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ion | Lonelyheart RAW novel - Chapter 4
4화.
4화. 계약결혼
“좋은 데로 가야겠어. 남자도 안 만날 거면 아까운 차림인데 ”
“예뻐 ”
금세 눈을 반짝이면서 활짝 웃는다. 박세경은 그래야 어울린다.
“굉장히.”
“야아, 역시 넌 감각이 죽여줘.”
세경이 맞은편 소파에 걸터앉았다. 다리를 꼬자, ‘객관적’ 섹시함 그 자체다. 굵은 웨이브 머리를 넘기면서 세경이 허리를 폈다. 시선을 도도하게 맞추고는 입술을 달싹달싹 동그랗게 만들더니 뭔가 재촉하듯 상체를 조금 흔든다.
뭐, 난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찬사, 더 필요해. 얼마를 썼는데에.”
세경이 눈을 윙크하듯 찡그리면서 검지로 제 귓등을 짚었다.
“너 번지 잘못 찾았다. 귀여운 짓은 네 남자들한테나 하시지.”
“이 옷, 프리다 지아니니가 나를 위해 만든 옷 같다 그랬어.”
“팔려면 뭔 소린들 못할까.”
“어후, 너! 이러기야 그러니 네가 게이란 소릴 듣는 거야.”
험악하게 인상을 쓰는데도 세경은 개의치 않고 깔깔댔다.
“자아, 게이 친구. 밥 사준다며. 가자. 밥 먹으러.”
그 단어 한 번만 더 말해봐라, 한 소리 해주려다가 핸드폰을 들면서 중얼거렸다. 이 자식은 여기로 온다는 거야, 곧장 가서 있겠다는 거야.
“누구 ”
“동하 오기로 했어.”
“오늘 안 된다더니 ”
“세경 님 생신이라 했더니 한 시간 전에 연락 왔어. 약속 겨우 취소했다더라.”
“쳇, 생일이 언제였는데. 다들 되게 바쁜 척해.”
세경이 탁자 위 신문을 소리 나게 펼쳤다. 문자를 확인하고 동하 문 앞이란다 말하자 팩하고 세경이 일어섰다. 아니기만 해봐. 문을 벌컥 열더니 꺅, 짧은 비명을 질렀다.
“놀래키긴.”
동하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패션쇼장이군. 나는 입술 가장자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날렵한 선으로 떨어지는 블레이저에 광택 나는 스키니 바지하며 티셔츠 색깔까지. 하긴 저따위를 입고 어울린다 싶은 남자가 몇이나 되겠나 말이다.
“눈들이 해태지. 어떻게 네가 아니고 나야.”
“뭘 ”
동하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한다.
“어딜 봐서 건실한 샐러리맨 평균 꼴로 하고 다니는 내가, 이동하도 지나가는 게이설의 주인공이냐고.”
“동하는, 너무 증명을 잘하잖아 ”
“그렇지, 건일이는 ‘너무’ 건실해서, 잖아.”
동하가 손을 이마께 두어 얼굴을 반쯤 가리고는 웃었다.
“암만 생각해도 우습지만, 너 내가 런칭 쇼니 뭐니 할 때마다 초대하면 비쭉 얼굴 내밀고선 배우고 모델이고 여자들한테 인상만 북북 그리다가 나가버릴 때 이미 예상했거든 그때 남예영, 걔가 매니저까지 설쳐대고 정말 작정했었지.”
“걔가 누군데 ”
동하는 이제 가슴까지 들썩이며 웃었다.
“영화, 패는 거 말고 멜로도 좀 봐. 암튼 그날, 2차 가서 네가 예영이한테 그랬다. 이것 봐, 너 이름이 뭐야. 예영이요, 알았어. 예영이, 너 엉겨 붙지 마라. 무겁다.”
어머 어머, 이번엔 세경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세경이 웃음이 그칠 즘에 기억났다. 아, 그 질기게 치근덕거리던 여자, 얼굴도 이름도 기억에 없고 향수냄새가 독했다는 것밖에 모르겠다.
핸드폰으로 문자가 하나 들어왔다.
[회장님 퇴근하십니다.]이제 자리를 뜰 수 있다.
“할아버님 아직 회사에 계시는 거야 언제까지 스탠바이 ”
너 귀신이다. 세경에게 핸드폰 액정을 디밀었다.
“이야, 그럼 가도 돼 ”
“잠시만.”
나는 시계를 흘끗 보았다.
올 시간이 되었는데.
중간에 전화가 한 번 왔었다. 나가려 하는데 부서에 문제가 생겨서 좀 더 있어야 한다고 어떻게 할까 하는 물음이었다. 8시까지 할 수 있다기에 그러라 했다. 7시 50분이다. 세경이 혼자 레스토랑에서 바람맞히게 될까 봐 사무실로 불렀는데 동하도 왔으니 둘만 먼저 가라 할까 말하려는 참에 노크소리가 들렸다.
네, 나는 데스크로 자리를 옮기면서 답했다. 문을 조용히 열고 한 걸음 들어서서 문을 닫고는 깍듯하고 단정하게 인사한다.
“다녀왔습니다, 본부장님.”
어떻게 단 한 번도 어긋남이 없는지, 구두바닥에 페인트칠이라도 해놓아 발자국을 만들면, 그녀는 보지 않고서도 다음번에도 꼭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 각도로 절을 하고 똑같은 보폭으로 꼭 같은 길을 걸어 책상 앞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정지한 자리에 멈춰 서겠지.
말씀하신 것 받아왔습니다.
내게 작은 쇼핑백 봉투 하나를 건넸다.
“고마워.”
그리고 저…….
시은이 핸드백 속에서 영수증 고깔을 씌운 지폐 몇 장을 꺼내더니 선뜻 내밀지 못했다. 동하와 세경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 긴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귓등이 발개졌다.
그날 이후,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킬 일이 있으면 난 시은을 찾았고 개인적 부탁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던 자신의 말대로 시은은 마땅한 업무를 처리하듯 했다.
“배고프겠다. 가서 저녁 먹어.”
나는 시은이 쥐고 있는 지폐를 못 본 척 일어섰다.
“누구 비서 바뀌었니 예쁘다 ”
시은이 나가자마자 세경이 붙어 섰다.
“비서 아냐, 직원. 내가 뭐 좀 부탁했어.”
“그래 뭐 가지고 왔는데 ”
“네 선물. 너 이거 받겠다고 했잖아.”
봉투 속에서 작은 박스를 꺼내 건네자 세경이 과장된 환호성을 내질렀다. 끼아아.
“오더해서 받은 거야.”
“고마워.”
세경이 하고 온 목걸이를 냉큼 풀었다. 선물은 에메랄드를 포인트로 가느다란 금줄이 그물처럼 섬세하게 얽혀있는 펜던트였다. 동하가 뒤로 서서 제대로 걸어 주는 동안 세경은 길게 내려온 머리를 한 손으로 잡아 가슴 앞으로 모았다.
“꼭 우리 브랜드는 안 하지.”
“동하야. 미안, 네가 건드리는 브랜드 주얼리는 영 별로더라.”
졸업하자마자 훌쩍 미국으로 건너가 디자인 스쿨을 다니더니, 디자이너로서의 창조적 재능은 부족하다면서 동하가 시작한 일은 백화점 의류매장 플로어 매니저였다.
사고가 유연한 동하의 부모님들은 동하가 디자이너를 하겠다고 헤매고 다닐 때도 그랬듯 수선스럽지 않은 후원을 했다. 타고난 재능이 있고 수려한 외모와 화술에, 모자라지 않는 집안의 후광이 받쳐주자 일은 승승장구였다.
동하는 몇 년이 되지 않아 해외 브랜드 수입업체인 D 인터내셔널을 차려 독립하고, 일하던 백화점에서 단독으로 숍인 숍 형태의 편집매장을 운영하는, 그쪽 업계에서는 손꼽히는 인사가 되었다.
“주얼리만 안 하고 옷은 입는 거처럼 그런다 ”
“어머, 옷이랑 백은 가끔 사는데 ”
세경을 돌려세워 펜던트 위치를 잡아주면서 동하가 말했다.
“비서도 아닌데 왜 이런 걸 시키지 너 별일이다.”
“나한테 묻는 거 누구 ”
나는 재킷을 마저 껴입고는 가자, 문으로 향했다.
“오호, 숨기고 싶은 특별한 사람 ”
“정말 아까 그 여자랑 그런 거야 ”
세경이가 동하를 밀치고 바짝 다가섰다.
“안 그래도 한동안 걔가 그런 소리에 시달린 눈치야. 지금은 본부장 게이인거 모르고 혼자 좋아한 걸로 꼴 우습게 된 거 같던데 너네까지 보태지 마라.”
문고리를 잡는데 앞을 가로막으면서 동하가 빙긋 웃었다.
“왜 그런 소문까지 만들어 네가, 여자 소문이라면 질색하는 현건일이 게다가 회사 안에서 ”
“후배야, 우리 과 후배.”
“오, 그러셔 ”
동하는 눈썹선 까지 자연스레 흘러내린 머리칼을 후우, 불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보니, 밥값도 다정하게 챙겨주더라 ”
동하가 생긴 건 날캉날캉한데 엄청나게 질긴 면이 있다. 나는 양손을 들어 보였다.
“애가 형편이 많이 어려워서 취직시켜줬어. 월급도 반 넘게 차압당한다는데 본부장이 뒷배여서 가불요청을 들어줘야 하나 고민한다더라고. 회장님 스파이 노릇 하는 비서한테 못 시키는 심부름 가끔 부탁하고 밥값 줘. 이제 끝, 벗겨서 홀랑 털어도 더는 안 나와. 됐어 ”
동하가 고개를 까닥하면서 문을 열고 나가십쇼, 허리를 굽히는 시늉을 했다.
*
식사에 곁들인 와인이 길어졌다. 동하가 두 병째 새로 주문을 한 와인을 따라주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요즘도 심심찮게 오르내리나 보던데 ”
“나도 이동하처럼 증명 잘 해보이지 뭐.”
세경이 설레설레 손을 저었다.
“아우, 관둬. ‘최근 중견 건설 업체 3세 A씨가 여자 연예인들 사이에 화제라고 합니다.’로 시작되는 기사 하나 더 만들래 그 기사 마침표는 뭔지 알지 항간에는 A씨가 게이설을 부인하기 위한 연막일지도 모른다는 루머도 돌고 있어 A씨와 사랑에 빠진 탤런트 B씨, C씨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합니다.”
세경은 백만 원도 넘게 줬다는 구두를 신은 발을 굴러댔다. 말 된다, 그거. 너 패션 홍보 기사 치우고 옐로페이퍼 아르바이트해라, 같이 웃는데 동하가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할아버님께 결혼하기로 말씀드렸다며.”
“다음 달, 아니지. 달 바뀌어서 이제 이번 달까지 결혼 안 하면 난 빤스 바람으로 쫓겨나는 거지.”
동하가 피식 웃었다.
“다른 집이라면 설마 그러시겠니, 건배! 잔이나 부딪치겠는데. 넌 빤스 차림으로 쫓겨나는 거 구경하겠다 싶어.”
“동하 너도 그런 용어 써 빤스가 뭐니, 팬티도 아니고. 트렁크, 박서, 아니면 속옷! 그나저나 얘들이 암만 그래도 너무 하네 나 여자거든 상상 되어서 불편해.”
“상상 기억이 아니고 ”
내가 정정해주자 세경이 홱 눈을 치켜뜬다.
“야아! 제대로 못 봤어. 그리고 그게 몇 년 전인데!”
“안됐다. 현건일 최전성기였는데.”
“상대는 찾아보고 있는 중 ”
동하의 물음에 나는 남의 말을 하듯 주워섬기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이 여사님이 딱하게 되었지. 하루 종일 전화통에 불나고 여기저기 다니시나 본데 괜찮은 집은 게이사위 볼까 벌벌 떨고, 게이든 고자든 제발 데려만 가주슈 하는 처지면 알만하지 않아 ‘빤스’만 입고 쫓겨나고 말지, 그런 여자한테 평생 코 꿰는 건 내가 사절이야. 알고 보면 내가, 몸과 마음이 새하얀 손수건까지는 아니라도 흰 수건만큼은 순결하거든.”
“……건일아. 너.”
세경이 오늘 처음으로 웃음기를 완전히 지운 채 나를 똑바로 보았다.
“응.”
“너, 정말 그러다가 쫓겨나. 건일아.”
“물론, 아들도 맨발로 쫓아낸 양반이야. 손자라고 다르겠어.”
세경이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시선을 비켜 와인 잔을 들었다가 놓았다. 나초를 와자작 씹으면서 말했다.
“건일아, 그럼 너 나랑 결혼할래 ”
“뭐 ”
세경이 경악에 찬 나를 흘끗 보더니 할라피뇨 두세 개를 한꺼번에 찍어 넣고 아흣, 매워. 손부채질을 하면서 덧붙였다.
“진짜는 아니고 그러니까, 계약결혼 같은 거.”
“뭐, 라고 ”
“계. 약. 결. 혼.”
세경은 금세 박수라도 칠 기세였다. 반짝거리는 눈을 하고 설명했다.
“굳이 지금 평생을 바칠 진짜 상대를 고를 필욘 없잖아. 우선 해결만 해. 안 그래도 너 나랑 붙어 다니면서 연애 안 하는 거 그것도 소문에 신빙성을 더한다더라 내가 좀 섹시하니 ”
“기막히군, 그래서 알고 보니 십수 년 열애를 한 사이라더라, 스토리라도 만들면 다들 믿어주겠어 ”
“믿든 말든, 길게 잡아 2년만 결혼생활하면 될 거 아냐. 할아버님 천년만년 그러시겠니. 여든이 넘으셨어. 힘 빠지신다고. 내후년 안에 곧 정리하실 거야. 어머님이나 할아버지나 나 아무리 미워해도 1,2년 그 구박을 못 참겠어 혹시 알아, 손자가 게이되는 거보다는 낫다며 조금 예뻐해주실지. 어머님이야 사실대로 말해도 되고. 뭐, 지금 가리실 처지가 아닌 거처럼 보이긴 하다만은.”
기가 막혀서 빤히 쳐다보자 세경이 볼을 불룩하게 만들었다가 푸, 숨을 뿜어낸다.
내가 현건일 구제하려고 큰 인심 쓰는 거야, 아니 두드려보면 나에게도 크게 마이너스는 아닐걸. 허즈번드나 엑스허즈번드가 너라면 내 상품가치도 수직 상승 아니겠니
세경이 테이블 위 촛불처럼 몸을 불규칙적으로 흔들면서 웃었다.
“집어치워. 계약이라니.”
와인을 소주 먹듯 털어 넣는데 창창한 계약결혼 시나리오를 줄곧 듣고만 있던 동하가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은데 ”
동하는 팔짱을 끼고 등을 의자에 기댄 채로 세경과 나를 차례로 보았다.
“믿든 말든, 길면 2년, 운이 좋으면 1년이면 되는 거잖아. 건실하지만 선 자리마다 파투 내버리는 현건일은 결혼 혐오증도 아니었고, 성정체성을 숨기기 위한 결혼 혐오증은 더더욱 아니었고, 알고 보니 몰래 한 사랑이 있더라. 그래서, 덕분에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니까 괜찮지 ”
세경에게 웃어주면서 동하가 끄덕였다.
“세경이 너, 확실히 머리도 좋아.”
“됐다. 어느 멍청이가 믿어. 얘랑 나랑 반지를 나눠 끼고 다녔대도 안 믿어. 내가 뒤치다꺼리해준 세경이 남자가 몇 명인데.”
“누가, 세경이랑 하래 ”
“그럼 ”
동하가 검지를 들어 세경을 가리켰다.
“뭐, 뭐니 나 아니라며.”
검지 끝이 가리키는 곳, 세경의 목걸이가 불빛 아래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