. 급한 대로 한 봉지 꺼내서 입에 털어 넣은 뒤에 냉장고를 속을 더듬었다. 물병에는 물이 한 방울도 없다. 하루 내내 마셔 댔으니 비어있는 것도 당연하다.
생수가 어디 있더라.
입에서 약이 녹기 시작한다. 더럽게 쓰다. 첫날, 두리번거릴 새도 없이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내밀던 시은이 떠오른다. 젠장할, 이다. 동글동글 토끼 똥 같은 약은 계속 혓바닥 위에서 녹고 있다. 결국 싱크대 근처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컵을 들고 수돗물을 받았다. 서울시 상수도를 믿어야지. 소독약 냄새와 정체 모를 쇠 맛을 느끼면서, 삼분의 일은 녹아내려 온통 혀와 잇몸에 들러붙은 약을 애를 써서 삼켰다.
약은 먹었다는 사실만으로 진정 효과를 보인다. 잠은 달아났지만 머리와 위장을 들쑤시던 통증이 둔해진 느낌이었다. TV나 또 볼까 하여 거실로 들어서다가 목덜미가 선득해서 보니 발코니 문이 열려있었다. 바람이 제법 찼다. 빌라에 붙은 자그마한 정원에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청명하다. 가을은 이 밤, 소리 없이 다가와 라는 노래 가사가 있었지 싶다. 문을 닫고 블라인드도 꼼꼼히 내리고 스탠드 조도를 가장 낮게 맞추었다.
가을은 이 밤, 소리 없이 다가와 내 마음을 울리고.
거실 중간에 우두커니 서서 이마를 짚었다가 떼는데 맞은편으로 소리 없이 현관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