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ion | Lonelyheart RAW novel - Chapter 26
26화.
26화. 시은 이야기 2
5
그가 잠들어있다. 침대 옆에 서서 잠든 모습을 찬찬히 바라본다. 어떤 이가 보고 싶어 마음이라는 것이 으스러질 수 있구나, 깨닫게 해준 사람이다. 그를 향해 세차게 뻗어가는 그리움을 힘을 다해 우그러뜨릴 때마다 시뻘건 쇳물을 삼키는 것만 같았다. 잠을 자고 있어 다행이다. 나는 끈질긴 시선으로 그를 마음껏 어루만진다. 그가 잠이든 모습을 볼 때마다 은밀한 기쁨에 낯이 붉어지곤 했다. 아이처럼 벌어진 입술과 편안하고 고른 숨소리를 대하면 숨겨둔 욕망이 몇 겹 포장을 순식간에 찢고 튀어 올랐다.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그의 폐를 돌아 나온 달짝지근한 숨을 삼키고 싶었고 수컷의 오만함과 고집스러움이 드러나는 이마에 내 것을 맞대고 싶었다.
난로처럼 발갛게 달아오르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지 그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그 눈을 떠서 나를 보게 하고 싶은 충동과 그대로 두고 싶은 욕심이 다투고 있다. 나는 잠시 더 그를 지켜보기로 한다. 기다란 눈매는 감겨있을 때 느슨한 아치모양이 된다. 첫날, 남들은 발견하지 못하는 유쾌함과 다정함을 발견했듯 나는 감은 눈에서 현건일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섬세함을 찾아낸다. 고르고 긴 속눈썹은 착하게 아래로 뻗었고 완만한 곡선은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만 같다. 나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다. 나를 정말 보고 싶어 했나요 묻고 싶어서 ‘보고 싶어’ 그 말이 다시 듣고파서 발끝까지 찌르르 아파온다. 그가 들어왔을 때처럼.
정신이 나갔었어.
그렇게 말하던 그와는 다르게, 나는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한다. 속눈썹 위를 구르던 땀방울까지. 마지막 순간 내지르던 신음과 반듯한 미간에 깊게 패던 주름까지. 내 몸에 닿는 피부는 매끄럽고 찰지며 내 손에 잡히는 근육은 강하고 단단했다. 그의 손이 맨 살갗을 스치면 심장 밑바닥까지 간지러워서 몸을 움츠렸다. 나를 모조리 씹어 삼키려는 듯할 때면 통각 끝에 뒤섞이는 생경한 감각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분명 육체는 겨우 견디고 있는 정도였지만, 영혼만은 환희에 차서 떨고 있었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자괴가 가슴을 쳤지만 나는 몸이 호소하는 통각이나 처녀가 가지는 당연한 수치심과 더불어 자괴감 따위는 당돌 맞게 외면해버렸다. 현건일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내 눈앞에서, 내 몸을 안으면서.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열기가 그의 호흡기와 숨구멍 하나하나에서 뿜어져 나왔다.
현건일은 신기루처럼 손을 뻗으면 저만큼 달아나있고 죽을힘을 다해 뛰어 다시 손을 뻗으면 그 거리만큼 물러서 있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빨리 깨우친 아이였다. 살아오면서 현건일만큼 그 깨달음이 도움이 되는 사람은 없었다.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가서 결코 잡을 수는 없을 만한 거리를 유지하고 서있으면 그는 선들거리는 농담을 건네기도 하고 기분 좋은 매너로 나를 들뜨게 만들곤 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현건일은 그 웃음에 눈이 팔려 한 걸음 더 들어가는 순간 무섭게 내칠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자신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기에 나의 괴로움을 짐작할 수가 없다. 겉옷을 받아 걸거나 물컵을 건네는 사소한 일을 하면서 그와 신체의 일부가 아슬아슬하게 비켜나가는 순간 늘 온몸이 더듬이가 된 것처럼 바짝 긴장했다.
육체만이라도 좋아. 아니 뭐든 상관없어. 그의 머리털 하나라도 가지고 싶었잖아.
내가 다림질한 와이셔츠만이 닿을 수 있었던 그를 만지면서 나는 흔들리는 오월의 잎사귀를 보았다. 대동세건 열혈서사, 바람에 다시 떨어지지 않도록 탄탄하게 현수막을 달아매는 그가 보였다. 캔디는 얼굴을 온통 더럽히며 울던 자신에게 고작 ‘꼬마 아가씨, 웃는 얼굴이 더 예뻐.’라고 말하는 곱상한 소년을 언덕 위의 왕자님으로 삼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를 나의 왕자로 삼았다. 캔디는 왕자를 닮은 안소니를 사랑하고 안소니를 닮은 테리우스와 또 사랑에 빠지지만 나는 그와 그림자만이라도 비슷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찾았다고 한들, 나는 그 사람을 왕자 대신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코.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지지부진 헤매던 현수막을 가뿐하게 처리하듯 그는 나의 지지부진한 인생도 가뿐하게 처리했다. 현건일은 나에게 십 년 가까이 품어 온 지겨운 꿈과 지긋지긋한 희망과 잡히지 않는 오아시스와 그리고 잠재울 수 없는 욕망의 덩어리다. 깊어지는 손길에 아파, 아파. 비명을 삼키고 또 삼켰다. 그가 이성을 되찾는 순간, 이 열기는 순식간에 달아나버릴 테니까. 그가 양 무릎을 세우게 하면서 눈을 맞췄다. 손을 뻗어 기다란 눈을 만지고 더블로 줄게라고 말하던 매정한 입술을 만졌다.
나쁜 사람.
입술 한 끝으로만 그가 웃었다.
싫어하는 거 알아. 나는 상관없거든
손가락을 입 안으로 깊이 빨아들이면서 그가 들어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 나 좀…….
그가 숨을 몰아쉬면서 가슴과 가슴이 밀착되도록 꽉 끌어안았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의 팔을 움켜잡고 어깨를 깨물면서 나는 오월의 햇살 아래 나의 왕자님을 떠올렸다.
6
그는 뜨겁고 또 따스하다. 지구를 쪼개어 내부로 들어가듯, 단단한 그의 가슴을 열고 또 열어 들어간다면, 그의 심장은 지구의 핵처럼 뜨겁게 타오르고 있을 것이다.
K그룹이 야심 차게 세상에 내놓은 아트센터 중간 어디쯤에서, 느닷없이 붙들고 입을 맞추던 그가 묻는다.
“이러는 거 싫지 ”
“왜 그렇게 생각해요 ”
“싫어하잖아.”
남성적 욕망으로 가득 찬 눈동자를 보면서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다행이고.”
무언가에 거슬렸는지 반쯤만 웃고는 그가 한 걸음 떨어졌다. 언제 부둥켜안았냐는 듯이 그의 얼굴은 정돈되어있다. 몇 걸음 걷다가 우두커니 서있는 나를 돌아다보았다. 오라 고갯짓을 한다. 움직이지 않자 어깨를 으쓱하더니 옆으로 다시 걸어온다.
“왜 그래. 모시러 와야 해 ”
조용히 그를 따랐다. 옆도 뒤도 아닌 어정쩡한 방향으로 붙어 서서 언제나처럼 어눌하게 움직인다. 아내도 연인도 아닌 위치를 꾹꾹 밟아가면서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심장 뒤편에서 탁 탁, 불씨가 터지듯 따끔거린다. 밤바람이 술기운으로 열이 오른 종아리를 훑으며 지나간다. 심통 부리는 건 익숙하지만, 이번에는 무엇이 잘못일까 도무지 모르겠다. 원하는 대로 해주고, 사람들이 볼까 불안하여 심장이 저릴 지경이었지만 꾹 참고 얌전히 있었는데 말이다.
조수석 문을 열고 선 그가 밉다. 꽉 다문 입술이 방금 내게 숨을 나누어 주던 그 입술일까. 혼자 식어버리는 건 반칙이야. 영원한 마음 같은 건, 바라지 않아. 그저 순간순간 만은 길었으면 좋겠어. 순간만은 내 걸로 할 테니까.
바람이 더운 볼을 간질이듯 스치고 지났다. 자동으로 켜진 차 내부 등 불빛을 받은 그의 얼굴은 섬세한 붓으로 그려놓은 유화처럼 부드럽다. 거만하게 치켜세운 눈썹도 매정한 입술도 딱딱한 이마도 굳은 턱조차. 순간을 연장시키기 위해선 나는 얼마든지 앙큼해질 수도 발칙해질 수도 있다.
“싫어하지…… 않아요.”
“응 ”
딸기 주스가 아니라 칵테일이라 그랬었지. 달콤한 맛에 숨어있던 알코올이 날뛰고 있는가 보다. 심장이 빨갛게 타오르는 것만 같다. 팔을 들어 그의 목을 감았다. 커지는 눈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당신이 얼마나 잘하는데.”
“뭐 ”
“키스, 말이에요.”
나는 그를 끌어안고 가슴이 으깨지도록 몸을 꼭 붙인다. 아주 잠시 그의 심장박동이 격렬하게 움직임을 느꼈다고 생각했다. 그가 내 양어깨를 붙잡고는 머리가 흔들릴 정도로 함부로 떼어냈다. 그리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열린 문 속으로 나를 집어넣어버렸다.
집으로 가는 내내, 신호에 걸려 멈춰 섰을 때도 그는 정면만 응시했다. 나도 가만히 옆 창문만 바라보았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주황색 가로등과 물결무늬로 번지는 잔상이 번갈아 보였다. 깜박깜박, 다른 건 되도록 보지 않고 느끼지도 않고 오로지 불빛만 찾아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 신호등에서였다. 퍽, 하는 소리에 놀라 고갤 돌려보니 그가 운전대를 한 번 더 내리쳤다.
“젠장할, 신호가 왜 이렇게 길어.”
결국 신호를 무시하고 내달렸다. 주차장에 아무렇게나 차를 대고는 그가 팔을 끌었다. 남자의 큰 보폭을 좇아 잰걸음을 걷자, 까진 발뒤꿈치가 욱신거렸다. 높고 아름다운 힐은 동하 씨가 오늘 선물로 준 것이다.
신발은 사주는 거 아니라며. 그에게 말하고, 나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춰서 도망가지 말아요. 시은 씨. 하고 말했다.
현관문을 열면서 그가 하아, 숨을 내쉬었다. 먼저 한 걸음 들어서는데 철컹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기도 전에 허리가 휙 뒤로 끌려간다. 상체를 펴는 순간 목덜미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저절로 신음소리가 나올 만큼 거칠게 군다. 볼레로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한 팔로는 버둥거리는 몸을 꼭 붙잡고는 다른 손으로는 어마어마한 가격의 드레스를 찢을 기세다. 얼굴이 보고 싶어. 어떤 표정인 걸까. 고개를 돌리자 그가 허리를 끌어안은 팔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그저 흥분한 것 같기도 한 남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어떤 경우든 나쁘지 않았다. 가슴이 쿵쿵 뛰어 턱 아래까지 아파왔지만 난 태연하게 말했다.
“잠시만요, 신발 벗고요.”
스트랩을 풀고 황금빛 힐을 느릿느릿 벗었다. 8센티미터의 굽이 사라지자 그와 키 차이가 새삼스럽다. 한 뼘도 더 높은 그를 올려다보면서 발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여전히 뻣뻣하게 서있는 그를 향해 손을 뻗어 한 팔로 목을 감싸고 입술을 대었다가 뗐다.
“좀 낮춰줘요.”
그는 여전히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화난 거구나. 슬며시 팔을 풀려는데 그대로 몸이 번쩍 들렸다. 발이 허공에서 흔들거려 반사적으로 목을 꽉 끌어안았다. 무거운 기색도 없이 그가 성큼성큼 걸어 내 등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가슴끼리 완전히 밀착시키고 눈높이를 맞추고는 그가 말했다.
“까부는 건 술 때문이야 ”
“아니요, 그 정도로 마시진 않았어요.”
빠져나가려 꼼지락거리자 한 팔로는 허리를 다른 팔로는 엉덩이를 받쳐 들고 움쩍도 못하게 한다.
“그럼, 원래도 이렇게 깜찍한 녀석이었어 ”
“아마도.”
아마도라, 그가 피싯 웃는다.
“……취했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처럼 기억을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분명 약간의 알코올은 내 피를 뜨겁고 진하게 만들었으니. 마치 결코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용감한 전사의 것처럼 말이다.
“취해서 봐주는 거야. 까불지 마.”
나는 또 끄덕끄덕했다. 현건일이 내 눈을 빤히 쳐다본다. 아직 완전히 화를 풀지 않은 기다란 눈매가 깊고 짙다.
“좀 귀여워해준다고 머리 위에 올라서지 마.”
끄덕이자 입을 맞춘다.
“누구에게든, 회장에게도 쥐락펴락 놀림당하는 건 못 참아.”
“그러지 않았어요.”
“그랬어.”
단정 짓는 말투에 끄덕해주면 다시 입을 맞추고, 바로 세워주고는 목덜미에도 어깨에도. 움칫거리자 꽉 잡고는, 드레스 지퍼를 내린다. 침실이 아닌 곳에서는 첫 날 이후 한 번도 없었다.
“여기에선…….”
손을 들어 가리자 단번에 잡아떼어버린다.
“집 안인데 뭘.”
가만히 팔을 늘어뜨리고 있자 가슴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느리게 느리게 움직이다가 갑자기 딱 멈추고는 팔뚝을 잡아 올렸다. 내 팔에는 소름이 오소소 돋아있었다.
“뭐야 추워 ”
“조금.”
“말하지 그랬어!”
양팔을 쓱쓱 손바닥으로 쓸어주더니 말릴 틈도 없이 양복재킷으로 나를 둘둘 말고는 방으로 끌고 간다.
밤에는 확실히 많이 서늘해졌어. 자책하듯이 중얼거리면서 어깨를 꼭 감싼다. 바보 같아, 꼭 추워서만 소름이 돋니. 당신이 닿으면 양복으로 둘둘 말고 있는 지금도 난 머리 피부까지 소름이 돋아. 멈춰 서자 응 하듯 쳐다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가슴은 따뜻하고 또 뜨겁다.
그가 따뜻한 사람이에요 한다면,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웃을 테다. 품에 몇 번 안기더니 머리가 어떻게 되었냐고. 뻔뻔하게 계약으로 결혼하고 두 계절이 지나도록 널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그 남자가, 더블로 줄 테니 섹스도 하자던 남자가 따뜻해 철저하게 사육된 후계자, 현건일은 독을 품은 사자새끼라는 말 못 들었니, 아비도 물어 죽일 수 있는 새끼 사자. 나는 아니야 아니야 속으로 몇 번이고 부정한다. K그룹 현 이사가 오만하고 제멋대로고 냉정하고 독한 까닭은, 불덩이를 싸매어 두어야 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난 뭐든 내 마음대로 해석한다. 현건일에 대해서는 그러기로 했다.
돌이켜보면, 현건일이 살아 숨 쉬는 주체적인 사람이라는 점에 대해선 티끌만 한 의심의 여지없이 믿었지만 그의 이미지만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완벽하게 나의 것이었다. 스무 살의 봄날 이후부터. 그렇다고 해서 매일같이 한 남자를 두고서 공상을 하진 않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미지가 흐려질 만하면 그의 모습은 불쑥불쑥 뉴스 한 귀퉁이에 사진으로 나타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진만이 아니었다. 그는 비서실 업무를 하는 동안, 매우 자주 등장하였으니까.
비서실 업무는 매일 아침 경제 신문을 포함한 조간 여섯 개의 기사를 훑어서 보고할 사항을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회장님이 참석하시는 크고 작은 모임에 참석자를 파악하는 일 역시 내가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것 중 하나였다. 우리 회사 측에서 행사를 주관할 경우에는 참석자 사이에 미묘한 관계들까지 모조리 고려하여 자리 배치를 해야만 했다. 비서실에서 재빠르고 영리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던 나는 회장님과 한 번이라도 교류가 있는 사람들의 관계나 역학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도 욀 수 있었다.
K그룹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매번, 현건일이 등장했다. 쓰윽 램프를 닦기만 하면 펑하고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요정 지니처럼 말이다. 아주 가끔 말을 걸어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저 내 책상 옆에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나는 매번 그를 무시하면서 전화 통화를 하고 컴퓨터로 문서작성을 하면서 딴 짓을 했다. 그러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면 벌떡 일어서 탕비실로 들어가곤 했다. 더운물에 티백 녹차를 우려내는 동안에도 뒤통수에 붙어 사라지지 않는 그를 보지 않고 말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나 되게 야단맞았어요. 출장 스케줄 때문에요. 좀 급하게 잡혔거든요. 회장님이 공항에서 두 시간 넘게 계셔야 하는데 VIP실을 못 잡았어요. 국빈급 인사가 스케줄을 갑자기 변경을 하는 바람에 도저히 안 되겠다 그러더라고요.
어느 날은 돌아보는 순간, 감쪽같이 없어지기도 했지만 때로는 비딱하게 쳐다보면서 대꾸해주기도 했다.
뭐야, 네가 잘못했네, 그런 거 하나 못 챙기고. 그런데, 비서실엔 너밖에 없어 왜 이렇게 부려먹냐, 조그만 애를.
다음 순간은 정말 펑하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매번 내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으니까. 정말 미친 거니. 왜 이렇게 질기니.
진심으로 그의 결혼 소식을 기다리는 날도 있었다. 이러는 내가 너무 지겨워서. 설마 유부남을 두고 그런 상상을 하지 않겠지 싶어서.
눈을 뜬다. 나를 안고 있는 남자, 반듯하게 정리된 이목구비 중 유일하게 다정한 눈언저리를 마음껏 볼 수 있는 시간이다. 남들은 매의 눈이라 하는, 하지만 나만이 알 수 있는 다정함이 깃든 눈시울이 너무 좋아서 매만져본다.
“너는 꼭 눈을 만지더라.”
“눈이, 예뻐요. 알고 있었어요 ”
“난생처음 듣는 소리야.”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하고선 내 손을 걷어낸다. 그의 눈길은 내 어깨에 닿아있다. 싫은데,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어깨를 빤히 보는 건 싫은데. 나는 상체를 조금 세워 입술을 맞댄다. 짧게 입술로만 키스해주고 그는 다시 어깨를 살핀다. 싫어, 칭얼거리듯이 말하면서 그의 아랫입술을 꼭 물어버렸다. 그도 내 윗입술을 깨물었다. 아파! 나도 아프거든 그가 나를 꽉 끌어안은 채로 빙글 몸을 돌렸다.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가 뜨니 그에게 걸터앉아있다. 그동안 입술은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나의 혀를 놓아줄 때면 내가 그의 것을 깊이 빨아들이고 있었고 그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겨우 떨어졌을 때, 둘 다 숨을 헐떡였다. 그가 가쁜 숨을 뿜어내는 입을 어깨에 대고는 물었다.
“어느 놈이 이 어깨가 밉다고 그랬어 ”
나는 조금 소리 내어 웃었다. 놈이 아닌데, 목소리가 웃음에 묻힌다.
“그럼 누구야.”
“엄마.”
“왜 ”
“밉다 그런 건 아니고.”
“그럼 ”
그가 손끝으로 어깨를 쓸어내릴 때마다 발가락까지 간질댔다.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잔뜩 움츠리면서도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피하지는 않는다.
“열여섯 살 때, 그해 여름은 유달리 더웠어요. 엄마가 장을 봐오면서 어깨에 끈만 달린 원피스 하나를 사셨더라고요. 입어봐라 그래서 입었는데, 가만히 보시더니 왜 이렇게 말랐니, 불거진 어깨뼈가 꼭 나뭇가지 같다고. 여자는 어깨에 살이 포실하게 올라야 사랑스러워 보이는데. 그러셨어요.”
그날은 열대야가 사흘째 지속되던 날이었다. 온실같이 후덥지근한 방안 공기나 땀이 남아 끈적거리던 피부, 선풍기 바람 때문에 민망하게도 허벅지 사이로 자꾸만 붙어대던 얇은 면 원피스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평소와 다름없이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관찰하는 엄마의 눈빛이나 감정 없이 평가를 내리던 목소리도.
“그런데 ”
“다음 날 학교에 다녀와 보니 그 원피스는 없어지고 대신 어깨를 가리는 캡 소매가 붙은 원피스가 옷장에 걸려있었어요. 아주 짙은 원색의 초록 땡땡이가 있었죠. 엄마가 절대 선택하지 않을 촌스런 색깔.”
“그래서 ”
“할 수 없이 한동안 매해 여름, 무척 더운 날이면 땡땡이 원피스를 입었어요. 내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시원한 감이었거든요. 입을 때마다 엄마가 바꿔버린 멜란지 그린 원피스를 생각했어요. 오죽했으면 이걸로 바꿔왔을까 하고.”
이야기를 마치면서 나는 깔깔대며 웃었지만 현건일은 눈썹을 찡그렸다.
“멜란지 그린 ”
“네.”
“어떤 색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암튼 멜란지 그린, 끈 달린 걸로 100개 사줄게.”
너무 진지한 제안에 다시 웃음이 터졌다.
“싫다니까요.”
현건일이 나를 침대로 넘어뜨리고는 웃음으로 들썩대는 내 어깨에 입을 맞춘다. 어깨 예쁘거든 난 여자 어깨 포실한 거 싫어. 정말요 응. 망설임 없는 대답에 가슴이 저릿할 만큼 좋다. 다시 확인하고 싶어서 또 묻는다. 정말 예뻐요 그래.
“나, 예뻐요 ”
“그렇다니까.”
그의 움직임이 점점 급해진다. 조금만 더 어깨에 입을 맞춰주면 좋을 텐데.
“어깨 말고도 ”
그를 피해 고개를 비틀고 깔린 몸을 빼어내면서 묻자 금세 표정이 딱딱해진다.
“그럼, 내가 왜 너랑 자겠어.”
행위의 결론에서 저지당한 불만이 고스란히 맨몸으로 떨어진다. 어깨가 서늘하다. 그가 자리 잡기 편하도록 난 조용히 움직이면서 그를 끌어안는다.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러면, 100개 말고 한두 개쯤 사줘요. 오늘처럼 비싸고 예쁜 걸로.”
“알았어.”
그가 건성으로 답하면서 내 속을 찾아 들어온다. 뜨뜻한 통증이 느껴진다.
상관없어, 오늘도 뱃속에서 고개를 쳐드는 자존심을 설득한다. 상관없을래. 어차피 1년이잖아. 1년쯤은 신데렐라로 살아도 되잖아. 이 가을과 겨울이 지나면 그만이야. 현건일, 두 계절만 나의 왕자가 되어줘. 자존심이나 논리성 따위는 집어던진 착하고 순한 신데렐라로 살게.
7
모질고 독한 년. 음침한 년.
조용히 곱씹어본다.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건일을 잊지도 포기하지도 못하고 기어이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은 내 마음이 너무 모질고 독하고, 그리고 음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죽이나 끈질겼으면, 저 멀리 하늘에 있는 신이 성가시고 귀찮아서 나를 현건일 아내로 만들어 줬을까. 비록 1년짜리 이긴 하지만.
만 가지 근심과 만 가지 고통의 근원은 욕심이라고 한다. 나는 나의 욕심의 끝을 알 수가 없다. 늘 이러면 안 돼, 주의를 주고 있지만 해거름에 저녁 준비를 하다가 후우 나오는 한숨 한 번에도 욕심은 소낙비를 담은 검은 구름처럼 무섭게 부풀어 오른다. 나의 욕심이 커질수록 나의 상처 또한 치명적으로 깊어지고 있다. 주서기에 과일을 집어넣다가도, 다림질을 하다가도 넋을 놓는 일이 잦아진다. 창밖으로 겨울바람 소리가 매섭다. 말라버린 나뭇잎을 매달고 서있는 나무를 바라다본다. 희고 건조한 몸에서 뻗어 나온 삐죽한 나뭇가지가 가슴을 뚫고 지나간다. 나는 눈이 시려 더 이상 나무를 볼 수가 없다.
며칠 전 점심을 같이했던 친구 P가 안색을 살피면서 물었다.
왜 이렇게 말랐니
나는 스카프를 매만지면서 조용히 웃었다.
돈 많겠다, 남편 끝내주겠다, 황금마차 탄 신데렐라가 왜 그래
글쎄, 유리구두가 없어서
어머, 신고 있는 그 구두 유리구두 아니었니 번쩍번쩍 눈이 부신데
난 깔깔 소리 내어 웃으면서 테이블 아래로 발을 내려다보았다.
아냐, 유리구두. 이건 남편 친구가 사준 거. 내 왕자는 멍청해서 내가 흘린 유리구두 같은 건 평생가도 못 찾아.
웩, 못 들어주겠네, 사모님. 그래서 유리구두 없어서 마구 슬퍼하는 중이야
아냐, 12시까지 드레스 입고 왕자랑 왈츠만 추어도 충분해.
P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 지금 왈츠 중이야 결혼해서 성에 들어간 거 아냐
뭐든.
다림질을 마친 현건일의 와이셔츠를 들어본다. 양 소매 끝을 하나씩 나눠 잡고 팔을 크게 벌려본다. 기장도 품도 이렇게나 큰 남자였나 싶도록 크다. 팔을 벌린 채로 하나 둘 셋, 왈츠 스텝을 밟았다. 와이셔츠가 흔들거린다.
나 당신 미워하나 봐요.
아니, 왜
현건일이 묻는다.
당신은 너무 멍청해.
내가
게다가 불뚝성도 있지.
그렇긴 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한 바퀴 빙그르르 돈다.
당신 가족들도 모두 다 부담스럽고 싫어. 당신만 아니라면 아는 척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야. 불쌍하지만, 불쌍해하지 않을 거야. 내가 더 불쌍해.
현건일이 멈춰 선다.
좋아, 그럼 이 정도로 그만둬.
하나, 둘. 왈츠 스텝을 밟다 말고 멈춰 선다. 나는 그를 양팔로 껴안고 가슴에 코를 묻는다.
난, 나는, 나는 왜 이 정도쯤에서 멈출 수 없는 걸까. 멈춰야 했던 순간들마다 난 하나만 더,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리는 편을 택하였다.
당신을 우연히 다시 보게 되었던 날……. 일자리를 주고, 심부름을 시키고, 그것만으로도 좋았어. 내가 지은 밥을 먹고, 내가 다림질한 옷을 입고, 내가 닦은 구두를 신고 현관을 나서는 당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믿어지지가 않을 만큼 좋았어. 지금은 다정하게 굴기도, 뜨겁게 안아주기도 하는데. 나는, 괴로워. 꿈처럼 좋을 줄만 알았는데, 나는 매일매일 조금씩 더 불안해지고 불만투성이에, 슬프고 아프기만 해.
어느샌가 눈물이 흘러 와이셔츠에 얼룩을 만들었다. 잔뜩 주름이 간 와이셔츠를 들고서 다시 세탁해야겠어, 중얼거리면서 코를 훌쩍였다.
초콜릿 박스가 줄어들고 있는데,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8
“세상에나, 어쩜 이렇게 예쁘게 자랐대 온통 꽃밭이네. 이 꽃 이름이 뭐라 그랬지 ”
“아마릴리스예요.”
“아마……, 뭐 ”
난 습관처럼 입을 가리고 웃었다. 벌써 다섯 번은 일러 준 이름이지만, 오늘도 첫 두 글자 외엔 기억에 남지 않은 모양이다. 큰길 가 슈퍼마켓을 하는 진희 어머니는 허리를 구부려 막 봉오리를 터뜨린 아마릴리스 앞에 눈을 대고 있다.
그를 떠나 이곳 보은으로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텃밭과 마당에 화초를 가꾸기 시작한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방배동 빌라에서는 처참하게 말라죽어가던 꽃들이 하루가 다르게 싱싱하게 자랐다. 생각해보면, 방배동에서도 처음부터 화초가 죽어나가지는 않았다. 그가 나에게 정을 주기 전까지, 내가 그에게 욕심을 품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내 두려웠다. 타들어가는 사막 가운데 서있는 것처럼 막막하고 아프고 불안하였다. 우리 둘에게 남은 가장 멋진 시나리오는 나와 현건일이, 현건일의 부모님들처럼 되는 것이 아닐까, 감당하기 버겁도록 닥치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결국엔 내 영혼을 모조리 먹어 치워버리지 않을까, 그에 대한 사랑이 애증이나 집착으로 귀결되어버리지 않을까. 매 순간 불안하게 흔들거리면서 아슬아슬 외나무다리를 밟아나가는 기분이었다.
“암튼 이 꽃, 엄청 좋아하나봐. 한가득이네.”
진희 어머니가 아마릴리스에게서 눈을 여전히 떼지 않고 말하였다. 여기 이거, 겹으로 핀 거 이게 젤로 예쁘다. 그치
“네, 저도 그 꽃이 제일 좋네요.”
하얀 겹꽃 아마릴리스가 봉오리째 말라버렸던 아침을 기억하고 있다. 절박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 무렵 나는 길가의 나무나 돌덩이에게도, 그리고 풀포기나 꽃송이에게도 내 소망을 빌고 있었다. 아마릴리스에게 빌었던 것은 그와 하는 이 결혼생활을, 어떻게 되든 지속하게만 해달라는 어리석은 바람이었다. 12시가 되지 않게 해주세요, 기도하는 신데렐라보다 더 어리석은 소망을 매일 주문처럼 외다가 제풀에 지쳐버리곤 하였지만 아마릴리스가 말라버린 날 아침에는 어리석은 기도마저 더 이상 내게는 허용되지 않는 일임을 뺨을 후려 맞듯 번득 깨우치게 되었다.
“아참, 꽃만 보다가 그냥 갈 뻔했네. 이거 다시 해왔어 한번 봐바.”
진희 어머니가 부스럭거리면서 비닐봉투를 벌렸다.
“아, 소매단 무늬는 해결되셨죠 ”
나는 뜨개바늘 때문에 생긴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을 문지르면서 물었다.
“응, 가르쳐준 대로 했어. 에고, 나도 꽤나 뜨개질한다고 했는데 옷이 쪼그마하니 더 힘들어. 그래도 잘 살펴봐, 혹시 잘못이면 풀어서 고쳐볼 테니까.”
진희 어머니가 가져온 자그마한 풀빛 카디건을 들고 목선이나 소매, 중간중간 반을 갈라둔 오렌지 모양처럼 동그랗게 들어간 무늬까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송송 뚫린 구멍으로 햇살이 들어와 손에 어른어른 그림자를 만들었다.
“좋아요, 이제 마무리만 하시면 되겠어요. 솜씨가 좋으셔서 무늬가 예쁘게 나왔어요.”
아니여. 아주머니가 뿌듯한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로 손을 휘휘 저었다.
“선생님이 참말로 솜씨가 좋지. 뜨개질도 잘하고 바느질도 잘하고 꽃도 잘 가꾸고.”
동네에서 나에게 뜨개질감을 받아 부업으로 하는 아주머니 네 분 중 한 분이 슈퍼마켓을 하는 진희 어머니다. 패턴이나 몇몇 기법을 배워간다고 꼬박꼬박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는데 몇 번 만류하다가 이제는 그저 들어 넘기고 있다. 선생님이라 호칭하면서도 편하게 말을 놓으니 처음처럼 당황스럽고 어색한 기분도 아니다.
“다음번에는 해바라기 무늬를 넣을까 해요. 여름도 오고.”
“아, 맞다. 있지, 선생님 그거 알어 요 앞에 해바라기 밭 말이야.”
“네 ”
“그거 몽땅 팔렸다대 어제 경숙네 할아버지가 그러더라고. 서울서 누가 전부 사갔다나 봐. 주인이 안 판다 한 달을 그랬다는데, 시세보다 웃돈을 엄청 줬다나. 개발하려고 그러는 거 아닌가 몰라.”
작년 여름에 온 밭을 뒤덮었던 노란 꽃들은 바람이 불면 꼭 바다처럼 출렁거렸는데. 달랑 가방 하나 들고 도망쳐왔던 그 여름이 떠오른다. 두통약을 찾아주겠다 올라갔었지. 그는 작년 여름과는 다르게 두통을 호소하지도 전화를 걸지도 않는다. 핸드폰은 없애버렸지만, 집 번호는 알 수 있을 텐데.
“아무튼 까닥하면 올여름 해바라기 보는 게 마지막일지도 모르겠어. 이 옷 오늘 보내야 한다 그랬지 금방 마무리 지어서 다시 올게.”
진희 어머니가 가뿐한 발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
온라인 쇼핑몰을 하는 친구에게 오늘 오후에 부칠 목록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본다. 완성된 카디건 세 개, 컵 받침 스무 개와 화병 받침 열 개, 그리고 퀼트 손가방 두 개가 전부이던가.
방구석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시간이 두려워서 매달리듯 뜨개질을 시작하였다. 눈물이 흐를 틈이 없도록 눈동자를 혹사시키면서 콧수를 세고, 머리가 마비될 때까지 동일한 문양을 반복하였다. 아동용 카디건이나, 모자, 인형 옷에서 파우치까지 코바늘로 한 매듭 한 매듭 고를 만들어 하나씩 완성할 때마다 마음에 맺힌 고가 한 개씩 풀어지는 것만 같았다.
결혼 전 괜찮은 부수입이 되던 퀼트도 시작하였다. 감을 끊어다 패턴을 디자인하고 하나씩 조각들을 이어붙이면서 길어서 끝이 날 것 같지 않던 긴 밤을 하나씩 지나 보냈다. 무릎 덮개를 완성하던 날, 양 무릎을 안고 종아리까지 젖도록 울었다. 그를 떠나 처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쏟은 눈물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 아주 잠시 동안 살았을 뿐인데 기억은 조각이 되어 내 머리와 내 몸 곳곳에 박혀있었다. 천 조각을 이어 붙일 때마다 내 기억의 조각들도 새로운 모습으로 이어진 듯 이제는 모든 것이 불명확하다. 떠나야만했던 명확한 이유조차.
무엇이 그토록 두려웠던가. 무엇을 그토록 견디지 못했던 건가. 가지 말라 붙잡는 그를 결국 뿌리치게 만든 건 무엇이었나.
육체적 정신적 피로감이나 뭉개지는 자존심도 견디기 어렵지만 단지 그것만이라면 기꺼이 견딜 수도 있었다. 가장 두려웠던 일은 현건일을 증오하고 현건일을 사랑했던 나를 저주하게 되는 일이었다. 현건일이 왜 나를 선택하였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명한 답은 프로메테우스의 독수리처럼, 나의 간을 갉아먹고 뇌를 쪼았다. 로맨티시스트라서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할 수 없었던 현건일이 나를 선택한 이유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도저히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견디게 하고 싶지 않은 자리이기 때문이다. 스무 살에도 스물아홉 살에도 현건일은 정시은이라는 여자에 대해선 조금의 관심도 없었으니까. 지금은 다만, 잠시 옆에 있는 여자이니까 그의 말대로, 단지 나는 안심이 되고 편안한 대상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고…… 돈을 지불하는 여자니까.
매일매일 조금씩 영혼이 타들어갔다. 누구도 알아채진 못했지만, 난 나에게서 영혼이 떠난 흔적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몸속 어느 한군데가 움푹 비어버린 사람처럼, 길이가 맞지 않은 다리를 가진 사람처럼 사소한 움직임에도 균형을 맞추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는 온통 헝클어진 일상에서 내가 해야만 하는 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분류하려 집중하였다. 그것만이 내가 내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유일한 길처럼 느껴졌다.
놀랍군요, 결국 사랑보다 사람보다 자존심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요
동하 씨는 평소처럼 부드러운 어조로 비난하고 돌아섰다.
그렇지 않아요.
나는 동하 씨에게 하지 못했던 답을 중얼거렸다. 쭈그리고 앉아서 끊어내지 못한 미련으로 피운 아마릴리스들을 눈으로 쓰다듬어본다. 몇 번이나 그를 향해 달려갔는지 셀 수가 없다. 그때마다 이만쯤이면, 그는 나를 끊어내었겠지. 정리하였겠지.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와 나를 결혼하게 만들었던 이니셜 기사는, 결국 파경으로 끝난 그의 짧은 결혼생활과, 새로운 연인에 대한 가능성을 알려주고 있다. 이제 와 다시 흔드는 일은 해서는 아니 된다.
“시은아.”
퍼뜩 고개를 돌려보니 아버지가 마당으로 내려선다. 아버지는 가볍게 점심을 드시고 한 시간씩 달게 낮잠을 주무시곤 했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
팔을 붙잡자 괜찮다고 손을 젓는다.
“엄마는 시장에 가셨어요. 아빠 좋아하시는 삼계탕 한대요. 무거울까 봐 따라갈까 했는데 아빠 혼자 계신다고…….”
“완전히 애 취급이구나. 내가 요즘 포대기 속에 도로 들어가버린 거 같아.”
“물 떠다드려요 ”
“아니야.”
“그럼 간식 좀 챙길까요 ”
“토마토 주스 마셨어.”
“저더러 달라 하시지.”
“또 애 취급.”
아버지는 편안한 표정으로 웃어주신다. 짐을 싸들고 내려온 날, 이제는 평생 그리움으로 살아도 어쩔 수가 없어요. 울음을 삼키면서 뱉은 말에도 깊게 한숨 한 번 쉬시고는 조용히 웃어주셨다. 아버지 기척을 듣고 벌써부터 낑낑거리면서 뛰어오르기 시작한 누렁이 머리를 한참 쓰다듬고는 아버지는 대문을 나섰다.
“장기 두러 가시는 거예요 ”
“응.”
“무리하시면 안 되어요.”
“무리되면 침 맞고 약 먹고 오면 되지.”
나는 길 건너 한약방까지 아버지와 팔짱을 끼고 걸었다. 무면허 약장수라고 험담하는 이들도 있지만, 본인은 삼대째 이어온 가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일흔이 훨씬 넘으셨다는데 아버지보다 더 젊어 보이는 원장님은 요즘 들어 아버지와 장기 두는 일을 즐기는 눈치이다. 일주일에 세 번씩 맞는 침이나, 차처럼 연하게 끓여 마시는 약재도 아버지에게 잘 맞아 나는 다소 성격이 괴팍하고 한의사 면허도 없다는 그분이 고마울 뿐이다.
“좀 드셔보세요.”
아침나절에 만든 카스텔라를 통에 담아 전해드리자 물으신다.
“그 집 자두나무에 자두가 열렸어 ”
“네, 그런데 아직 조그맣고 파랗고 그냥 그래요.”
“자두는 새파랗다가도 어, 하는 사이에 빨갛게 익어버려. 제철 과일이 보약이지. 익으면 아버지 따다가 드려.”
“네, 원장님께도 드릴게요.”
허허 웃는 소릴 뒤로하면서 왔던 길을 터덕터덕 되밟았다.
바람이 부쩍 강하게 불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긴 스커트가 다리에 휘감겼다. 스커트를 걷어내면서 부지런히 움직여본다. 잡념이 덩치를 키우기 전에 오늘 할 일을 하나씩 생각한다. 완성된 물품들을 박스 포장하고 빨래를 걷고, 저녁 준비를 거들고 그리고 반나마 완성한 퀼트 이불을 만들어야지. 나비를 잡으려 팔을 뻗은 곰돌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올가을이면 엄마가 되는 친구에게 특별히 약속한 이불이다. 친구와 친구의 남편을 닮은 아이가 곰돌이 이불을 맘에 들어 할지 모르겠다.
아이를 가지자.
아들이면 좋겠어. 나처럼…….
현건일처럼……. 그를 닮은 아들을 상상해본다. 현건일처럼 팔다리가 길고, 마음이 여리고, 그리고 다정한 아이겠지.
마당으로 들어서면서 펄쩍펄쩍 앞발을 들고 뛰는 누렁이를 쓰다듬어 주고는 자두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바람에 사르르 초록빛 잎사귀가 서로 몸을 부딪기며 소리를 낸다. 올봄, 하얗게 나무를 덮었던 꽃이 진 자리에 새파랗고 탱탱한 자두가 조랑조랑 달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문득 새파란 자두는 어떤 맛일까 궁금해진다. 나는 팔을 뻗어 누렁이처럼 펄쩍펄쩍 두어 번 뛰어보았다. 아래로 처진 나뭇가지에 매달린 녀석들은 손에 닿을 법도 한데 도무지 잡히지 않는다.
부엌에서 빨간색 플라스틱 의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자그마한 의자를 밟고 올라서 보니 노란빛을 띠기 시작하는 자두가 저만큼 위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다. 햇살이 이마로 눈으로 쏟아져 내린다. 잎사귀는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빛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거린다. 나는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었다. 출렁거리는 잎사귀 사이로 파란 하늘이 점점이 보인다. 노란 자두를 향해 눈을 찡그리면서 손을 뻗었다. 작은 키를 약 올리듯 한 뼘이 모자란다. 발꿈치를 살짝 들어본다.
이걸, 이걸 못 따나. 내가 이거 하나 가지지 못하나. 내가 원하는 건 왜 한 뼘씩 어긋나는 걸까.
쓸데없이 운을 시험하고, 의미 없는 소망을 자두 하나에 또 걸고 있다. 몇 번을 뛰어보고 발꿈치를 바짝 들어본다. 뻗은 팔이 저려오고 땀이 눈으로 흘러들어 앞을 볼 수가 없다.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쓰라린 눈을 비볐다. 땀인지 눈물인지 뜨뜻하게 손등을 적신다. 한번만 더 해봐야지. 의자 왼쪽 끝으로 최대한 붙어 서서 도약하는 발레리나처럼 발끝을 들고 손끝까지 쭉 하늘로 뻗어본다. 자두가 손끝에 닿으려는 순간 휘청 몸이 흔들린다. 어마나!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기 직전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등줄기에 조르륵 소름이 돋는다. 노란 자두는 아직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번에는 꼭 잡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발꿈치를 들고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 중지 손톱에 자두가 닿았다. 손톱 끝만으로도 싱싱하고 통통한 과육을 느낄 수 있다. 조금 더, 발꿈치를 바싹 들다가 나는 까아악 비명을 질렀다.
“뭐하는 거야, 지금 너 떨어질 뻔했잖아!”
허리를 붙잡고 있는 남자가 귀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소리로 꾸짖는다. 햇빛의 잔상 때문에 세상이 온통 붉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입을 벌려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나는 두어 번 기침만 하였다.
“내려와.”
남자는 허리를 덜렁 끌어안고는 나를 바닥으로 내려다 놓는다. 표정을 펴지 않고 나와 눈도 제대로 맞추지 않고 남자는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너무나 쉽게 툭, 노란 자두를 따더니 자, 이거 위에서 내게로 던진다.
아, 난 반사적으로 손을 벌려 노란 자두를 받았다.
“익지도 않았잖아 이게 뭐라고 따겠다고. 다칠 뻔했잖아!”
건일이 툭 바닥으로 내려서서는 다시 버럭 소리를 지른다. 자두는 상상보다 훨씬 더 탱탱하고 싱싱하였다. 자두를 손에 쥔 채로 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
“줄 거 있어 왔는데. 젠장. 넌 여기서 밭을 만들었어.”
무슨 소리인가 살펴보니 현건일은 아마릴리스를 쳐다보고 있다. 오른 눈썹 머리가 단단해지도록 찡그리고 있는 걸 보니 잔뜩 심술이 났음이 틀림없다.
“혹시 아마릴리스 주시려고요 ”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문 근처 저만치 쯤 팽개쳐둔 화분을 집어 들었다. 흰색 겹꽃이다. 조금 더러워지긴 했지만 곱게 포장이 된 화분에는 자그마한 아마릴리스 봉우리가 막 벌어지기 시작하고 있다.
기억하고 있었던가. 나를, 이 꽃을.
호들갑 떨지 말아야지, 바보처럼 울지 말아야지, 난 침을 꿀꺽 삼켰다.
“예뻐요. 고맙습니다. 포장도 예뻐요. 이거 서울서 사서 여기까지 가지고 오신 거예요 ”
“사온 거 ”
“네 ”
“포장은 집 앞에 화원에서 했지만, 아마릴리스는 산 게 아니라 마당에서 캐왔거든 ”
“마당이요 ”
후, 숨을 쉬더니 건일이 평상에 걸터앉는다. 까닥 와보라 손짓을 한다. 나는 매일 이 남자와 여기서 이렇게 살았던 것처럼 익숙하게 그의 앞에 다가가 가만히 섰다.
“내가 키웠어.”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못 믿는 거야 그럼 올라와보라고. 정원에 아마릴리스 스무 개를 심었어. 내가 매일 물도 주고, 영양제도 주고.”
“정말요 ”
건일이 고개를 끄덕한다.
“당신이 직접 ”
“그래. 몇 번을 말해 ”
그가 정원의 흙을 파내고 구근을 심는 모습을, 언젠가 나처럼 기도하듯 물을 주는 모습을 상상하려 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느새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하여 하얀 아마릴리스가 흐릿해진다.
“그런데, 저놈은 내가 심은 놈은 아냐.”
“네 ”
건일이 내 손을 제 가슴 쪽으로 끌어당겨 꾹 힘주어 잡았다.
“처음에는 섞여 있어 몰랐어. 가만 보니 이놈만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혼자 자라더라고. 뭘까, 뿌리도 새끼를 치나, 며칠 고민하다가 네이버 검색에서 답을 찾았어. 죽은 줄 알고 마당에 묻은 구근에서도 꽃이 피나요 지식인 답변은 그런 일도 왕왕 있다고. 이거 네가 지난겨울에 죽었다고 묻어 놓은 그 꽃이지 ”
현건일과 같이 살게 해달라는 소망을 묻었던 아마릴리스. 나를 절망하게 만들었던 아마릴리스……. 난 화분을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 건일이 한 팔로 허리를 감싸고 등을 쓸어준다.
“못된 계집애. 그래놓고, 휙 가버리니 속이 편하든 ”
“미안……해요.”
난 고개를 들지 못했다.
*
자두를 코끝에 대고 숨을 들이마신다. 새콤하고 달콤하다. 오늘 오후에 빨갛게 익은 자두를 따서 한 소쿠리 담아두었다. 자두 냄새가 온 방에 가득 찬 듯하다.
엄마가 끓여주신 삼계탕을 먹고 서울로 돌아가던 날, 건일이 내게 물었다.
언제 올 거야.
우리는 그날, 자정 무렵 출발하는 고속버스표를 끊고 나란히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있었다. 이십 분 후면 떠나겠구나 시계를 자꾸만 쳐다보면서 그를 흘끔흘끔 훔쳐보면서 바느질 때문에 굳은살이 박인 손마디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너, 언제 올 거야
나는 무엇이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그의 입술만 쳐다보았다.
알았어.
건일이 아무래도 좋다는 듯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자두 익으면 올라와.
네
자두는 맛보고 와야지. 익지도 않은 걸 따겠다고 그렇게 애를 썼잖아.
스무 살 처음 본 날도 그랬는데, 몇 달 만에 보는 그에게도 우스꽝스런 꼴을 먼저 보였다.
그건 그렇고 말이야.
네
며칠 전에 학교에 갔어. 요즘엔 나 같은 사람도 불러 특강 해달라 하더라고. 과 사무실 근처를 지나다 보니 대자보를 붙여놨는데 ‘대동세건 열혈서사’로 시작해. 자식들, 지금이 몇 년도인데. 80년대 구호 외치던 문구를.
움찔 심장이 경련하듯 떨렸다. 그가 시선을 맞추고는 싱긋 웃었다.
**학번 서사과 정시은, 각 시대마다 신이 접해 있다고 말한 건 누구였지
……몰라요.
가르쳐 줬을 텐데
무슨…….
고개를 돌리려는데 건일이 손을 뻗어 양 볼을 잡았다. 양 귀까지 감싸듯 잡고는 나지막하게 말하였다.
귀까지 새빨개져서 캔커피 주고 도망가던 신입생.
난 입을 주먹으로 가렸다. 가릴 수 있다면 얼굴 전체를 가리고 싶었다. 오월의 그날처럼 나무 그늘로 도망가버릴 수 있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캔커피 그거, 맛있게 먹었어.
건일이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한눈에 반한 남자를 처음 보던 날의 정시은처럼 심장이 가렵고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상처받은 자존심이 먼저 고개를 바짝 치켜들었다. 나는 건일의 손을 쳐내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캔커피 따위 싫어한다고 했잖아요.
그건 맛있었어.
거짓말. 원두커피만 마시잖아요! 내가 준 캔커피도 한번 비웃고 버렸을 거면서!
아니야. 확실히 내가 마셨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캔을 보존 못 한 건 억울하지만, 확실해. 동하가 목마르다고 달라 그러는 걸 한 방울도 안 주고 그 자리에서 내가 다 먹었다고. 나도 목이 말랐거든.
예전 이야기를 하는 일이 부끄러운 듯 어색하게 웃으며 건일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내 주변을 한참 맴돌았다며.
그런 적 없어요.
거짓말. 몇 달을 그랬다면서.
누가요.
나는 팔목을 비틀어 빼어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벌떡 일어서는데 건일이 다시 붙잡아 앉힌다.
놔요.
네가 그랬잖아.
내가 언제!
영리한 줄 알았더니 기억력이 별로야.
누구만 할까!
내장 뒤편 어딘가에 잔뜩 구겨서 눌러놓았던 감정이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나는 그의 어깨와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정말 누구만 할까! 나 같은 건 깡그리 다 잊고, 내내 조금도 관심 없었으면서! –
그래, 나 머리 나쁘다. 이렇게 태어난 걸 어쩌겠어. 이 여사한테 가서 따져보든가.
묵묵히 맞고 있던 건일이 어쭙잖은 농담을 던졌다.
현건일, 멍청하고 바보 같고 하나부터 열까지 말 안 해주면 하나도 모르고! 이제 와 그런 일 따위 기억해내면 뭐해 뭐하러 기억…….
건일이 내 머리통을 꽉 붙잡았다. 그의 가슴팍에 코와 입이 파묻혔다. 난 숨을 헉헉거리면서 끅끅 울음소리를 내면서 한참을 버둥거렸다.
빨갛게 익은 자두를 한 입 깨물었다. 단물이 입 안 가득 터진다.
자두 익으면 데리러 올게.
버스에 들어서는 그를 붙잡았다.
응
자두는요, 파랗다가도 어 하면 익어버린대요.
그래서
그가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내일, 익을지도 몰라요.
어울리지 않는 억지를 부리자 그가 시원하게 웃었다.
내일은 못 와. 그렇지만 모레는 올게.
어, 하면 익는다며. 왜 이렇게 더뎌
올 적마다 나무를 한 번씩 툭툭 치면서 불만을 토로하기를 다섯 번, 어느새 자두는 빨갛게 익었다. 나는 곤히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착하게 아래로 뻗은 속눈썹과 다정함이 깃든 눈시울을……. 난 자두 향을 잔뜩 묻히고는 그의 벌어진 입술에 가만히 입을 가져다 댄다. 그의 폐를 돌아 나온 달짝지근한 숨을 깊이 마셔본다.
으응, 건일이 뒤척이며 눈을 뜬다.
몇 시야
아직 한밤이에요.
그가 눈을 감은 채 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는다.
내일 새벽에 출발해야 해. 빨리 자.
네.
나는 그의 겨드랑이를 파고들었다. 잠결에도 내 등을 툭툭 두드려준다. 그의 입술을, 뺨을 머리칼을 팔과 다리 가슴과 배, 그의 모든 것을 느끼고 싶은 새삼스럽고도 격렬한 충동에 손가락이 움찔거린다. 나는 그를 깨우는 대신 눈을 꼭 감고 코를 가슴에 대고 깊이 숨을 들이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