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ion | Lonelyheart RAW novel - Chapter 22
22화.
22화. 거지 같은 신파
“그대로 나갈 거야 옷 안 갈아입어 ”
“당신은, 당신 같이 강하고 자신만만한 사람은, 몰라요. 후두둑 맞고는 햇볕에 몸이 마르면 상관없는 소나기가 아냐. 난 어떤 때는 24시간동안, 매일매일을 월화수목금토일을 가슴을 쥐어뜯어요. 그래요. 난 당신한테 돈을 받아요. 그것까지 아신다면, 당신 집안 누군가가 그 사실까지 안다면 날, 뭐라고 생각할까 난 부끄러워서 하늘을 볼 수가 없어요.”
“무슨 상관이야!”
바르르 떨리는 입술은 크게 벌어지지도 않았다. 잇새로 입술 사이로 끊어지듯 이어지는 숨소리에 반쯤 묻혀서 시은은 불덩이를 토해내듯이 한 단어 한 단어를 내뱉었다.
“사랑하지도, 않잖아! 사랑하지도 않는데, 결혼했잖아. 나는 돈을 보고…… 당신은 내가 만만하니까! 이 자리에, 사랑하는 다른 여자는 둘 수 없으니까. 나를, 나를 골랐잖아. 돈 쥐어주면서 심부름시키듯, 1년만 하라고.”
“나는, 당신이랑 잠도 자. 밥도 해주고 섹스도 하고 당신 엄마, 당신 할아버지 비위를 맞추고 입안에 혀처럼, 온몸이 더듬이가 된 거처럼 바짝 긴장해서 발발 떨어. 그러곤 돈을 받아. 싫어, 싫어, 끔찍하게 싫은데 싫어한다는 게 죄스러워서 나는 또 웃고. 나는, 나는, 나는요……. 정말이지, 언제부턴가 벌레가, 되어버린 거 같아.”
“뭐라고 너 지금 뭐라 했어. 다시 말해봐! 뭐 ”
아아……, 시은이 비명을 지르면서 얼굴을 감추었다.
“혼자 있게 해줘요. 제발.”
도무지 한 걸음조차 다가갈 여지를 주지 않았다. 방에서 쫓겨나 한참을 서재에 틀어박혀서 인터넷 사이트나 돌아다니고 있었다. 시은이 노크를 하고 들어오더니 무선전화기를 내밀었다. 도련님이에요. 목소리가 꽉 잠겨있었지만, 얼굴에 눈물자국은 없었다.
곤혹스러운 자리를 도망치듯 나왔지만 열두 시 전에는 들어가야지 싶다. 양주 한 병이 비었다. 발라드가 주 종목인 디제이가 풍부한 성량의 보유자만이 소화할 수 있는 곡을 열창하고 있다. 가수 해도 되겠다 싶을 만큼이지만 질질 끄는 발라드는 대체로 질색이다. 클라이맥스에 오를 때면, 으레 목이 졸리는 기분이다. 역시 노래는 디제이 디오씨 시절이 제일 좋았다. 옆에 앉은 자식이 구겨지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딱, 손가락을 맞부딪친다.
“잠시 이야기 좀 할게.”
마이크를 내려놓은 디제이가 뭐 더 필요하신 게 없냐 사근사근 묻는다.
“애들 좀 불러 ”
성일이 이 자식은 밖에서 만나면 꼭 반말을 찍찍 뱉는다.
“됐어. 성가시게.”
성일이 손짓을 하자, 디제이가 문을 닫고 나간다. 둘만 멀뚱멀뚱하게 남게 된 셈이다. 만나자고 한 이유를 빨리 풀어내고 이만 자리를 정리하고 싶다. 시계를 흘끗 확인한다. 열한 시가 다 되어간다. 시은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느 구석쯤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건 아닐까. 시은이 전화기를 들고 도련님이요, 그러면서 건네줄 때 없다 하라 할 것을.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성일을 빤히 쳐다본다. 본론을 꺼내라고 삼십 초만 기다렸다가 독촉할 참인데 성일이 눈을 감은 채로 형, 하고 부른다.
“거기 생수 좀 줘.”
생수병은 팔만 좀 뻗으면 닿을 거리다.
“네가 갖다 먹어.”
성일은 소파 뒤로 목을 젖히고는 꼼짝도 않는다. 그래, 뜬금없이 불러냈을 때 거절하지 않은 마당에, 내가 생수 한 병 집어다 준다고 뭔 대수랴. 뚜껑을 비틀어서 건네주자 쉬지 않고 반 넘게 마신다. 꿀꺽꿀꺽 식도로 물이 넘어가는 소리까지 선명하다. 발라드 노래를 불러도 좋으니 디제이라도 두지, 맨송맨송 둘이서 답답한 룸에 앉아서 뭘 하잔 말인가.
“결혼식 언제야 곧 할 거처럼 하더니 왜 소식이 늦어.”
“깰까 싶어요.”
“왜 ”
“못생겨서.”
“미친, 너 뭐냐. 그런 건 실물 본 순간 결정해야지. 이제 와서 예쁜 게 뭐가 필요해. 여자, 데리고 살면 다 똑같아.”
성일이 키득 키득거리더니 숫제 머리를 무릎에 박을 기세로 상체를 구부리며 웃기 시작했다.
“형수님처럼 예쁜 분 데리고 사니까 예쁜 게 뭐가 필요해, 그런 소릴 하는 거지. 안 그래 ”
“예쁘기는. 그리고, 너 종결어미 통일해. 까든가, 올리든가.”
성일이 말끄러미 쳐다보더니 맥주를 따랐다. 새 위스키 병을 뜯어 조금 붓고 흔들어서 내민다.
“따라줘 ”
“제가 하죠, 본부장님.”
빠르게 한 잔을 더 만들더니 건배, 잔을 부딪쳤다.
‘현건일 부부를 위하여!’
비식거리는 웃음이 섞인 구호의 까닭을 물어볼까 하다가 귀찮아서 무시하고는 한 모금 마시고 말았다.
“건일이 형.”
“왜.”
“만약에 말이죠, 내가 형처럼 그렇다면 뭐라 조언하겠어요 ”
“나처럼 ”
“사귀는 여자가 있다면.”
진심이야 뜨악하게 쳐다보자 또 키득거린다. 언제나처럼 속을 알 수가 없다. 정말 사귀는 여자가 있다는 것인지, 거짓말인지, 단순히 나를 긁어보기 위함인지 말이다. 성일은 지금 잔뜩 풀어진 자세로 고개마저 비딱하게 기울여 건들거리고 있다. 하긴, 원래 저 자식은 좀 그랬다. 회사에선 바늘처럼 꼿꼿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대신해 승승장구 K건설 2인자로 자리를 굳히던 성일의 부친이 급작스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 성일과 작은어머니가 미국으로 가버리기 전, 고작 열네 살짜리 성일은 어른들 앞에서는 지나치게 깍듯했고 어른이 없는 자리에선 눈동자부터 반드르르 반항기가 넘치는 빼딱한 놈이었다. 작은아버지가 비명횡사하지 않았다면 K건설의 서열은 분명 달라졌을 테다. 성일은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달고 다니던 영특한 녀석이었으니까. 고급스런 외가와 우아한 어머니를 가진, 귀족 피가 흐르는 녀석이니까.
“안 믿나 보네 그렇게 쳐다보고. 난 형처럼 여자랑 연애하고 사랑하고 못하나 ”
“정말 만나는 사람이 있어 네가 ”
태연을 가장한 내 목소리가 땅에 닿기도 전에 성일이 비웃음을 날린다.
“흣, 그것도 말야, 미국 여자라면 게다가 프랑스인 아버지와 미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레이디. 머리는 황금색, 피부는 백색, 눈은 파랗지.”
“내가 지금 너 헛소리 듣고 앉았을 기분이 아냐.”
나는 잔을 내리고 일어섰다.
“학교 때 만났어. 어머니가 대권 승계를 위해 한국에 먼저 나가 눈치를 보던 동안 같이 살기도 했고. 날마다 전화통으로 울고불고하더니 결국 한국 지사로 자원해서 온 건 1년 전.”
“너!”
충고는 됐고, 성일이 손을 휘휘 저었다.
“오라 한 적 없어. 애를 만든 것도 아니고. 사랑 나는 그딴 거 필요 없어. 걔가 혀 깨물고 죽는다 그래도 언제든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 있거든 그런데, 본부장님 진짜 재수 없으십니다. 비겁하게 순애보를 각색해 개가 웃을 노릇이지. 현건일같이 재수 없는 인간이 죽고 못 사는 사랑이라니.”
“무슨 소리야 ”
성일이 안경테를 올리고는 똑바로 쳐다보았다. 유리알 너머 눈동자는 불쾌감과 분노로 번들거렸다.
“걱정 마. 치사하게 이용할 생각은 없어. 회장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능구렁이가 그걸 모르겠어. 알고도 시켰지. 게이보단 낫거든.”
“헛소리 지껄이지 마. 한마디만 더하면 죽을 줄 알아.”
“헛소리, 일까 ”
성일이 탁, 술잔을 놓고 일어섰다.
“페어플레이 한다는 의미로 알려 준거야. 다른 뜻은 없어. 가보시죠, 아까부터 시계만 보던데. 혹시, 정말 사랑에라도 빠졌어 상관없지만, 솔직히…… 형수는 가증인지 가여운 건지 매번 판단을 보류하게 해.”
당신 집안 누군가라도 알게 되면, 나는, 난…….
번호키를 누르고, 문을 열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서 나는 조금 비틀거렸다.
정시은. 정시은. 시은아. 시은아.
휘청 벽을 짚고 서서 고개를 들어보니 시은이 서재방문을 열고 나와 섰다.
“거기 있었어 ”
“네.”
어느 날인가는 아무리 불러도 이 집엔 없겠지 하는 생각을 처음 한 건 아니었지만 오늘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던 적은 없었다. 술에 취해 들어와 아무리 불러도, 두통으로 머리를 짚으면서 소리를 질러도, 시은은 없을 테다. 나는 아마 비틀거리면서 침실부터 화장실 문까지 하나하나 열어젖혀 보겠지. 어느 구석쯤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는 잠이 들었을 거라 착각하면서. 어느 날은 번호키를 누르면서 혹시나 혹시나 하면서 기대하겠지, 오셨어요 하면서 시은이 현관 앞으로 나오지 않을까.
“서재 소파에서 잠들었어요.”
시은이 눈을 비빈다. 손을 잡아떼어내고 얼굴을 살펴본다. 뺨은 푸석푸석하고 눈 밑은 발갛다. 양손으로 뺨을 잡고는 고개를 숙여 이마에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정시은.”
“네 ”
“정시은, 정시은, 시은이. 내 와이프.”
“왜 그래요 술 많이 마셨어요 혹시, 도련님이랑 무슨 일 있어요 무슨, 말이라도 ”
아니, 아니 손을 휘저으면서 걸어갔다.
“무슨 말 하지 않아요 ”
“왜.”
“저번 제사 때 좀……, 아니에요. 제가 과민한 거예요.”
시은이 외투를 받아 옷장에 걸면서 조그맣게 말한다.
“미안해요, 아까. 그렇게 말해서 미안해요. 이제 그러는 일 없을 거예요. 지겨워할 틈도 없어야 하는데.”
시은이 주저주저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이었어요…….”
열병을 앓았던 사람처럼 시은의 입술이 하얗게 일어나 있다. 와락 끌어안고는 까슬한 입술을 물고 핥았다. 시은은 눈을 질끈 감고 있다. 지금은, 하며 고개를 젓는 걸 보면서 나도 고개를 저었다.
“싫어, 싫다고 하지 마.”
털썩 침대에 같이 넘어지면서 원피스 자락을 끌어올렸다. 새벽안개에 젖은 듯한 눈으로 천정만 바라보면서 시은은 말없이 무릎을 벌렸다. 아무리 애를 써도 따뜻해지지 않는 몸을 깊이 파고들었다. 시은이 소리를 깨문다. 멈추고 쳐다보자니 손을 들어 습관적으로 내 눈가를 더듬는다. 어느 밤에 나누었던 대화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너는 꼭 눈을 만지더라.”
“눈이 예뻐요.”
“그런 소리 처음 들어.”
“남들은 모를 거예요. 나만 아는 것 하나쯤은 있으면 좋잖아요.”
나는 하나쯤으로 만족할 수가 없다. 꼭 끌어안고서 더 깊이 가능하다면 심장까지, 몸을 묻는다.
“아이를…… 가지자.”
모로 세운 몸 두 개가 숟가락처럼 포개어진 상태로, 다섯 손가락이 꼭 맞물리게 깍지를 끼고서는 말했다.
“아들이면 좋겠어. 나처럼.”
시은이 고개를 돌리려는 걸 정수리에 입을 맞추면서 지그시 눌렀다.
“……아들 낳고 혼인신고도 하고, 호적에도 올리고.”
맞닿은 내 가슴이 울릴 정도로 시은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우리 그냥 이대로 살자.”
시은이 깍지 낀 손을 비틀어댔다.
“……놔요.”
“시은아.”
“놔 줘요…….”
결코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손아귀에 힘을 더하면서 나는 어깨에 코를 박았다.
“그냥, 이대로 살자. 이대로 살자……. 나랑 너 이렇게 이대로…… 살자. 뭐 별거 있다고.”
“이러지 말아요.”
더 세게 꽉 끌어안자 시은이 파드득 몸을 떤다. 가슴이 뻐근하다. 이렇게나 날 벗어나고 싶을까.
“이러지 마, ……다 해줄게. 돈이고 뭐고 달라는 거 다 줄게.”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왜 이래요, 당신 눈엔 내가 정말 뭘로 보여.”
“몰라, 몰라. 뭔지 몰라! 시팔……! 내가 너 달라는 대로 다 주고 해달라는 거 다 해준다고!”
시은이 제발, 그만해요. 제발……, 울음을 터뜨렸다.
*
이 여사가 바닥을 뒹굴고 닿는 대로 발길질을 해대고 물건을 부수었다. 순식간에 달려들어 뺨을 갈기고 시은의 머리채를 잡았다.
거기까지는 나의 추측이다.
내가 최 씨 아주머니 전화를 받고 미친 듯 차를 몰아 집에 도착했을 때는 헝겊인형처럼, 이 여사에게 머리채를 잡혀 이리저리 흔들리던 시은만 보였다.
뻔뻔한 년, 쌍 거지 같은 년, 암캐 같은 년, 네가 돈 받고 그 짓하는 창녀나 다를 게 뭐 있어!
기억나지 않는다.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여사가 바닥에 나둥그러져 있었다. 이러지 말아요, 말하는 시은을 꽉 끌어안고 나는 열병에나 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이 여사가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내 등과 머리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고 품속에 감춘 시은을 향해 손톱을 세웠다.
그만해요, 그만하라고!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 여사가 손을 뻗을 때마다 아악, 움츠러드는 시은을 안고서 그저 부들부들 떨면서 얘가 작아서 그래서 내가 이나마 가려줄 수 있어 다행이다라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나 했다. 제풀에 지친 이 여사가 바닥을 두드리며 울기 시작했다. 악에 받친 비명이 뒤섞인 울음은 고막을 찢을 기세다.
거지 같은 신파다. 내 인생이 이따위 신파라니. 어디서부터 비틀리고 꼬여버렸는지 알 수가 없다. 출생 전부터 꼬인 걸 어떡하란 말이냐,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별달리 불만 삼지도 않았다. 기왕 이렇게 태어났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살아보면 되는 것이라 믿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의지를 세우면서 말이다.
절대적 반대라 생각하지만, 삶과 죽음은 실은 범람하는 강처럼 경계가 불분명하게 뒤섞이는 것이다. 숨 쉬고 살아간다는 건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니니까. 죽음이 가혹하다면, 삶이 친절할 이유도 없다고 믿었다. 살아가는 건 그런 거라 생각했다. 매일매일 불친절하고 무뚝뚝하고 무서운 상사를 향해 좋은 아침입니다, 인사를 하는. 제가 오늘은 업무처리를 이렇게 했습니다. 좀 어떻습니까. 어떻게, 제가 계속 빌붙어 이 직장을 다닐 수 있겠습니까. 아주 가끔씩 일그러지듯 웃는 상사의 얼굴을 보면 도파민이라도 투여받은 듯 팔짝거리고 다달이 돌아오는 월급봉투에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는.
*
“나는, 견딜 수가 없어요. 부끄러워요. 이제 그만해야 해요. 우리.”
어머니가 찾아오신 후, 일주일이 되는 날이다. 일주일 내내 입양 온 강아지처럼 시은의 눈치만 보았다. 허허거리면서 실없이 굴 수도 없고 냉정하게 아무것도 아니야 할 수도 없었다. 아니다. 냉정하게 아무것도 아니야, 라는 말을 했구나.
“혼인 신고 할 거야.”
시은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터진 입술이나 발갛게 부었던 볼은 가라앉았지만, 흔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별거 아냐. 아니라 그러면 돼. 계약서는 완전히 없앴어. 무슨 상관이야, 언제 만났든,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든, 이미 결혼했는데. 내일 아침에 혼인신고도 할 거야. 한다고 말했어.”
시은이 말간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본다.
“다시는 그러지 못해. 한 번만 더 그러면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져준다고 했어. 아버지처럼.”
“아버지처럼……. 그런 말을 했어요 어머니한테 ”
“응.”
시은은 말없이 침실 문을 열고 나갔다.
닫힌 드레스 룸은 몇 번이나 문이 부서지라 두드린 후에 열렸다.
“추워. 오늘은 침실에서 자.”
“이 방이 편해요.”
팔목을 잡아끌자 시은이 모질게 비틀어댄다. 덜렁 안고 일어서니 어깨를 마구 두드렸다.
“놔요. 놔!”
“싫어!”
“나를, 당신 맘대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말아요.”
우뚝 멈춰 서자 시은이 올려다본다. 바싹 마른 눈동자인데도 눈물이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다행이에요. 내려줘요.”
시은이 똑바로 서서 내 눈을 바라보았다.
“혼인신고 하면, 나는 무효 소송을 할 거예요. 나는 이제 그만해요. 아니, 우리는 이제 그만해야 해요. 사랑한다고 세상에 거짓말을 하면서, 결혼을 하고 돈을 주고 돈을 받았어요. 그런 사람들이 우리예요. 이제와 사랑이라 해도, 돈 받고 돈 주고 몸을 섞다가 육정이 든 거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아요. 나부터도.”
“정시은, 너!”
“틀린 말, 없어요. 나에게도 인정하기 힘든, 고통스런 현실이에요.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내내 영혼이…… 말라가는 듯했어요.”
시은은 양팔로 가슴을 끌어안은 채 목이 꺾인 봉오리처럼 고개를 숙였다. 뭐라 반박하기 전에 전화벨이 비명처럼 울렸다. 고열증세로 할아버지가 응급실로 가셨다고 알리는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