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olution is also a business RAW novel - Chapter (176)
잠자는 사자들 (6)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자, 익숙한 내 집 천장이 아닌 낯설기 그지없는 천장이 보인다.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
불안감에 뻣뻣하게 굳어버린 몸을 억지로 침대에서 일으키자, 수일 간 꿈쩍 않던 관절들이 다 함께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설마 병원인가?”
아마 원래는 새하얀 흰색이었겠지만 땀에 흠뻑 젖어, 군데군데 회색 얼룩이 진 이불과 침대보를 보노라니 그런 생각이 든다.
흰색 이불에 흰색 침대보를 쓰는 소박한 곳이 이 프랑스에 병원 말고 더 있을 리가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차츰차츰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 자, 오늘도 이 자리를 빛내준 평원파와 산악파 의원들을 위하여! 우리 프랑스 인민들을 위하여! 건배!
– 건배!
– 하하! 그래, 비록 생각은 좀 다를지언정 모두 동지 아니겠소! 건배! 건ㅂ···. 억, 어억!
– 미, 미라보 의장!!
– 수, 숨이… 가슴이 답, 답해…
– 의장께서 쓰러지셨다! 의사! 의사를 불러!!
그래, 그렇게 쓰러졌구나.
그러면 시에예스와 로베스피에르는? 평원파와 산악파는? 라파예트 사령관과 군부는? 혹여 내가 쓰러졌을 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권총 테러, 폭탄 테러, 암살, 군사 쿠데타.
“···끄으윽.”
가슴이 절로 쫄깃쫄깃해지는 생각에 미라보는 다시 한 번 온 몸의 힘을 짜내어, 환자가 의식을 찾을 때를 대비해 침상 옆에 의사들이 올려둔 종을 손으로 쥐었다.
이미 회색으로 얼룩진 흰 내의에 땀이 또 한 번 배어들었지만, 지금 그런 사소한 건 중요하지 않았다.
딸랑, 딸랑.
구두 굽 소리가 병실 밖 복도를 메우길 잠시.
병실 문이 열리고 의사들이 누워있는 미라보를 향해 서둘러 다가왔다.
“의장님, 정신이 드셨습니까!”
“···의사 양반들이 있는 걸 보니 역시나 병원이 맞구만. 내가 이 침대에 누운 지 얼마나 되었소?”
“이제 근 한 달 되십니다.”
“한 달이라.”
미라보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누워있는 동안에 무슨 일 없었소?”
“예, 별다른 일은 없었던 걸로 압니다.”
“후우… 그거 참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자신의 목을 시시각각 죄여오던 가장 큰 걱정을 덜어내자, 이제야 미라보는 침대에 앉아 땀을 비 오듯 쏟아내는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의사양반. 나는 왜 쓰러진 거요?”
“···그것이.”
의사들은 자기들끼리 시선을 몇 번 맞추더니 미라보를 향해 천천히 말했다.
“영 좋지 않은 곳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왜? 혹시 내 소중한 아랫도리 녀석에게 문제라도 생겼소? 날 기다리는 숙녀 분들이 많은데.”
“······.”
나름 이 칙칙한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한 말이건만, 의사들은 그런 미라보의 농담에도 진지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이보시오 의사양반. 내 상태가 그렇게 심각하오?”
“···심장에 문제가 생기셨습니다.”
“심장?”
“저희 소견으로는 그렇습니다. 갑자기 흉통(胸痛)을 호소하신 부분이나 정신을 잃으신 것, 그리고···.”
그 뒤로도 의사는 여러 가지 의학적 용어를 섞은 내용을 한참 동안 미라보에게 말해주었지만, 대부분은 알아먹지 못할 법한 말들이었다.
결국 미라보가 알아낸 건, 단 한 가지.
태어날 때부터 왼쪽 가슴에서 펄떡펄떡 뛰고 있는 심장이라는 자신의 죽마고우가 많이··· 좀 많이 아프다는 거.
심장이라. 심장.
옛 군생활 시절, 사람은 머리나 심장에 납탄을 맞으면 죽는다는 걸 알게 된 미라보로서는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말에 퍽 입맛이 씁쓸했다.
“의사양반,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겠소? 10년? 5년?”
“···다음 발작 때는 의장님이 괜찮으실지 저희로서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난 분명 햇수로 질문했는데, 답을 햇수로 말해주지 않는 걸 보니 얼마 안 남았나보군.”
허허허.
미라보는 허탈하게 웃었다.
착잡하다.
일평생을 썩어빠진 봉건제를 부수기 위해 살아왔건만, 꿈을 이룬지 겨우 3년 만에 이렇게 가게 되다니.
“···기욤 드 툴롱 재무총감은 아직도 영국에 있소?”
“아닙니다. 며칠 전 귀국하셨습니다.”
“프랑스에 있다 그 말인가?!”
“예, 의장님. 사람을 보낼까요?”
“부탁하오.”
다행이다. 다행이야. 비록 시한부일지라도 마지막에 온 힘을 다해서 불타오를 수는 있겠다.
“아. 갈아입을 새 옷과 땀 닦을 수건도 좀 부탁하오.”
수의가 더러워서 쓰겠나.
***
미라보 의장이 깨어났다는 소식과 함께 그 뭐냐··· L&C 자동증기마차인가 뭔가를 타고 달려온 나를 환영해주는 건, 병상에 누워 오늘 내일 하는 미라보가 아니라. 평소처럼 그 땅딸막한 몸을 정력적으로 움직이는 미라보였다.
“아, 우리 프랑스인들이 흠모하는 재무총감 아닌가! 어서 오게. 그런데 저 밖에 부르릉- 부르릉-거리는 이상한 마차는 무언가?”
“방금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셨다고 했는데, 어째··· 멀쩡하십니다?”
“당연하지! 이 미라보만큼 건장한 사람 본 적 있나?”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미라보는, 마치 근육을 자랑하겠다는 듯 팔을 높이 들어 올리고 보디빌더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래, 자네가 이렇게 돌아온 걸 보니 영국에서 일은 모두 잘 끝낸 건가?”
“아뇨. 저어어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계신 못된 마귀할멈 때문에 왔습니다.”
“···예카테리나 차르?”
“옙. 그 미친 여자요.”
나는 영국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미라보에게 차근차근 얘기해주었다.
“로베스피에르와 산악파 친구들은 당장 전면전을 치르자고 했겠군.”
“그럴까봐 저번에 산악파에 내무부장관직을 던져 줬잖습니다. 이상주의자들은 적어도 자기들 눈으로 직접 현실을 맞닥뜨려봐야 깨닫죠. 무턱대고 주전론은 꺼내들지 않더군요.”
“음.”
의회의 정세.
“영국 함대를 빌린다라! 세워놓은 계획 있나?”
“일단 툴롱으로 내려가 보려고 합니다. 아무리 자기들 수상이란 양반한테 명령을 받았어도 남의 나라 장군 말을 듣는 건 자존심 상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꽤 높으신 분이 직접 행차해줘야 불만이 덜하겠죠.”
“···차라리 해군장관을 보내는 게 어떤가.”
“트레빌 제독 말입니까? 에이, 걱정마십쇼. 제가 내려간다고 해서 그 동안 무슨 일 생기겠습니까? 미라보 의장님도 이렇게 정정하구만.”
영국의 제안.
“자네는 영국을 믿나? 그 섬나라 해적들을?”
“···글쎄요. 정확하게는 그 치들이 얻을 이익을 믿는 거죠. 굶주린 들개한테 뼈다귀를 던져주는 건, 그 개가 나 대신 그 뼈를 뜯어 먹을 걸 알기 때문 아닙니까. 아마 뼈에 붙은 살점을 다 발라먹기 전까지는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뼈에 붙은 살코기가 다 떨어지면?”
“둘 중 하나죠. 그 전에 길들이거나, 달려들 때 몽둥이로 두들겨 패던가.”
“적어도 허무맹랑한 생각은 아니라 다행이로군.”
앞으로의 정세.
“난 10년 넘게 그 칙칙한 땅에서 살았다네. 의회라는 것도 배우고, 헌법이라는 것도 배우면서 말이야.”
“그렇습니까?”
“내 머리로 입헌군주제니 헌법이니 하는 그 모든 걸 창조할 능력은 없네. 그저··· 이미 만들어져 있는 시스템을 가져올 뿐이지. 난 루소 선생이나 디드로 선생 같이 거창한 학설이라거나, 위대한 이론 같은 걸 만들어 낼 만큼 똑똑하지는 않아서 말이야.”
주의할 것 등.
미라보 의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자네는 다르지. 안 그런가 기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와 다르다고.”
이 아저씨가 진짜 갈 때가 됐나? 왜 자꾸 이상한 소리지.
“내가 열다섯에 뭘 했는 줄 아나?”
“저야 모르죠.”
“왕 앞에서 찬송가나 부르고 있었네. 오~ 위대하신 루이시여. 이 프랑스와 백성들을 영광으로 이끄소서~.”
그런 애송이가 커서 왕을 날려버렸다니. 이거 원.
미라보는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열다섯의 자네는? 무려 이 파리에서 점포를 낸 우수한 사업가였네. 그것도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런 사업.
자네에게는 능력이 있어. 창조라는 능력!”
미라보는 내 손을 덥썩 잡고,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왜, 왜 이러십니까!”
“그 창조성으로, 이 나라를, 국민을, 혁명을 지켜준다고 약속해주게.”
***
프랑스 혁명왕국, 툴루즈.
국민방위대 서남부 지역사령부.
[러시아 제국의 공세 임박. 각 지역사령관들은 유사시를 대비할 것.] [국민방위대 사령관, 라파예트 질베르 뒤 모티에.]국민방위대 서남부 지역사령관은 이마에 또르르 흐르는 땀방울을 옷깃으로 닦아낸 후, 손에 쥔 비밀명령문을 펄럭이며 입을 열었다.
“이야 이거 십년 감수했구만 그래. 하마터면 큰 일 날 뻔했어!! 안 그런가 부관?”
“그러게나 말입니다, 장군님.”
“크헬헬헬!!”
“으히히히!!”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한참을 웃어넘겼다.
“다시 그 지옥 같은 파리로 가나봐라. 난! 아주 그냥! 변방에서 남 눈치 안보고! 떵떵거리면서 살 거야!”
“암요, 암요! 장군님 말씀이 맞습니다!”
“내가 제대할 때 부관을 무조건 중앙에 장군감이라고 추천해주겠네. 자네처럼 매 처사에 밝은 사람이 있어야, 군대가 굴러가지 않겠나!”
“그럼요, 그럼요! 장군님 말씀이 맞습니다!”
“참으로 애석해! 내 일찍 자네 같은 사람을 만났다면 지금보다는 덜 늙었을 텐데.
다부 그 깐깐쟁이, 큼큼. 실수. 전 참모장, 니콜라 다부 중령도 참 좋은 인물이고 군인이지만은, 사람마다 맞는 사람이 있고 안 맞는 사람이 있지 않나.”
전직 낭시 지역사령관, 현 서남부 지역사령관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는 부관에게 포도주를 손수 따라주며 말했다.
방어와 요새화의 천재.
프로이센의 대적자.
낭시의 수호자이자 혁명의 수호자.
시발. 원해서 딴 거면 모르겠다. 원해서 딴 거면.
살려고 발버둥 치다보니 우연히도 얻은 이 개 같은 명성 때문에 평생을 라파예트 그 놈 밑에서 썩을 뻔 하지 않았나.
– 뒤무리에 장군. 계속 낭시 지역사령관을 맡아주시겠지요?
– 내가 미쳤다고 최전선에···!! 큼큼, 아아! 소관이 10년만 젊었다면 라파예트 사령관 각하의 명을 따랐을 테지만 이 몸이 늙고 늙어 그 말을 따르기 어렵습니다. 통촉하여주시옵소서!
– 흐음… 낭시 주민들도 사령관의 연임을 원하던데. 정말 생각 없으십니까?
– 쿨럭! 쿨럭! 지병이 또!
–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라파예트 그 놈.
자기도 항장인 뒤무리에가 최전선 실전부대를 쥐고 있는 꼴이 마음에 안 들 텐데, 그런 검은 속내를 숨기고 마치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하는 꼴이라니.
– 어디로 배치되길 원하십니까?
– 소관은 파리에서 멀리, 저 머어어얼리 있는 변방을 지키고 싶사옵니다.
– 예전 보직인 낭트(영불해협 근처, 영국과의 최전선)는 어떻습니까?
– 머어어어어얼리 있는 변방.
– 그러면 그르노블(신성로마제국과의 최전선)?
– 툴루즈! 툴루즈! 스페인! 북 피레네! 거기 말고 안 갈 거요!
적어도 같은 부르봉 왕가인 스페인과의 최후방이라면 앞으로 전쟁이라던가, 전쟁이라던가, 전쟁 같은 위험천만한 일에는 엮이지 않을 테지.
“자, 자! 부관! 어서 나가서 오늘 파티에 오실 숙녀 분들을 모셔오게! 오늘은 이 혁명의 수호자, 뒤무리에의 무용담과 함께 아아아주 성대하게 열 테니 많이들 모셔오는 게 좋을 것이야!”
“예! 장군님!”
그래. 뭐, 러시아면 몰라도 스페인이 설마 프랑스를 때리겠나? 농담도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