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olution is also a business RAW novel - Chapter (165)
왕관의 보석 (9)
젠장, 그렇게 오기 싫었는데. 기어코 날 여기로 끌고 오다니.
“어서 오십시오, 기욤 재무총감 각하. 피트 수상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으렇군요오…”
“들어가시지요. 제군들! 정문을 열어라!”
“예!”
여태껏 많이 봐왔지만, 오늘따라 문을 열어주는 저 경비병들이 마치 저승사자마냥 느껴진다.
마침 경비병들 군복도 딱 시뻘건 옷이네. 아주 흉한 징조야.
나는 사약을 받는 사람마냥 털레털레 걸어, 혐성국의 심장인 다우닝 가 10번지 수상 관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욤 드 툴롱 각하, 외투는 이리 주시지요. 저희가 맡아 보관하겠습니다.”
“예에…”
“이제 응접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고용인의 뒤를 따라 복도를 조금 걷자, 나는 각종 지도가 벽에 걸려있고 서류가 빼곡하게 쌓여있는 방에 도착했다.
“수상 각하,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차는 바로 내오겠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날 데려다 준 고용인이 사라지자, 방 안에서 집무를 보던 서른 즈음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기욤 드 툴롱 총감. 얼굴을 보는 건 환영식 이후로 처음이군요.”
“하하… 제가 조금 바빠서 말입니다.”
“흠, 총감께서 그러신다면야 그랬다고 치지요. 하하.”
그… 선생님? 악수한 손에서 힘은 좀 빼주시면 안 될까요. 왜 말이랑 행동이랑 다르시담.
“그래요. 할 얘기도 많으니 일단 앉으실까요, 총감.”
“···예, 뭐.”
나는 얼얼해진 오른손을 왼손으로 풀어주며 피트가 앉은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이렇게 절 찾아오신걸 보아하니, 우리의 친구 웰즐리 의원이 맡은 일을 잘해냈군요.”
“아예 숨기시지도 않으시는군요.”
“오늘 해야 할 이야기가 참 많고 거기에 총감께서도 지레짐작하고 계실 텐데, 굳이 숨겨서 뒷맛을 껄끄럽게 만들 필요는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말하는 것과 행동에 거침이 없다. 스물넷에 수상 자리를 꿰차고 10년 넘게 유지해 온 사람의 말빨답다고 해야 하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예의 그 고용인이 나와 피트가 있는 응접실 문을 두드리며 뭐라 얘기했다.
– 차가 준비됐습니다. 수상 각하.
“기욤 총감. 차로 목을 좀 축이면서 얘기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뭐,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들어와도 좋네!”
고용인은 피트의 말이 떨어지자, 응접실 문을 열고 홍차와 디저트 등을 실은 트레이를 밀며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찻잔이 세팅되고, 디저트가 나와 피트 앞에 모두 놓이자, 고용인은 뭐 그리 급한지 트레이를 끌고 밖으로 도망치듯 나갔다.
“자, 그럼 드시지요.”
“예. 감사히 마시겠습··· 어우! 이게 무슨.”
“이런, 고용인이 실수로 차 잎을 태운 것 같군요.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요. 총감께서 돌아가시면 제가 차를 끓인 고용인을 찾아 단단히 혼을 내드릴 테니 노여움을 푸시지요.”
“······.”
왜 고용인이 도망치듯 나간건지 알겠다.
매일 차를 달고 사는 영국인이 차 잎을 태웠다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보나마나 나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태운 거 같은데.
겉으로는 젠틀하게 생긴 사람이 은근 뒤끝이 길구만.
뭐라고 해야 하나. 자기가 쓴 소설 안 읽어준다고 삐지던 나폴레옹 그 인간 과랄까.
“거, 편지 좀 안 받았다고 보복을 너무 심하게 하시는 거 아닙니까.”
“보복이라니요? 그저 단순한 사고입니다. 하하.”
아까 거침이 없다든가 뭐라고 칭찬을 했던 거 같은데, 다 취소해야겠다. 이런 좀스런 소인배 같으니.
딱 할 말만 하고 서로 갈 길 가는 게 좋겠다. 이런 소인배와 무슨 대사를 논할꼬? 에잉 쯧쯧.
“···좋습니다. 잡스러운 건 차치하고서 피트 수상님이 절 이렇게 공들여서 만나고 싶어 하셨던 이유가 있으실 텐데, 한 번 말씀해주시지요.”
“바로 본론이라, 직설적이셔서 마음에 드는군요.”
“답답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서 말입니다. 괜히 제가 왕을 두 번이나 끌어내린 게 아니거든요.”
“쿨럭! 쿨럭! 큼!! 크흠!”
내 말에 피트는 사례가 들렸는지 팔을 입에 대고 연신 기침을 했다.
꼴좋다. 이 소인배야.
나는 피트의 기침이 잦아들 무렵,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상님도 한 방, 저도 한 방. 우리 모두 공평하게 한 방씩 먹었으니 탁 까놓고 얘기해봅시다. 제가 피트 수상님을 위해 뭘 해드리길 원하십니까?”
“큼, 크흠. 뭐, 간단합니다. 우리 런던 해군성 친구들을 조금 구워삶아주셨으면 좋겠군요.”
해군성? 머릿속이 온통 전열함에 박을 생각으로 가득한 배박이들을 구워삶으라고? 그것도 영국인도 아닌 외국인인 내가?
“딱 한 마디만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수상님?”
“군주를 섬기는 신하 앞에서 왕을 두 번 끌어내렸다고 거침없이 말하시는 분께서 실례를 하시겠다니. 조금 두렵지만… 뭐, 해보시지요.”
당사자인 당신이 허락한거다? 뒤끝 없기야?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피트 수상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혹시 정신 나가셨습니까?”
“···기대했던 것보다 수위가 별로 높지는 않군요.”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부정하지 않으시네요.”
“하하, 제정신이면 이 수상이란 자리를 10년 동안 해먹겠습니까? 그것도 재무장관을 겸임해서?”
아니. 미친 거지. 그게 어떻게 제정신이야.
저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까 자유의 도비가 된 나와 달리, 피트는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을 받고 있는 것 같아서 측은해진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이 측은한거랑, 내가 측은해지는 거랑은 다르지.
“차라리 외국인인 저보다는 영국인인 웰즐리 경이나 샌드위치 백작님에게 부탁하시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이성적으로 보면 그게 맞는 판단이겠지만. 글쎄요. 전 좀 달리 생각합니다.”
피트는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며 이어 말했다.
“해군성 군인들에게 총감께서 말한 사람들이 접근한다고 치지요. 그러면 당장 다음날 의회에서 신발이 날아다닐 겁니다.”
신발이 의회를 가로질러 날아다닌다라,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광경 같은데.
“토리당과 휘그당은 서로의 중요 인물들 옆에 감시인을 꽂아 넣은 지 오래됐습니다. 당연히 우리 토리당에서 꽤 이름 높은 사람들이 해군성 사람들을 만나면 휘그당이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겠지요.
그러면 이제 의회에서 침을 온 동네방네 튀기며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할 겁니다. 문민통제 위반이라니, 정치군인이라니 얼마나 염병을 떨지 눈에 훤하군요.”
“그래서 영국 정치에 관여할 수 없는 외국인인 제가 필요하시다?”
“바로 그겁니다.”
피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답했다.
“해군성 중요인물들을 만날 수 있을 고위직 인물이며, 국내 정치와 연이 없는 사람. 딱 기욤 드 툴롱 총감님 아닙니까.”
음.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 반박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치고, 제가 해군성 친구들이 뭘 하게 해주면 되지요?”
“동인도 회사의 비리가 펑펑 터질 때, 적어도 중립을 유지할 수 있게만 해주시면 됩니다. 우리 쪽에 합류해주면 더더욱 좋구요.”
“음.”
나는 몸을 의자에 푹 기대고 짧은 신음을 흘렸다.
어려운 일이다.
상대가 육군이라면 나름 나도 육군 출신이니 야부리를 털고 술의 힘을 빌려 ‘형님, 아우’해볼 건덕지야 있을 텐데, 해군이라니. 이 무슨 가재가 게 편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고양이 편을 들어주는 일인가.
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면 보수도 당연히 짭짤할 터.
일단 상대가 내 몫으로 준비한 007가방 안 지폐 묶음의 수를 알고 나서 머리를 굴려봐야겠다.
“피트 수상님. 그러면 전 뭘 얻게 됩니까?”
“역시 사업가다우시군요. 손익계산이 철저하십니다.”
“직업병이죠. 그래서 손 패 안 보여주실 겁니까?”
피트 수상은 또 다시 어깨를 으쓱하고 들어올렸다.
“향후 10년간 기욤 총감의 회사인 이삭의 민족에 대해 특별 관세를 면제해드리겠습니다.”
“호.”
상당히 쎈 걸 대가로 걸었구만.
옛날 옛적 왕 목을 도끼로 썰어버린 크롬웰 이후, 영국은 외국 기업들의 자국 시장 진입을 어렵게 만들었다.
아. 정정하겠다. 말이 어려운 거지, 실상은 장사를 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그 예로, 세계에서 가장 배를 잘 만들던 네덜란드 조선소는 영국에서 만든 배가 아니면 영국령에 입항할 수 없다는 희대의 악질법인 ‘항해법’에 의해 예쁘게 폭사하고 말았으니 그 악질법의 위력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으리라.
그 밖에도 ‘수입 곡물에 관한 특별 관세법’이니 뭐니, 오직 자국 기업만을 살리겠다는 취지가 톡톡히 보이는 법들이 즐비한 영국이었다.
그런데 그걸 우리 이삭의 민족에 한해 없는 걸로 해주겠다니. 굉장히 매력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다.
다만 확실히 해야 할 건, 피트가 그걸 합법적으로 묵인해줄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불법적으로 움직이는 걸 못 본 척 해줄 것인지. 그게 문제다.
“공식입니까? 아니면 비공식입니까?”
“뭐, 한 회사를 위해 법을 뜯어고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재무부 직원 몇이 과로에 지친 나머지 몇 가지 항목을 못 보고 넘어갈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음, 대충 넘어가 줄 테니 적당히 장난질을 치라는 말이구만.
아예 합법적으로 움직인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이것도 충분히 좋은 조건이다.
하지만.
겨우 이정도만 따낼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수상 관저에 오지도 않았어.
나는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피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몇 가지 더 보장해주시죠.”
“보장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이삭의 민족이 해군성에 있는 사람들 상대로 몇 가지 팔아도 되겠습니까?”
“···지금 우리 영국 해군에게 군납을 하고 싶다는 말씀이신가요?”
“군납까지는 아니고, 해군 장교들과 장병들에게 몇 가지 물품에 한해 세일즈를 할 수 있는 ‘특별 허가’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피트는 미간을 구기며 답했다.
“···제정신으로 하는 말입니까?”
“제정신이면 3년 전 그 지옥 같던 베르사유에서 살아나올 수가 없죠.”
내 말에 피트는 손으로 턱을 쓸어내리며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일즈를 하겠다는 거, 혹시 군수물자입니까?”
“아니요. 제가 미쳤다고 그런 걸 납품하겠습니까? 들키면 영국에서도, 우리 프랑스에서도 매장당할 텐데.”
영국에서는 ‘영국산 무기’가 아니라 ‘프랑스산 무기’를 샀다고, 프랑스에서는 ‘적에게 군수물자를 팔아치운 매국노’라고 날 씹어 돌릴 게 분명한데 내가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흠. 그러면 뭘 원하시는 지요?”
“뭐, 의류라던가, 잡화라던가. 이것저것 일상생활에서 쓰는 거 있지 않습니까.”
“아니. 그런 거라면 지금도 충분히 팔아치울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피트는 내가 이렇게 집착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처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해주실 겁니까?”
“···잡화라면야. 뭐, 알겠습니다.”
“한 입으로 두 말하기 없는 겁니다?”
됐다! 됐어!
나는 환희에 겨운 나머지 두 손을 불끈 쥐었다.
***
영국 포츠머스 군항.
“갑자기 뭔 공사래?”
“몰라? PX(Port eXchange)인가 뭔가가 들어온다던데?”
“그게 대체 뭐야?”
“그러게.”
두 수병은 군항 안에 만들어지는 목조 건물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