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olution is also a business RAW novel - Chapter (301)
잘 어울리는 이웃 (6)
말발굽이 딱딱한 돌바닥을 디딜 때마다 고요한 거리에 유일한 소리의 파동이 생겼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국민방위대 육군 준장. 프랑수아 마티유.”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티유 장군님.”
아무리 타국군이라도 장군은 장군. 교양 있는 귀족이라면 존중해야 할 대상이다.
덕분에 격식 차린 말처럼 제국군 장교는 군모를 들어 예를 표했지만, 눈에선 시퍼런 살기를 뿜어냈다.
‘살벌하구만.’
마티유는 군모를 들어 인사를 받아준 뒤 되물었다.
“중령? 아니. 대령인가?”
“중령입니다. 장군님.”
“그렇군.”
“장군님. 지금 장군님과 장군님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신성로마제국의 정당한 반란 진압에 중대한 차질을 빚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전 불가피하게 제국의회를 대신해 행정권을 행사하고 있는 최고전쟁의회에게 행정관 권한을 위임받은 현장지휘관으로서 장군님의 행동이 심각한 내정 간섭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마티유는 턱을 한 번 쓸어내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중령? 한 가지 묻고 싶네만.”
“하십시오.”
“귀관은 군인인가?”
“?”
제국군 장교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왜 묻는단 말인가? 군복을 입고, 계급도 있으면 그게 군인이지.
“그렇습니다.”
“그런가. ···중령, 미안하지만 하나 더 물어봐도 되겠나?”
“그러십시오.”
“귀관은 군인의 본분이 뭐라고 생각하나?”
“충성입니다.”
“누구에게?”
“카이저 폐하와 그분이 이끄시는 최고전쟁의회에 충성합니다.”
“난 시민에게 충성한다네.”
“장군님, 저들은 시민이 아닙니다! 황은을 저버린 폭도들이란 말입니다!”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우리 프랑스 공화국 헌법에는 ‘불복종’이란 말도 있고, ‘저항권’이란 말도 있어서 말이지.”
“장군님. 지금이라도 군을 물리십쇼!!”
“싫어. 이 살인귀 새끼들아.”
“비키라고!!”
“좆까. 이 새애끼가 뭘 잘했다고 바락바락 지랄이야 지랄이.”
내정간섭? 외교? 몰라 시발. 기욤 그 새끼가 알아서 다 해주겠지 뭐.
생각해보니 좆같다. 애초에 이러라고 보낸 거 아닌가.
마티유는 검집에서 검을 뽑은 뒤, 검면을 옆으로 눕혀 제국군 장교를 겨누었다.
“민간인이나 처죽여대는 새끼들이 어딜 군인이랍시고 꺼드럭거려?”
“이, 이 빌어처먹을 개구리 새끼가-”
“명예도 모르는 새끼들. 니놈들은 군인이 아니라 군대놀이하는 마적 떼일 뿐이야.”
마티유는 검을 높이 들었다.
***
“으…으윽…”
한스는 감겼던 눈을 부스스 떴다. 분명히 전장 한복판에 있었던 거 같은데, 여긴 어디지.
가지도 덜 친 나무로 대강 만들었지만 한스가 누워 있는 건 침대라고 부를 만했고, 밑에 흰 아마천도 깔려 있었다.
“뭐야, 이 친구 정신이 들었나? 좀 더 자는 게 나았을 텐데.”
“누, 누구십니까?”
“누구긴. 보면 몰라?”
한스는 잘 떠지지 않는 눈으로 자기 앞에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을 훑었다.
흰 가운에, 외알 안경에, 톱도 들고 있고…
···톱?
“다리! 내 다리!!”
“허허 괜찮아 괜찮아. 아직 잘 붙어 있어.”
“난, 난 안 자를 거야!! 안 자를 거라고!!”
“얼씨구. 이 친구 아주 발작을 하네? 걱정 마 자넨 안 잘라.”
“정, 정말요?”
“그럼!”
프랑스인 군의관은 허허롭게 웃으면서 말했다.
“지지기만 할 거야.”
“···예? 에아으아아아악!!”
“허허, 이번엔 진짜 발작을 하네.”
인두로 사정없이 종아리를 지져댄 군의관은 눈이 반쯤 돌아간 한스의 입에 술병을 가져다 댔다.
“마셔. 제정신이면 힘들걸.”
“고, 고맙, 고맙습니, 케하아아악!”
살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군의관은 기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 운이 아주 좋았어. 파편이 뼈까지 들어갔으면 무릎 밑으로 싹 잘랐어야 했는데, 근육층까지만 들어갔다고. 평소에 성당 열심히 다녔나 봐?”
“흐에. 흐에에엑…”
“허허, 젊은 친구가 엄살은.”
군의관은 숨을 헐떡이는 한스에게 목발을 건네주었다.
“한 달은 목발 짚고 생활해. 안 그러면 평생 절름발이로 살 수도 있어. 알겠나?”
“예, 예…”
“좋아. 잘 알아들으니까 좋구만. 난 환자가 많아서 이만 나가보겠네. 푹 쉬어.”
“그, 저기.”
“음? 왜?”
“여긴 야전병원 아닙니까? 제가 여기 어떻게 온 거죠?”
“우리 병사 하나가 업고 왔던데?”
“···예?”
한스는 잠시 멍하게 앉아 있다가, 목발을 짚고 일어나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 어. 이 친구야. 벌써 그렇게 움직이면 못써!”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스는 절뚝절뚝 걸어 나갔다.
야전병원은 도시 외곽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지어진 저택을 터로 삼은 탓에, 조금만 나아가면 트리어의 정경이 눈에 담겼다.
도시는 아직 전쟁 중이었다.
폭음이 터지고, 총성이 울리고, 피리소리, 북소리가 만드는 낯선 리듬 사이로 누군가 생의 마지막 힘을 짜내 지른 비명이 자그맣게 메아리쳤다.
도시는 피난 중이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미리 대피시킨 노약자들이, 프랑스인들이 밀가루를 옮기기 위해 가져온 수레에 타고 도시를 떠나 먼 곳으로 먼 곳으로 떠나가고 있었다.
도시는…
한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고즈넉한 저택 마당은 온통 부상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트리어를 지키겠다고 총을 꼬나쥔 시민군은 다 합쳐서 2천이 될까 말까였다. 도시 전체 인구가 3만이 채 안 되었으니까, 웬만한 장정들은 모두 뛰쳐나온 셈이다.
하지만 지금, 이 저택에 누워 신음을 흘리고 있는 시민군은 족히 수백은 되는 것 같았다.
그러면, 그러면 지금 저 도시에서 싸우고 있는 건 누구인가.
누가 한스 대신 피를 흘리고 있는 건가.
“이 친구야! 내 말 못 들었나? 평생 다리 절고 싶어?!”
목발을 짚은 한스는 자신을 쫓아온 군의관에게 다가간 뒤, 손을 잡고 북받치는 감정 때문에 턱턱 막혀오는 입을 열어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있었는지도 없었는지도 모르는 자그마한 도시를 위해 싸워주셔서.
***
“온다! 온다!”
한 부사관이 헐레벌떡 뛰어와 미끄러지듯 코너를 돌자, 군화와 군복이 바닥에 쓸리며 촤르륵! 하는 소리를 냈다.
“바로 온다! 준비해!!”
“탄종 포도탄! 포도탄 장전!!”
곧 그를 뒤쫓아온 제국군이 코너를 돌자, 프랑스군은 미리 준비해놓은 전장포에 불붙은 심지를 가져다 댔다.
“쏴!”
– 쾅!
영거리에서 포가 적중하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작은 포탄에 맞은 적들의 몸이 산산이 비산했다.
“포병 뒤로! 총검 앞으로!”
“총검 준비!!”
그르릉-소리와 함께 포병들이 전장포를 뒤로 빼내 장전하고, 보병들이 앞으로 나와 방진을 형성한 뒤, 마저 돌아들어오는 제국군의 배에 총검을 쑤셔 박았다.
“도미니케! 대가리 숙여!”
“옙!”
총검을 빼내는 병사들의 뒤에 선 부사관들이 권총을 뽑았다.
– 타앙!
부사관들이 뽑은 권총이 미처 제압하지 못한 제국군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상사님! 놈들이 더 밀려옵니다! 중대 규몹니다!”
“야! 포병!”
“제 시간 내에 장전 못 합니다! 포신이 너무 뜨거워서 지금 화약을 넣으면 폭발할 겁니다!”
“좋아, 퇴각하자! 줄 건 줘! 이 길목 하나 준다고 큰일 안 난다!”
부사관은 포병이 들고 있는 불붙은 심지를 빼앗아 허리춤에 있는, 천가지 따위를 꽂아놓은 술병에 불을 붙인 뒤, 적들이 들어오던 길목 한가운데 던져버렸다.
– 쨍그랑!
화염병이 깨지고 안에 든 알코올과 인화물질을 따라 화염이 작은 골목을 활활 태워버리기 시작했다.
트리어 시민군이 쌓아 올린 바리케이드가 훌륭한 장작이 되어주리라.
“이쯤이면 적어도 10분은 벌 수 있겠지. 총원 세 번째 방어선으로 이동한다!”
“상사님! 포는 망실처리 할까요?”
“야 이 새끼야. 그걸 굳이 나한테 물어봐야 해? 너 저거 10분 안에 굴리고 갈 수 있어?”
포병은 제 할 일을 톡톡히 한 전장포에게 한 번 눈길을 준 뒤, 심지 구멍에 말뚝을 박고 망치질했다.
심지 구멍이 쪼개졌다. 이제 뭣 모르는 새끼가 이 포를 쓰면 유폭으로 사지가 고향을 향해 날아가리라.
“도미니케 포슈(Dominique Foch)! 괜찮나?”
“상사님 때문에 존나 괜찮습니다!”
“개새끼 같으니! 뒈질 뻔한 거 살려줬더니 말 한번 이쁘게 하는구나! 여기서 살아남으면 내 딸이랑 결혼하는 거 어떠냐?”
“으음… 따님이 혹시 상사님 닮았습니까?”
“걱정마라. 나보다 우리 아낼 더 닮았으니까.”
“그럼 좋습니다!”
상사, 뒤프레(Dupre)는 병사들을 챙겨 서둘러 길을 나섰다.
프랑스의 아들들을 죽이기에 이 도시는 너무 작았다.
*
“마티유 장군님!”
“전황은?”
“나쁩니다. 허구한 날 프로이센 놈들한테 후장이 따이는 오스트리아 새끼들이지만 수가 너무 많습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 시민들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놈들을 이 도시에 가둬야 해.”
“알겠습니다!”
있는 힘껏 경례를 올려붙이고 지휘소를 나가는 장교의 눈동자엔 두려움 따윈 없었다.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그 믿음 하나만으로 사람은 신화 속에 나오는 그리스 영웅들처럼 용기를 가진다.
그러나 마티유는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도시 지도를 쳐다보았다.
3만의 민간인들, 2천의 프랑스군, 거기에 프랑스인 상인들과 짐꾼들의 목숨이 마티유의 손에 달려있었다.
용기와는 별개로, 거의 4만에 달하는 목숨을 등에 짊어지게 되면 책임감이 가슴을 옥죈다.
‘지금까지는 훌륭하다.’
하지만 부족하다.
교량을 끊고, 건물을 무너뜨리고, 불을 일으켜 진입로를 차단한다.
차단된 진입로는 제국군으로 하여금 프랑스군이 이 악물고 지키는 곳으로 들어오게 만들었다.
시가지는 방어자의 천국.
골목을 넘어갈 때마다 1개 소대를 잡아 먹었다.
대로를 넘을 때마다 1개 중대를 잡아먹었다.
프랑스군은 마치 늪지대에 사는 거머리마냥 도시로 깊숙이, 깊숙이 들어오는 제국군의 피를 쪽쪽 빨아먹고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밀린다.
프랑스군과 시민군이 감제하는 구역은 지금도 하나씩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앞으로 반나절. 그 정도만 버티면 된다.
그쯤이야 버틴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밖에서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
밤이 찾아왔다.
공격자에게도, 방어자에게도 밤은 똑같이 찾아왔다.
그 흔한 담뱃불 하나조차 이 피비린내로 목욕을 한 소도시에선 찾아볼 수 없다.
조그마한 불빛은 곧 과녁판이나 다름없다.
공격자도, 방어자도 철저히 등화관제(燈火管制)를 지키며 칠흑 같은 어둠에 숨어들었다.
어느 무너진 건물에선 숨을 죽이고 있던 프랑스군과 제국군이 총검과 단검을 가지고 육박전을 펼쳤다.
어느 골목에선 보이지도 않는데, 대충 감으로 어디 있겠지 싶어 쏜 포탄에 누군가의 몸이 찢어져 나뒹굴었다.
원시적인, 원초적인 육감이 잘 벼린 칼처럼 목표물을 탐지한다.
그러다 달빛이, 잠시 구름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면.
“돌격 앞으로오오!!”
“라이히여, 합스부르크여 영원하라!!”
“일제사격 준비! 발사!!”
“공화국 만세!!”
다시 피가 흩뿌려졌다.
***
“난 시발. 할 거 다 했어.”
“그래 그래. 잘 알고 있네.”
“기욤 그 새끼. 파리에 가면 뒤졌어.”
“그래 그래. 안 그래도 기욤 그 친구가 한 대, 아니. 두 대는 기꺼이 맞아준다더군.”
“두 대는 좀 아쉬운데. ···바톤 넘겨줘도 되지? 우리 애들, 다 탈진했을 거야.”
“그럼! 당연하고 말고!”
칠흑 같은 어둠 속.
그보다 더 새까만 검은색 깃이 달린 투구를 쓴 에마누엘 드 그루시는 애마의 고삐를 세게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