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olution is also a business RAW novel - Chapter (403)
외전 -3-
능력 있는 관료진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계속 그 자리에 앉혀놓고 뽑아먹는 것.
정치인에게는 곧 유능의 척도이다.
– 에마누엘 시에예스 저(著), >전후 프랑스 정치의 생태와 이해> 중 발췌 –
***
프랑스 공화국 외교부는 공화정부 수립 이래 가장 거센 외풍에 휘말렸다.
상주 대사란 상주 대사는 밀려오는 질문 세례에 이곳저곳 불려가기 바빴고 외교관들은 ‘기욤이 미쳐서 공화국을 폐지하고 제정을 선언한 뒤 스스로 황관을 썼다더라!’-같은 헛소문이 퍼지는 걸 막기 위해 잠도 제대로 못 잔 채로 온 사방팔방을 누비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사태를 만든 당사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오징어? 해파리? 여하튼 연체동물에 가까운 상태로 흐물흐물해져선 흐리멍텅한 눈을 한 채로 힘없이 운을 뗐다.
“이런 순 없습니다. 이거 다 거짓말입니다, 거짓말.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제 슬슬 현실을 받아들일 때가 되지 않았나?
언제까지고 저 일 잘하는 허연 소를 흐물거리는 슬라임인 채로 놔둘 순 없는 일.
“우린 분명히 수락했네. 근데 세상이 싫다는데 어쩌나?”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토닥여주자 슬라임은 흐릿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두 분이 다시 한번 국민들을 설득해보시면 되지 않을까요?”
“일없네. 지지율 박살 낼 일 있나? 그리고 만에 하나 우리가 국민들을 설득한다 한들 외국에서 저렇게 발광하는데 저쪽은 무시할 건가? 얌전히 다시 복귀하겠다고 선언하게. 자네만 넘어가면 만사형통이야.”
“···당신들.”
게슴츠레했던 슬라임의 눈이 몇 차례 꿈뻑이더니, 갑자기 불이 붙어 활활 타올랐다.
“당신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다 알고 있었지?!!”
“허허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어쩐지 날 너무 쉽게 놔준다 했어, 당신들이 그럴 리가 없는데!”
“이제 알았나? 알았으면 그만 단념하고 복귀하게.”
킷사마아아아!!!
*
아프다.
얼얼하다.
믿었던 시에예스, 로베스피에르마저 날 사람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말이나 소로 보는 게 분명하다.
너무 슬프다. 너무 억울하다.
누가 인수인계 안 한다고 했냐고. 어차피 레일은 다 깔아놨고 착착 계획대로 실행만 하면 되는데 선장 좀 바뀐다고 배가 가라앉을 리는 없잖나.
내가 이걸 어디 가서 토로하겠나. 나는 K-회사원의 비기인 ‘부하직원 데리고 술 마시기’를 시전 할 수밖에 없었다. 결코 내가 꼰대가 되어서 그런 게 아니다.
“뭐, 별 상관있습니까? 그냥 때려치시죠.”
“술 먹자고 끌고 왔다고 반항하시는 겁니까?”
“그놈의 통령 일 때문에 지금 회삿일의 반이 사장님 손이 아니라 제 손에서 끝난단 말입니다. 저도 처자식 좀 보고 살면 안 되겠습니까?”
젠장. 가족 얘길 하니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전쟁도 끝났고, 앞으로 이 세상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계획도 다 세워놓으셨고. 사장님은 할 만큼 하셨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여간 난리가 아니던데-”
“사장님.”
얼굴이 벌게진 그는 머릴 탁자에 닿을락 말락 하면서도 입을 멈추지 않았다.
“언제까지 남을 위해서만 사시렵니까. 이제 좀 이기적으로 사세요.”
“거 참.”
이기적으로 살라, 라.
“판에서 빠지기엔 내가 판을 너무 키워놓은 것 같은데.”
“자꾸 그렇게 재시다간 정말 늙어 죽을 때까지 거기 앉아계실 겁니다.”
“젠장.”
한잔 크게 따라 바로 들이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답답한 마음은 후련하게 뚫리긴커녕 고구마에 닭가슴살을 얹어 한 술 크게 뜬 것 마냥 퍽퍽해져만 갔다.
차라리 내가 싸패, 소시오패스면 오히려 쉽게 답이 나왔을지도 모르겠지만 소시민 중의 소시민인 나는 결국 답을 내지 못한 채 술만 퍼먹고 다음 날 깨질 거 같은 머리로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커피 대신 냉수 한 컵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가라앉히자, 어젯밤 답을 내지 못했던 질문이 슬그머니 다시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 하나만 기밀레~ 기밀레~ 하고 울면 이 세상 모두가 다 행복해지는 건가.
아니면 플로리앙의 말마따나 내가 너무 호구처럼 구는 건가.
모르겠다. 내가 무슨 불세출의 초인도 아니고 만기를 친람하는 신도 아니고.
내가 유일하게 아는 건, 이렇게 온 세상이 내 퇴임을 결사반대하는 이상 설령 내가 내려온다고 마음을 먹는다 한들 쉽지 않을 거란 거.
“빌어먹을.”
나는 냉수를 한 잔 더 비우고 오늘 아침 따끈따끈하게 배달된 새 서류를 잡았다.
최소한 일할 땐 잡생각이 안 나니까.
“···근데 이건 또 뭐야.”
방첩사에서 올린 시크릿 파일을 주워 들고 밀랍 봉인을 뜯은 나는 나도 모르게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
‘아아악!!’
‘이게 무슨 소란인가!’
‘관군입니다! 관군이 화약을 묻어 성벽을 통째로 무너뜨렸습니다!’
‘부원수를 불러라! 군병을 수습하고 반격해야 한다!’
‘이미 늦었습니다! 대원수님이라도 어서 피신하십시오!’
‘한 무리의 장이 어찌 도망한단 말인가!’
‘지금 죽으면 개죽음입니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지나도 늦지 않으니 부디 대원수께선 우리의 목숨을 허투루 쓰게 하지 마십시오!’
‘저 멀리 호국(胡國, 청나라)을 넘으면 국왕이 없는 색목인 나라가 있다고 합니다. 그 나라를 이끄는 승상은 구휼과 활빈의 제도에 진심이라 하니, 우리의 사정을 설명하면 필시 불쌍히 여겨 원병을 보내줄 것입니다!’
‘가세요, 어서!’
끔찍한 차별로 더러워진 세상을 다시 한번 열어보려 한 평서 대원수.
그리고 동지들을 방패 삼아 살아남은 도망자.
“으, 으으… 커헉!”
불란서(佛蘭西, 프랑스)에 있는 유일한 조선인, 홍경래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수마에서 깨어났다.
수년 전 일이건만 몽중(夢中)에선 어찌 이리도 생생하단 말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머리맡에 둔 냉수 한 사발을 들어, 한 방울도 남기지 않은 채 들이킨 그는 속으로 수천 번, 수만 번 되뇌었던 다짐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동지들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 수는 없다.’
비명으로 가득 찬 정주성을 뒤로한 채, 압록강을 건너 청으로.
청에서 수없이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천축국(인도)로.
또다시 세 개의 드넓은 바다를 건너 불란서로.
몸은 앙상해지고 목은 쉬어버렸으며 하얗던 도포 자락은 땟국물에 바래버렸지만
두 눈만큼은 태양보다도 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가 아무리 굳건한들, 현실의 벽은 때로 그조차 비웃을 정도로 높고 단단한 법.
아직 K-머시기가 나오지 않은 19세기 초 유럽인들에게 극동에서 온 외국인, 심지어 입고 있는 옷조차 추레하기 그지없는데, 말까지 통하지 않는 외국인은 불법체류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따라서 홍경래는 현재 좋게 말해서 밀입국자, 나쁘게 말하면 스파이로 의심되어 구금된 상태.
그가 구금된 곳이 무려 지난 전쟁 당시 숱하게 간첩을 때려잡았던 방첩사령부 구치감이라는 것만 해도 취급을 알만하리라.
“그래서 어디 사람이라고?”
“그, 코레? 코리? 여하튼 중국 옆에 있는 극동 쪽 나라 같습니다.”
“경찰은 뭐라나?”
“내국인이면 모를까, 외국인 밀입국자는 간첩 잡는 방첩사 관할 아니냐고 합니다. 간첩이 아닌 걸로 판명되면 그때 넘기라고-”
“이봐, 부관.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도 없는 동양인이 어떻게 간첩 활동을 한단 말이야?”
“저도 말해봤습니다만, 대중에게 점수 따긴커녕 귀찮기만 한 일이라 내무부 쪽에서도 시큰둥해하는 것 같습니다…”
에마누엘 드 그루시 방첩사령관은 애지중지하는 콧수염을 푸르르 떨었다.
“장군님? 왜 그러십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네.”
그루시의 말에 부관이 눈을 빛냈다.
그 누구도 아닌 그루시 아닌가. 프랑스 기병대의 역사를 새로 쓴 위대한 기병 지휘관! 역전의 용사!
영원히 프랑스군 교보재에서 단골로 등장할 이 위대한 군인이라면 필시 평범한 사람은 꿈도 못 꿀 심모원려가 있을 것이다!
그런 기대를 받는 그루시의 머릿속은 다음과 같았다.
‘야전야전야전야전데스크워크는이제싫어말이나타고놀래그루시는이런거몰라그루시는진급보다승마가더중요해-’
대장 진급으로 향하는 로열 로드인 보직이라 넙죽 받았지만, 방첩사령관 임명 후 반년이 지나자 천상 말박이인 그루시는 반쯤 미쳐버리고 말았다.
“이보게 부관.”
“예, 장군님.”
“생각해보니 이건 국가 중대사야. 나 같은 일개 군인이 함부로 결정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예?”
고개를 갸웃하는 부관의 앞으로 그루시가 머릴 들이밀었다.
부담스럽다.
“우리 프랑스는 인권을 보장하는 나라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생각해보게 이건 기회야. 저 외국인이 간첩이든 아니면 표류자든 간에, 한 가지 확실한 건 저 자의 나라와 우리 프랑스 간에 좋은 우호관계를 수립할 기회란 걸세.”
저 동양 외국인에게 좋은 대접을 해준다.
-> 외국인이 집에 돌아간 뒤, 프랑스에 대한 좋은 소문과 우호 여론을 일으킨다.
-> 프랑스인들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무역로를 연다.
-> Profit!
원래대로라면 천상 군바리 그루시에겐 그런 고등적인 사고가 불가능했지만, 본래 사람은 일할 때보다 놀 궁리할 때 지능이 수십 배로 올라가는 법.
숱한 데스크 워크로 뇌세포가 반 정도 녹아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어떡해서든 잡무를 누군가에게 떠넘기고 싶다는 마음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들었다.
“따라서 부관. 내가 무언가 처분을 내리기 위해서라면 상급자의 명령이 있어야한다는 게 내 결론일세.”
“상급자,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그루시는 위풍당당하게 선언했다.
“통령 집무실로 보내자고.”
이런 귀찮은 일은 당연히 권한이 제일 높은 사람에게 짬 때리는··· 아니지, 양보해야 하는 법 아닌가.
물론 그 권한 높은 당사자의 의사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
“죽일까?”
“하하, 농담이 살벌하십니다.”
“······.”
“농담··· 맞지요?”
“······.”
내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행정부 보좌관인 프랑수아 기조의 눈이 흔들렸다.
“···그래, 농담일세.”
“하, 하하. 식겁했습니다.”
좋아. 그루시의 십이경락과 기경팔맥을 비틀어 주화입마에 들게 만드는 건 약간 뒤로 미루자.
나는 파일을 들고 다시 읽어 내려갔다.
“이름은 키엥레-홍. 중국 옆 코레에서 왔다고.”
“그렇습니다.”
“정보는 더 없나?”
“죄송합니다.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어서…”
확실히 한국말, 아니 조선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시대 프랑스엔 없겠지.
“내가 알기로 어느 정도 알파벳을 공유하는 우리 유럽처럼, 동양도 대부분 중국 문자를 공유한다더군. 동인도 회사에서 중국 쪽 업무를 담당하던 관련자를 찾으면 말로 소통은 어려울지라도 필담은 가능할지 모르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그래. 결과 나오면 바로 보고해주게.”
“예, 각하.”
기조가 집무실에서 나간 뒤, 나는 잠깐 책상을 톡톡 두드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를 한 잔 내리고, 커튼을 걷자 선선한 공기 위로 따듯한 햇살이 사뿐하게 내려앉고, 그 아래로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가며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키엥레-홍, 홍경래. 코레, 조선, 한국.’
후릅-하고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생각했다.
딱히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 그런 걸 생각한 건 아니다.
그런 건 이미 이 땅에 태어나고 옹알이할 적에 충분히 궁구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질문은 잘 모르겠지만 나 같은 케이스는 그보다 훨씬 쉬운 문제 아닌가.
과연 전생의 기억, 미래치트 없이 1771년생 기욤이 이 자리까지 올라설 수 있었을까?
단언컨대 아니다.
후자는 결코 전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이미 난 스스로 성형수술 한번 하고 개명도 한번 한 셈 친지 오래였다.
그러니 내가 저 멀리 극동의 반도에 가지는 감상은 대충··· 재외교포가 가지는 그것,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사람이 가지는 그것과 비슷한 무엇이었다.
···아니, 그보단 좀 더 큰가?
“밖에 누구 있나?”
“예, 각하.”
“통역이 갖춰지는 대로 방첩사에 구금돼 있다는 그 동양인을 만날 계획이니 준비해 놓게.”
“예, 각하.”
여하튼. 크고 작음은 몰라도, 적어도 고향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은 같았다.
겸사겸사 희미해졌던 은퇴각도 다시 세울 수 있을 것 같고.
***
“그게 참말이오?”
“Oui.”
통역을 맡은 서양인은 종이에 쓰인 홍경래의 질문 밑에 맞다는 뜻의 한문을 덧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참으로 고맙소! 역시 불란서는 듣던 대로 군자국이오!”
홍경래가 눈물로 축축해진 손을 뻗어 서양인의 손을 마주 잡자, 서양인은 잠시 움찔했다가 이내 그것이 좋은 뜻으로 한 행동임을 알아채곤 웃었다.
그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잠시 후 경첩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리곤 몇몇 인영이 가스등으로 환한 방첩사령부 취조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떤가?”
“무슈 홍은 코레, 그러니까 조선이라 불리는 극동에서 온 사람이 맞습니다.”
“극동에서 여기까지 무슨 이유로 왔는지는 모르고?”
“그게-”
통역은 잠시 뭐라 말을 전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슈 홍은 몇 년 전 조선에서 인민들을 이끌고 혁명을 일으켰지만, 끝내 정부군에게 진압당한 혁명가입니다.”
“혁명가?”
“예, 무슈 홍의 말로는 그렇습니다.”
통령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질문했다.
“반란이 진압됐는데, 반란 주동자란 사람이 이렇게 살아서 지구를 반 바퀴 돌아왔다고?”
“아무래도 지난 전쟁 때 영국인들이 중국 앞바다를 헤집어 놓은 탓 같습니다.”
몇 년 전, 호레이쇼 넬슨과 왕립 해군은 청나라 해안 도시를 공격해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히고 재산을 약탈했다.
“문제는 수세에 몰린 중국이 동맹국인 조선에 해군 함대 지원을 요청했고, 그 요청에 응한 조선 해군 주력이 그대로 넬슨에게 녹아버렸다는 겁니다.”
“그렇게 조선 정부의 힘이 빠져버린 탓에 진압군이 반란군을 완벽하게 소탕하지 못했다는 거군.”
“일단은 그렇게 추정됩니다.”
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감사합니다 각하.”
“그럼 이제 우리 무슈 홍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여기에 왔는지, 그리고 왜 하필 날 만나고 싶어 하는지를 파악해야겠군요.”
“바로 통역하면 되겠습니까?”
“부탁합니다.”
통령은 문을 열고 들어가 실로 오랜만에, 그러나 이 몸으로는 처음 보게 된 한복을 입은 남성과 마주 앉았다.
*
“반갑습니다. 프랑스 공화국 통령, 기욤 드 툴롱입니다.”
내가 먼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하자, 홍경래는 망극하다는 듯 고개를 나보다 배는 숙였다.
그와 동시에 통역의 손이 빠르게 하얀 노트를 먹물로 채워나갔다.
“실로 망극한 일입니다. 어찌 일국의 승상께서 먼저 인사를 하십니까. 소인은 그저 비루한 홍모입니다.”
“조선에서 오셨다지요.”
“그렇습니다. 승상께서는 조선을 아십니까?”
그럼요 알지요.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
“하하, 그저 이씨 성을 가진 왕가가 지배하는 나라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겠지요. 이런 만리타향까지 정확하고 상세한 정보가 오고 가기란 어려운 일이니···.”
홍경래는 잠시 침묵했다가, 속에 품고 있던 무언가를 언어로 정제해 토해냈다.
그의 눈이 번들거렸다.
“승상, 세 개의 대해를 지나 저 멀리 동쪽에 있는 조선이란 땅에 있는 모든 이는 왕가의 핍박과 수탈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지방관과 수령은 부패한 세가와 결탁해 관직을 사고, 그 값을 벌충하기 위해 만백성을 노예처럼 부리고, 무능한 왕은 구중궁궐에 들어앉아 아무런 조치조차 취하지 않고 있지요.
놈들이 마시는 술은 천 백성의 피고, 옥쟁반에 담긴 고기는 만 백성의 기름이며.
놈들이 밤마다 켜는 촛대서 흘러내리는 촛농은 백성의 눈물이고, 손으로 켜는 악기는 백성의 비명과 원성을 틀어막고 있습니다.
승상, 이 홍모의 말이, 심정이 이해되십니까?”
아 이해되다마다요. 역사책에서 너무 많이 봤거든.
나는 그런 속내는 감추고, 그를 향해 몸을 살짝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무슈 홍은, 제가 군대를 파병하길 원하시는 겁니까?”
“···그렇소이다.”
홍경래의 머리가 염치없다는 듯 한치 내려갔다.
“이 홍모는 뜻 맞는 동지들을 모아 북녘땅에서 혁명을 일으켰소. 구정물처럼 더러운 세상을 갈아엎고 새 하늘을 열기 위해.
···수년을 준비했고, 또 수년을 기다린 끝에 얻은 기회였지. 허나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 우리의 뜻과 의기는 왕이 있는 한양 도성은커녕 평안도라는 지방을 넘지 못했소.
그러나 불란서는. 청나라 오랑캐 황제의 군대조차 어린아이 상대하듯 농락한 영길리인들을 물리친 강병을 지닌 나라라고 들었소. 동시에 대의와 관대함 또한 지닌 나라말이오.”
“그러니 내가 군을 파병해 귀국 정부를 전복시키고 공화국을 건설해달라 이 말씀입니까?”
“그렇소.”
“흠.”
난 턱을 괴고 잠깐 머리를 굴렸다.
군을 저 멀리 한반도에 파병해? 미친 소리.
뭐, 나폴레옹이 키운 대육군이 세도정치로 개판이 되고 있을 조선군을 못 조진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근데 수만 킬로를 넘어서 보급은 누가 해주지? 우리가 무슨 마공을 익힌 마인들도 아니고 영국인들도 아닌데 현지에서 약탈을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잘 되면 물론 아시아에 친불 국가 하나 생기는 좋은 일이지만… 지금 홍경래가 왜 민란을 일으켰나? 당연히 살기 좆같아서 아닌가.
어떤 미사여구를 붙이든 군대는 폭력의 수단이고 폭력에 익숙한 집단이다. 이역만리에서 말도 안 통하는데 하하호호 즐겁게 민사작전에 성공하리란 생각은 안 하는 게 좋다.
결국 깽판 쳐서 친불 국가를 만들어봤자, 악에 받친 사람들이 가만 있겠나? 민란이 두 배로 터지겠지.
그러면 프랑스는 아시아에 영원히 영향력을 잃어버린다.
난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무슈 홍. 파병은 해드릴 수 없겠습니다.”
“···아.”
“다만.”
멍해진 홍경래가 이어지는 내 말에 다시 정신줄을 잡았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수가 아주 없진 않은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두 번째 혁명은 성공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왜 홍경래가 실패했는가.
조선인들이 세상에 느끼는 울분과 분노, 즉, 좆같음의 정도는 혁명하기 딱 충분하다.
그러나 홍경래에게는 저 사람들을 따르게 할 아젠다가 없다.
작금의 한반도를 지배하는 저 사회이념을 대체할 신박한 물건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세계 최고의 도덕국,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 혁명의 전파자이자 수호자, 바로 이 프랑스 공화국이 나서야 하지 않겠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옆에 기립해 있던 보좌관, 기조에게 말했다.
“로베스피에르, 그리고 시에예스 당수를 부르게.”
“연유는 뭐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글쎄. ···후학 좀 가르쳐볼 생각 없냐고 해보게. 먼 극동에 자유의 횃불을 놓을 생각 없냐고.”
“예, 각하.”
“또 중국에서 온 외교관 있지? 무슈 임이던가? 풀네임이 임칙서?”
“맞습니다.”
“그 사람도 한번 노려봐. 원래 고위공무원 시험 통과한 학자라면서? 한림학사인가 뭔가. 적당히 서양 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일으키면서 꼬셔보게. 원래 펜대들은 궁금한 거 있으면 못 참는 법이거든.”
기조는 잠시 골똘히 뭘 생각하더니 무언가 말하려고 하다가 주변에 즐비한 사람들을 보곤 도로 입을 닫았다.
대신 그는 반쯤 눈을 뜨고 날 캐묻듯 바라보았다.
···어. 네가 맞아. 나만 일하긴 싫어서 그래. 기왕 죽을 거 로베스피에르고 나발이고 다 같이 과로사해보자고.
“그리고 말이야.”
“···예에.”
“이번처럼 국제적 공조가 필요할 때마다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일을 진행하는 게 좀… 그렇지 않나?”
기조의 눈이 또다시 반쯤 감겼다.
“아무래도··· 국제협력을 위한 국제기구를 만들고 내가 그 장으로 취임하는 게 좋은 듯 싶군.”
“지금 도망가시는 겁니까?”
“어허 이 사람. 큰일 날 소리 하는군. 도망은 무슨 도망?
하지만··· 한 국가의 장이 국제기구의 장까지 겸임하는 건, 형평성과 공정성에 어긋나겠군. 암. 그럼. 그렇고말고.”
기조의 닫힌 입 안에서 뿌득하는 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뭐 기분 탓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