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olution is also a business RAW novel - Chapter (253)
세상은 오늘도 평화롭다? (5)
옛날에 어디서 봤는데. 미국 문학은 자유를 위해 죽고, 러시아 문학은 그냥 죽고, 프랑스 문학은 사랑을 위해 죽는다고 했었지.
그 말이 참 맞는 말 같다.
–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은 다르다! 따라서 창부와 몸 잠깐 섞은 건 바람이 아니다!
– 엥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한국이었다면 대가리가 깨질 법한 소리에도 이런 반응이 나오는 만큼 사랑이란 감정과 단어에 민감한 이 땅은 내게 ‘신혼’이라는 무적의 방패를 쥐게 해주었다.
“각하, 재무부에서 사람이 왔는데···.”
“재무부에서 왜요?”
“당기 회계분석을 각하께서 해주시면 참 좋을 것 같다고…”
“그건 재무총감이 해야지 그걸 왜 나한테 맡깁니까?”
“에이. 좀 해주시죠. 하루만 써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저 지금 신혼인데 당신들 뒤치다꺼리에 귀한 하루를 써달라고요?”
“아이고. 그러면 일찍 일찍 들어가셔야죠.”
“저, 각하?”
“신혼이라 시간 없습니다.”
“아유 그랬죠 참. 죄송합니다.”
평소에 눈치도 없이 계속 내 문지방을 들락날락거리던 공무원들도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젠장. 애초에 난 민간인이라고. 왜 나한테 자꾸 나랏일을 못 시켜서 안달인데?
특히나 재무부 이 인간들이 제일 악질이다.
자꾸 쳐들어와서 ‘아이고, 각하! 저희가 야근하며 함께 쌓았던 정은 다 없어진 겁니까? 아이고오!’-하면서 드러눕는데, 이거 골때리단 말이야.
게다가 현 재무총감 그 인간도 날 무슨 램프의 지니로 생각하고 있는 건지 계속 자기 이름으로 나한테 서류를 보낸다.
물론 그 양반도 내가 반독점법 같은 어메이징한 일거리를 던져버렸으니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판. 아마 골머리를 싸매고 일감폭탄을 던진 날 원망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이제 난 모든 속박과 굴레를 벗어던지고 당분간 프랑스에서 떠나있을 예정. 미안하지만 열심히 뺑이치시길. 핫핫핫.
“잘 다녀오십쇼. 사장님.”
“저 없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닌데요 뭘.”
믿음직스러운 부하직원들에게 짬, 아니. 일을 맡기고 떠나는 여행이라니.
나와 폴린은 손수건을 흔들어주며 마차에 올라 그대로 지중해를 향해 나아갔다.
파리에서 마르세유까지 일주일.
마르세유 항에 가까워질 때마다 비릿한 항구 특유의 냄새가 코로 들어온다.
여행가는 날 특유의 업된 기분 때문일까, 아직 배에 타지도 않았는데 벌써 기분이 날아갈 듯 했다.
항구에 도착하자, 미리 준비해놨던 특급 여객선이 우릴 맞이하고 순풍을 받아 출항. 아름다운 지중해 햇살을 맞으며 우린 아미고의 나라 스페인으로···.
“가야 했을 텐데?”
왜? 어째서?
황당함에 머리를 쓸어내리는 내게 선장이 다가왔다.
“스페인 해운국에서 당분간 프랑스 국적 배를 입항시키지 않겠답니다.”
“왜, 아니. 진짜 왜요?”
“저희야 모르지요. 저희가 외교관도 아니고 남의 나라 높으신 분들 머릿속을 어찌 알겠습니까.”
“돌겠네.”
“차라리 오스만부터 가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콘스탄티노플과 아테네 관광이 끝날 때쯤이면 아마 수 달은 지나있을 테니 봉쇄가 풀렸을지도 모릅니다.”
오스만이라. 오스만이라면 지금 같은 일은 안 겪겠지.
그도 그럴게. 오스만은 우리 프랑스의 주요 동맹국이자 우호국이었다.
걸핏하면 ‘야 땅 내놔. 돈도 내놔.’-라고 협박하는 퉁퉁이 러시아.
그런 골목대장에게 허구한 날 맞고 다니는 노진구 오스만.
두들겨 맞은 노진구 오스만은 이를 북북 갈며 복수를 꿈꾸고, 유럽산 신무기를 들여와 벌크업을 하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럽을 통틀어 이슬람 국가라곤 자기뿐이니 가는 곳마다 찬밥 신세. 도라에몽 없는 노진구 꼴이었다.
그 와중 유일하게 ‘기독교 문명의 배신자’ 소릴 감수하면서 무기를 팔아주는 이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유럽의 중국 프랑스.
4차원 미래주머니 대신 술-탄의 블랙 카드를 미친 듯이 긁어주는 프랑스 군수산업의 든든한 고객님 오스만.
게다가 유사시에 러시아라는 잠재적 적국의 뒤통수를 후려칠 빠따…까지는 아니고 막대기를 얻게 된 프랑스.
윈윈하게 된 두 국가는 내친김에 동맹까지 체결했고, 그 동맹은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주요했다.
“하아.”
나는 짧게 탄식하며 폴린을 돌아보았다.
“난 아무거나 괜찮아요. 순서가 어떻던 어차피 다 돌아봤을 곳인데 뭐.”
“네가 그렇다면야.”
“그러면 콘스탄티노플로 향하겠습니다.”
“바로 직항인가요?”
“아니요. 식량과 식수 때문에 중간에 스미르나(Smyrna)에 기항할 겁니다. 오스만에서 둘째가는 대항구지요.”
그래 뭐. 꿩 대신 닭이라는 말도 있잖아.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곧 지중해에서 2주 정도를 보내게 되었다.
***
로맨틱하고 사랑 넘치는 호화 선상에서의 2주.
중간중간에 이탈리아 반도나 북아프리카, 몰타에서 신선한 재료를 공수해주니까 밥도 나름 괜찮았고.
비록 씻을 때 물양을 조절해야 한다는 게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19세기치고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그래? 난 완전 좋았는데! 히히.”
“그러면 다행이네.”
“어머어머, 오빠 저거 좀 봐요! 터번이야, 터번!”
“그러게. 확실히 외국 온 느낌이 나네.”
유럽이야 어딜 가나 밀가루 팍팍 뿌린 허연 가발에 정장이지만, 길가는 오스만인들의 모습은 어떻게 보든지 유럽인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이제 좀 여행 온 거 같네.
그 뭐냐, 인천공항에서 비행기 타고 외국 공항에서 내리면 앞에 외국인 쫙 나올 때 ‘아 내가 외국에 왔구나.’-하고 실감이 나지 않나. 딱 그런 느낌이다.
이제 우리는 지중해를 가로질러 흑해 앞, 스미르나라는 오스만 항구에 입항하고 있었다.
퉁-하고 부두에 배가 정박하자, 곧 오스만 쪽 공무원 몇몇이 배에 올라 선장에게 뭐라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선장님, 저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예? 아, 그냥 제 신분하고 항해 목적, 그리고 타고 있는 승객이 몇 명인지 물어봤습니다.”
“아. 난 또 별거라고.”
으레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내가 뒤로 빠지려 할 때, 한 오스만인이 내게 다가왔다.
“헤이, 당신도 프랑스인?”
“예? 아, 예. 맞습니다. 프랑스인.”
“이 배. 굉장히, 굉장히 크다. 맞습니까?”
글쎄다. 예전에 전열함 타본 거 생각하면 그닥 크진 않은 거 같은데.
“뭐어, 크다면 크겠죠. 근데 왜 그러시나요?”
오스만인은 길게 기른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내게 말했다.
“그런데 당신 포함 승객이 둘? 많이 수상하다.”
“에헤이, 선생님. 제 손님께 그러지 마시고 저랑 얘기하시죠!”
“선장. 난 지금 공무집행 중이다. 당신 원하는가? 입항 거부?”
“아이고. 선생님 그게 아니고오…”
저자세로 나오는 선장의 모습에 오스만인은 한껏 어깨에 뽕이 차올랐는지 거드름을 피웠다.
“선장. 당신 왜 이렇게 귀찮게 나오나? 이 배, 혹시 밀수선인가?”
“밀수선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나리!”
“그래? 어이 승객 당신. 이름 뭔지 알려 달라.”
누구? 나?
“···제 이름이요?”
“그렇다.”
으음. 뭔가 일이 좀 꼬이는 거 같은데…
“오빠 왜 그래? 그냥 말ㅎ··· 읍읍읍!”
“음? 부인에게 무슨 일 있나? 당신 왜 그러나?”
“하하하, 부인이 아까부터 멀미 중이라 속이 좀 안 좋은가 봅니다. 아이 그러니까 내가 그만 좀 먹으라고 했잖아.”
“읍읍읍!”
나는 폴린의 입을 틀어막으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실명을 말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인 척 하는 게 나을까.
일단 실명을 말하면… 으음.
···예전에 후임이 한 번 민통선에서 근무하다가 러닝 입고 산책하는 할아버지를 본 적 있었다.
후임은 ‘저 양반 왜 자꾸 군사시설 앞에서 알짱거리지?’- 하다가 도저히 호기심을 못 이겨 할아버지를 불러 세운 뒤 신분증을 요구했고,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시며 찬란한 별이 박혀있는 공무원증을 내미셨다고 한다.
그러자 그 즉시 BOQ숙소에서 사랑해요 욘애가중계를 보던 대대장이 뛰쳐나와 그분을 인솔해갔었지 아마.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반강제적으로 콘스탄티노플에 끌려가 ‘마 함 무바라 디진다 아이가!’-하는 술탄에게 술 한 잔 받는 그림 밖에 안 나온다.
게다가 콘스탄티노플에 있을 우리 프랑스 외교관들이 나라는 기연을 가만 놔두겠는가?
딱 봐도 여기저기 행사에 날 대민지원 나온 군인들마냥 부려 먹을 게 뻔하다.
아직도 미국에서 탈레랑 그 인간한테 당한 것만 생각하면 치가 떨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파리와 그 밖 간의 정보격차를 줄이는 것이다.
술탄의 궁정에 끌려가 산해진미를 대접받으면서도 과연 내가 필요한 만큼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까.
이 19세기는 아직 언론의 자유니, 출판의 자유니 하는 건 존재하지도 않는 세상이다.
21세기에서도 기자와 신문사는 시민들의 조롱 1순위인데 과연 이 시대는 어떨까.
궁정에서 얼마나 많은 신문을 사 읽던, 아니면 고관들에게 뽀찌를 찔러주고 이야기를 듣던 술탄이 함구령을 내리거나 현장에서 쉬쉬한다면 결코 들을 수 없는 내용이 있을 거다.
그렇다면 일단 신분을 숨기는 게 맞겠지. 굳이 안 일으켜도 되는 소란을 일으킬 건덕지는 없는 게 좋다.
“제 이름은.”
“이름은?”
“기욤 보나파르트입니다.”
“읍읍읍?”
폴린이 무슨 소릴하냐는 듯 눈을 치켜뜨고 버둥거렸다.
내가 미안해.
“기욤… 보나파르트라… 출신은?”
“코르시카입니다.”
“으브븝븝!”
“흐음.”
오스만인은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상하다. 당신.”
“에이 수상하긴요.”
나는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속에 든 금화를 한 움 큼 쥐어 오스만인의 넓은 소매 안으로 들이밀었다.
“어, 어?”
“선생님. 저는 코르시카 출신 기욤 보나파르트고, 이쪽은 제 아내. 폴린 보나파르트입니다. 여행목적은 신혼여행 겸 사업차 방문했습니다. 하핫.”
“큼. 큼. 기욤 보나파르트라.”
오스만인은 혹여나 누가 볼까 주위를 몇 차례 두리번거렸다.
아저씨, 내가 주위에 누가 있는데도 그럴 바보로 보여? 편히 넣어두라니까.
“기욤 보나파르트. 역시나 훌륭한 동맹국 시민답다. 당신이 오스만제국에서 좋은 시간 보내길 바란다.”
그는 내가 준 금화를 쏜살같이 주머니에 털어 넣고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캬, 어떻게 된 게 저 덥수룩한 수염 너머로 헤벌쭉 웃는 게 보이지? 역시 금은 위대하다. 만국공통어가 바디랭귀지라고? 응 아니야.
진정한 만국공통어는 바로 이 찬란히 빛나는 금이시다.
오스만인은 선장에게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비로소 스미르나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어어. 다친다. 프랑스인. 천천히 내려가라. 천천히.”
“하하 걱정 감사합니다.”
윈윈이다. 나도 VIP가 되고 싶지 않고, 저 오스만인도 갑자기 외국 VIP를 영접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읍읍읍!”
“나중에 나중에 알려줄게. 지금은 조오용히 해야 돼?”
“푸하! ···오빠 진짜 사실대로 말 해줘. 안 그러면 나 화낼 거야.”
어, 음. 어. 그럴 수 있도록 고려하는 걸 생각해볼게.
나는 폴린을 놓아주고 예의 오스만인에게 다시 물었다.
“선생님?”
“음? 무슨 일인가 프랑스인?”
“혹시 이 스미르나에서 잘나가는 상품 있습니까? 특산물 말입니다. 특산물.”
원래 현지답사는 그 고장의 특징부터 파악해야 하는 법. 특산물을 하나 꿰면 줄줄이 소세지처럼 그 지역을 파악할 수 있다.
“흐음. 특산물… 아! 하나 있다. 오스만 최고, 최대 특산물!”
“오. 그게 뭡니까?”
오스만인은 해맑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아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