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ion | Lonelyheart RAW novel - Chapter 15
15화.
15화. 한 번 더 말해줘요
노란 등 아래, 어깨 길이 머리를 풀어 내리고 남색 스웨터와 물이 빠진 연한 청바지 차림으로 들어서는 시은이 보인다. 모래알 하나 떨어뜨리는 소리도 내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레 움직이더니 내부로 통하는 현관 중문을 열고서야 나를 발견한 듯 우뚝 멈춰 섰다. 나는 성큼성큼 몇 발 만에 그녀 앞으로 섰다. 시은이 이마로 내려온 머리를 걷으면서 올려다보았다. 그리 놀라는 기색도 없다. 어스름 저녁에 잠시 앞마당이나 나갔다 들어 온 것처럼. 이마에 손이라도 짚어줄 듯이 다정한 눈을 하고 있다. 그러지 마, 다 주지 않을 거면서 다 줄 거 같은 그런 눈을 하고서 날 흔들지 마. 소리라도 지를 것만 같다.
“좀 어떠세요 약 찾아 드릴게…….”
말이 끝나기 전에 나는 다섯 손가락을 시은의 머리칼 사이에 넣었다. 머리칼을 파고든 손가락으로 뒤통수를 꼭 잡고 고개를 깊숙이 숙여 입술을 찾았다. 파드득거리는 어깨는 다른 손으로 붙들고 입과 혀를 한꺼번에 삼켜버릴 듯 일방적으로 굴었다.
입술과 혓바닥에 전해지는 촉감과 미감은 눈앞이 어찔하도록 자극적이다. 매끈, 벗어나려는 혀를 붙잡을 때마다 할딱할딱 찰라의 틈 사이로 들고 나는 숨을 느낄 때마다 욕망이 한 단계 두 단계씩 뛰어올랐다. 이제 그만하겠지 긴장을 놓는 입술을 다시 가르면 작은 몸 전체가 꼿꼿하게 긴장한다. 주먹을 쥐고 가슴을 밀고 어깨를 때리고 고개를 비튼다.
“가만있어.”
입술에 말하고 턱을 물고 다시 입술에.
이제 시은은 말을 듣는 건지 기운이 빠진 건지 손을 어깨에 올린 채 눈을 감고 있다. 새처럼 입을 한 번 두 번 맞추고 한 발 떨어졌다. 시은이 그제야 눈을 뜨고 나를 빤히 보면서 숨을 가쁘게 쉬었다. 입술을 주먹으로 닦아내다가 미간을 찌푸린다.
“도대체, 이게 무슨.”
제 정신이에요, 묻는 눈빛이 파랬다. 피가 배어나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자 시은이 신경질적으로 털어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바로 잡으려는 듯 그녀가 양손을 이마께로 올리는 순간 스웨터 허리 부분을 잡았다. 악, 비명처럼 시은이 소리를 질렀다. 뒷걸음질 치면서 반쯤 걷어 올려진 스웨터를 필사적으로 붙잡는다. 힘으로 상대가 될 리가.
사금파리처럼 부서지던 햇살 아래 노란 해바라기가 어룽댄다. 나는 시은의 손을 가볍게 떼어내고 어깨를 한 손으로 누른 채 스웨터를 마저 올렸다.
“잠깐, 잠시만요.”
벽에 붙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시은이 손을 잡았다.
“잠시만.”
그날처럼 따뜻하고 날캉거리는 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쓰다듬는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
다정하고 차분한 말투에 나는 어금니를 사려 문다.
“더블로 줄게.”
시은이 숨을 멈췄다. 손이 툭 떨어졌다.
“따따블로 하든가.”
눈물이 굴러 내린다.
“싫어 그러시라고 내 코앞에서 단추 풀어내렸던 사람은 정시은 너 아니었어 ”
“맞아요. 그랬어요.”
시은이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물기가 걷어지자 오기와 비난이 당돌하게 빛났다.
“좋아, 그럼 계속해.”
손목을 붙잡고 침실로 끌다시피 데리고 왔다. 차라리 밝은 날, 내가 찾아갈 때까지 있어야 했다. 해바라기 밭에 그녀라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몇 겹이든, 양파같이 매끈한 속을 벗기고 또 벗겨버리고 싶었다. 태양 아래선 노란 해바라기 밭에 서고 달 아래에선 회색빛 내 집으로 기어들어온 그녀에, 사랑을 믿는 저 눈동자에, 그 믿음에 대한 배신에, 사랑은 하찮은 것임을 증명함에 폭발하듯 화가 솟았다. 이율배반적이다. 사랑의 하찮음을 노래하는 내가 왜 화를 내나.
입술을 깨물어 벌리고 혀를 무자비하게 밀어 넣었다. 손을 넣어 가슴을 움켜잡았다가 놓자 몸이 꺾일 듯이 구부러지면서 뒤로 빠진다. 앞으로 기울여진 상체 너머 스웨터 등판 부분을 잡고 이번에는 여지없이 단번에 끌어당겼다. 품이 큰 스웨터는 여윈 몸을 훌렁 저항 없이 빠져나간다. 아아, 울음 같은 소릴 내며 시은이 가슴을 감싼다. 한 발 주춤 물러서는 걸 청바지 허리선 사이로 손을 넣어 끌어당겼다. 비틀 시은이 버들가지처럼 휘어졌다.
“본부장, 님.”
시은이 꽉 잠긴 목소리로 울먹인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잘만 견디더니.
“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흔들지 마. 또 봐줄 거라 생각하지 마.
“한 번만…… 더, 말해주세요.”
“뭘.”
“전화로 하셨던 말.”
무슨 소린가 쳐다보는데 시은이 손을 들어 내 볼을 감쌌다. 이마를 만지고 콧날을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저절로 눈이 감긴다. 무슨 말, 시은이 검지로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마치 이 입술로 말했잖아요. 비난하듯.
무슨 말, 무슨 말이지. 당장 오라는 말 싫다고 했잖아. 안된다고 이제 그만둔다고 몇 번이나 딱 잘라서.
지독한 두통 속에 지껄였던 말을 뒤죽박죽 재생시키다가 어느 순간 달칵, 빠진 톱니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작은 톱니바퀴 하나가 힘겹게 돌아가자 큰 바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혹시, 보고 싶단…… 말 ”
이미 끓어오른 몸보다 더 뜨겁게 얼굴이 달아오른다. 시은이 뺨을 쓰다듬고 턱을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더 말해줘요.”
“했잖아. 뭘 또 해.”
얼굴을 돌리려 하자 시은이 턱을 붙잡았다. 나 좀 봐요.
“나, 오게 만들었잖아요. 다시는 안 보려고 했는데……. 당신 완전히 포기하려고, 버리려고 했는데.”
“그럼 버려! 왜 왔어 ”
시은의 손을 털어내고 물러서자 시은이 물러선 만큼 다가섰다.
“아니에요, 하지 마세요. 말 안 하셔도 돼요.”
시은이 가슴에 이마를 기댄다.
많이 보고 싶었어. 너완 다르게, 라는 말을 삼키고 시은의 벗은 등을 쓰다듬었다. 청바지 아래로 따뜻하고 말랑거리는 엉덩이가 잡힌다. 시은이 품에서 작게 진저리를 친다. 몇 날 며칠을 찾아 헤매던 새를 다시 붙잡아 품은 듯 가슴이 뻐근해진다. 상관없다. 멍청한 룰 따위. 이 여자가 필요하다. 얼마를 지불하든, 무엇을 담보로 잡히든…….
새장의 문을 단단하게 걸어 잠글 것이다. 날개를 파닥거리다가 이리저리 부딪혀 상처가 난다 해도, 즐겁게 노래 부르는 법을 잊어버린다 해도 시름시름 세상을 그리워하면서 종종 앓는다 해도 다시는 달아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 햇살, 사금파리 같은 햇살과 노란 꽃 사이로 이제 다시는 들어서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
소행성이 부딪혀 폭발하는 것만 같았다. 빛과 어둠이 충돌하여 뜨거운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결코 합일될 수 없는 두 가지가 격렬하게 엉켰다가 분리되는 순간 눈이 멀어버리는 듯 시야가 아득해졌다. 얼마 후, 불분명하게 흐트러진 그림자처럼 보이던 사물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제일 처음 보인 건 찡그린 이마 그리고 흐려진 눈동자였다. 손가락으로 이마를 쓸어내리고 눈물을 닦았다.
“왜 울지 ”
“아니……에요.”
“나 우는 여자 싫다고 말 안 했던가. 도대체 너, 섹스 후에 우는 건 무슨 의미야 ”
고개를 돌리려는 걸 꽉 붙잡았다. 속에서 불길이 다시 치솟는 기분이었다. 시은은 말없이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눈동자에는 원망이나 슬픔, 혹은 억울함 따위의 감정들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후회하는 거야 ”
“아니에요.”
“그럼 뭐야 ”
자리에서 일어나서 원망스럽냐고 물을 참이었다. 꿋꿋하게 지키던 하나의 선이 실상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눈 감고 훌쩍 뛰어넘으면 그만임을 확인시켜주어 원망스럽냐고.
“그런 거 아니…….”
시은이 따라 몸을 급히 일으키다 말고 아, 작게 신음하면서 이맛살을 또 찌푸렸다.
“왜, 왜 그래 ”
풀썩 뒤로 넘어가는 몸을 받치고서 얼굴을 살피면서 물었다.
“어디 아파 ”
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서 울어 ”
“조금, 생각보다 좀 많이……아파서.”
눈물이 주르륵 또 흐른다. 스탠드 밝기를 조절하고 가리고 있던 이불을 걷어냈다. 젠장. 나 혼자 정신이 나갔었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너! 왜 아까 말 안 했어!”
버럭 소릴 지르면서 안아 올렸다. 말해야 할 거 아냐, 아프다고, 처음이라고. 나도 그 정도 상식은 있는데 그럼 아무리 미쳤다 해도 퍼뜩 정신을 차렸을 텐데. 정신을 차렸다 해도 별반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욕실에 데리고 가서 부스 안에 세웠더니 시은이 아랫배를 움켜쥐면서 몸을 웅크렸다.
“괜찮아요. 나가세요.”
쭈그리고 앉은 채로 시은이 바닥만 보면서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두리번거리다가 욕조마개를 닫고 물을 틀었다. 여전히 그 자세인 시은을 일으켜 안고는 욕조에 반쯤 눕혔다. 시은이 눈을 감고는 입술을 질끈 깨문다. 괜찮아, 묻지도 못하고 욕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서 눈물이 남은 뺨을 만졌다.
“정신이 나갔었어.”
시은이 눈을 떴다. 이제 보니 입술도 부어있다. 조심조심 쓰다듬자 터진 부분이 아린지 움칫 물러난다. 팔을 둘러 어깨를 꼭 끌어안고 이마를 맞댔다. 가느다란 숨이 입술을 간질였다. 정말 미쳤나 보다. 다시 안고 싶어, 허리부터 등줄기까지 저릿하다.
“다음번엔,”
말을 뱉어놓고 후회했다. 서지도 못하게 만들고는 이게 무슨. 어떻게 얼버무릴까 기민하게 수습할 만큼 머리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무튼, 다음번에는 안 그래.”
다시는 못 하겠다 거절하면 어떻게 하나 싶은 순간 이마를 맞댄 채로 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움직임에 심장이 떨렸다. 맞닿은 피부를 통과하여 핏줄끼리 서로의 관속을 흐르는 액체를 교환하듯이 뉴런 조직들이 서로 엉켜 교감하듯이 내 몸속으로 시은이 옮겨왔다. 눈물까지 옮아왔는지 갑자기 눈가가 욱신거렸다. 그 사이 욕조의 물이 적당한 높이로 차올라 수도꼭지를 잠갔다. 손을 넣어보니 조금 뜨거운 정도다.
“뜨거워 ”
“아니요.”
시은이 벽을 향해 비스듬히 몸을 틀었다. 다리를 포개고 가슴을 손으로 가린다. 불편하니 나가란 소린데 온도를 한 번 더 가늠하는 척하면서 어깨를 만졌다. 무안함이 가시자 유치한 뿌듯함이 그 자리를 빠르게 채운다.
“처음이 엉망이라 미안한데,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
“그렇지…… 않아요.”
엉망이 아니란 말인지 억울해하지 않는다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것이라 해도 좋았다. 새삼스레 이렇게나 내가 치졸한 본성을 소유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젠 처음이 아닌 시은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착각마저 하려 한다. 드러난 등에 손으로 물을 끼얹으면서 말했다.
“나도 그런 셈이니까.”
시은이 움칫 놀라는 기색이 느껴진다.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그렇다고 처음은 아냐!”
전형적이다 못해 구시대 유물처럼 느껴지는 경험이다. 군대 가기 전에 필름이 끊기도록 마신 후 정신을 차려보니 그랬구나, 했던 결코 유쾌하지 않은 기억. 벌떡 일어서서 나가려는데 시은이 웃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깨문다. 정말 엉망이로군, 이다. 확 달아오르는 얼굴을 거칠게 문지르고 문을 닫는데 쾅하고 요란한 소리가 난다.
바깥쪽 욕실에서 물을 끼얹은 후 새 속옷으로 갈아입고 시트를 갈았다. 깔았던 시트는 반듯하게 접은 후 침대 아래에 두었다. 세탁하지 말라고 해야겠다 싶다가 변태 같은 느낌이 들어 말은 하지 말아야지 맘먹었다. 대신 쉽게 눈에 띄지 않도록 깊숙이 밀어 넣어버렸다.
침대에 등을 붙이자마자 피로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시은을 기다려야 되는데, 잠들면 정말 매너 없는 짓인데 하면서도 이미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으로 날쌔게 덮쳐드는 수마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두통은 사라졌지만 속은 여전히 쓰리다. 작고 말랑거리는 몸을 끌어안고 잠시만 눈을 붙이고 싶다.
아니, 얘는 왜 안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