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olution is also a business RAW novel - Chapter (98)
빛나거나 미치거나 (2)
“지금은 군인의 신분이 아니지만, 총감 각하께서는 사관학교를 졸업하시고 소위에 임관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얘기를 더 끌 이유가 없겠군요. 이걸 받아주십시오, 각하.”
“이건 뭔가요?”
“직접 읽어보시면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각하.”
“아, 예에…”
젊은 검은 머리 육군 장교는 내게 돌돌 만 두루마리를 턱-하고 건네주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세상에 평소에도 제식대로, 그것도 칼각에 맞춰 척척 걸어 다니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대체 어떤 원리로 그게 가능한 거지. 아니면 뇌세포 하나하나가 모두 그윽한 짬냄새에 중독된 나머지 개조된 건가.
그나저나 뒤무리에, 그 수구꼴통 왕당파 대장이 보냈다는 이 두루마리. 대체 정체가 뭐람?
우리 포브스의 인기 주제인 ‘라부아지에의 끝내주는 과학적 농사법 vol.21’ 같은 건 아닐 거 아냐.
설마 백지전향서인가? 아니지. 그 꼴통이 전향은 무슨.
그러면 뭐 모월 모일에 뒷골목으로 따라오라는 결투장이라도 되는 건가. 그 편이 더 설득력이 높긴 한데 말이야.
“어이 취객 나리. 여기 엎어져 있지 말고 저리 좀 비켜봐.”
“으히히히… 내가 이젠 대령이다 마…”
“아 쫌.”
다 마신 포도주 병의 목을 손에 쥔 채로 탁자에 엎어져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는 나폴레옹을 옆으로 치우고, 나는 두루마리에 묶인 실을 풀어냈다.
“뭐야 지도네?”
그런데 지도가 좀… 이상하다? 일반적인 지도 아닌 것 같은데 이거?
“···이거 군사용 지도잖아?”
***
화창한 날씨.
짹짹 지저귀며 하늘을 유유히 날아가는 새들.
그리고 한 잔의 포도주에 루소의 소설을 더하면.
“이게 바로, 인생이지.”
프랑스 왕국 국민의회 외교부 장관 르브렁(Charles-François Lebrun)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기댔다.
아 이 얼마나 편한 삶인가.
“물론 권력에는 다소 떨어져 있긴 하지만… 아차차 아니지.”
며칠 전 잠시 방문했었던 국민의회가 잠시 떠오른 르브렁은 말하다 말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 어이 왕당파 꼴통 귀족나으리, 며칠 전에 나한테 맞은 당신네 의원 턱주가리한테 나대지 말라는 말 못 들었나?
– 뭐? 이 교양 없는 평민 빨갱이새끼! 감히 우릴 모욕해! 결투다!
– 좋지! 권총 들고 후원으로 나와라, 니 꼴통 면상에 납탄을 박아주지.
– 하? 누가 할 소릴!
뭐랄까… 결투가 신사의 덕목이긴 하지만 모름지기 나라의 정책을 정하는 의원들이라면 조금 자제해야하지 않을까 싶은 르브렁이었다.
그리고 국민방위대는 뭐가 그렇게 할 일이 많은지, 참모부실 창문에 달린 촛불은 며칠 째 꺼질 기미도 보이지 않고 타오르고 있었다.
그 라파예트 사령관이 손수 직접 커피를 내려 참모부 장교들에게 돌리는 바람에, 그 누구도 커피를 거부하지 못하고 일만 주구장창 한다는 소문이 베르사유 안에서 파다했다.
또 다른 소문으로는 기욤 재무총감이 파리에서 데려온 한 중년 여성 요리사가, 매일 호박파이를 몇 접시씩 구워서 참모부에 돌리고 있다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국민방위대 건물을 용무 차 방문한 한 외교부 직원에 의해 어느 정도는 사실로 검증된 소문이었다.
– 참모부 사람들은 미쳤습니다! 호박파이와 같이 나온 커피를 모두 마시면 다시 호박파이에 커피가 나온다구요! 아침은 호박파이에 커피, 점심은 커피에 호박파이, 저녁은 호박커피에 파이! 프랑스인이 어떻게 그러고 살 수 있습니까?!
아무튼 그렇게 베르사유 곳곳이 권총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와 호박파이에 커피를 들이키는 소리로 가득 찬 와중에도 외교부는 아~~무런 간섭도, 딱히 이렇다 할 견제나 비판도 받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 오직 외교부만이 이 험난한 베르사유에서 평온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평온을 지킨다는 건 곧, 권력의 핵심에서 떨어져 있다는 뜻이기도 했고.
하긴 외교부에 누가 신경을 쓰겠나.
누구랑 전쟁을 할 것도 아니고 조약을 채결할 것도 아닌데 말이다.
외교부 장관으로서의 일도 가끔씩 타국 공사들과 ‘하하호호’하면서 으레 있던 사교활동 뿐.
누가 장관 자리에 앉던 상관없는 외교부는 이미 국내 정치에 눈이 먼 왕당파던 혁명파던 의원들의 뇌리에서 잊힌 지 오래였다.
덕분에 오늘도 르브렁은 맑은 7월의 하늘을 느긋하게 감상할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똑똑
“음? 지금 딱히 날 찾을 만한 일이 있었나? 누군지는 몰라도 들어와도 좋습니다.”
르브렁은 외교부 장관실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곤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장관님, 지금 시간 괜찮으십니까?”
르브렁 또한 얼굴을 익히 알고 있는 외교부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와 정중히 물었다.
“물론 괜찮다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게… 신성로마제국 공사께서 장관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아니 오스트리아 인들이 갑자기 왜 날 보고자 한다던가?”
외교관이라면 본디 약속과 일정의 화신들이다. 그런데 그런 족속들이 남의 약속이나 일정을 싸그리 다 무시하고 대관절 갑자기 얼굴을 내민다고?
상당히 이상하군.
“···공사는 지금 어디 있나?”
“일단 응접실에 모셔놨습니다.”
“알겠네, 자네는 일 보게나. 내 한 번 공사를 만나봐야겠어.”
“예, 장관님.”
***
“플로리몽 클로드 공사.”
“아. 안녕하십니까, 르브렁 장관.”
두 외교관은 서로 악수를 나누곤 응접실 의자에 앉았다.
“일단 약속도 없이 이렇게 외교적 결례를 범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장관.”
“아닙니다. 공사. 그렇게까지 말 안하셔도 됩니다.”
생활의 연장은 정치고, 사교의 연장은 외교라 했던가.
으레 사교가 그렇듯이, 두 사람은 개인적인 말을 여럿 주고받기 시작했다.
아내가 새로 장신구를 장만했는데 괜찮았다니, 어디 오페라가 듣기가 좋았다니, 이번 바스티유 함락 1주년 기념 샹 드 마르스 광장 축제에서 일약 유명인사로 떠오른 본 태생의 젊은 음악가에 대한 이야기라 던지.
그 후로도 한참이나 이어지던 외교적 수사를 끊은 건 르브렁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베르사유까지 찾아오셨습니까?”
“아 그건 말입니다.”
플로리몽 클로드 공사는 숨을 잠시 들이쉬곤 품 안에서 르브렁 장관을 향해 한 장의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이번에 카이저께서 우리 주재 프랑스 공사관에 내리신 조칙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지요.”
“···프랑스 왕국은 선황 요제프 2세 시절 비준한 일부 ‘불평등’한 동맹조약에 대한 철회와 알자스-로렌에 위치한 일부 독일 봉건영주들의 침해된 권리를 보장할 것-이라니, 아니 지금 장난하시는 겁니까?”
칼만 안 들었지 이게 무슨 강도짓인가.
불평등한 동맹?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에 걸쳐 제 놈들의 쓸데없는 영토전쟁에 우리 프랑스를 끌어들일 때는 언제고, 불평등한 동맹관계는 무슨.
“애초에 알자스-로렌은 우리 프랑스 땅이지, 결코 신성로마제국의 땅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로렌 지역에 위치한 우리 제국 변경작들의 영지가 있는 것도 맞지 않습니까. 그 자들의 권리가 저번에 프랑스에서 의결한 ㄱ···.”
“봉건적 권리 폐지는 우리 프랑스 인민을 대표하는 국민의회가 의결한 내용이며 이는 절대 철회할 수 없습니다!”
르브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플로리몽 공사를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저희도 이렇게 말해드려야겠군요. 프랑스 왕국과 신성로마제국, 상호 간의 불가침조약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뭐라고요?”
“프로이센의 국왕과 우리 제국의 카이저께서 필니츠에서 같이 의결한 내용입니다.”
미간을 찌푸리는 르브렁에게, 플로리몽 클로드 공사는 또 다른 종이를 품 안에서 꺼내 내밀었다.
“···필니츠 선언?”
르브렁은 종이 꼭대기에 쓰인 활자를 읽어 내렸다.
“이번에 본에서 큰 일이 일어났던 건 아시겠지요, 장관님.”
플로리몽 공사의 말에 르브렁의 눈가가 움찔했다.
국가 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예민한 외교관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일 아니겠나.
‘본 폭동’.
다른 말로는 ‘본 혁명’.
전자는 왕당파와 귀족들이 부르는, 후자는 먹물 먹은 지식인들과 민중들이 부르는 이름.
카이저의 아들, 카를 루트비히 대공이 제국중앙군을 몰고 가 본의 자유시민 -다르게 말한다면 공화주의자- 들에게 납탄과 총검을 퍼부어 준 사건.
“···신성로마제국 본에서 일어났던 일이라면 우리 프랑스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공사님.”
“하지만 군주들께서는 뭐랄까요… 굉장히 신경이 많이 가시나 봅니다. 아무래도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모습이 본 사태 이곳저곳에서 섭섭잖게 찾아볼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 해도, 이건 죄 없는 자에게 가시관을 씌우는 것과 똑같은 꼴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사님.”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군주들께서는 확답을 원하십니다. 혁명을 수출하지 않고, 제국 변경작들의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답 말입니다.”
공사의 말에, 르브렁은 아무 말 없이 턱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의회에 일단 안건을 올릴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우리 제국과 프랑스 왕국이 이번 일을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르브렁의 단란했던 하루가, 지옥으로 변하고 있었다.
***
프랑스 왕국 외교장관 르브렁이 주재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공사 플로리몽과 만나기 약 2주전.
1790년 7월 중순.
프로이센 드레스덴.
필니츠 성.
“한낱 평민들이 왕을 겁박하고 의회를 만들질 않나,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짐 또한 빌헬름 국왕의 말에 동의하오. 알렉산드르 황태자는 어떻소?”
“···글쎄요. 하하.”
– 나, 신성로마제국의 카이저 레오폴트 2세는 프랑스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일련의 무질서함과 우리 독일인들이 가진 권리에 대한 침해가 이번 선언으로 인해 극복되리라 믿는다.
– 프로이센의 국왕인 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또한 동의하는 바이오.
– 스웨덴의 국왕인 나, 구스타프 3세 또한 두 군주의 말에 동의합니다.
– 러시아의 황태자인 나, 알렉산드르 또한 동의합니다.
– 봉신들의 권리를 위해 힘쓰는 카이저 폐하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황태자 전하 만세! 프로이센, 스웨덴의 국왕 만세! 만세! 만세!
네 나라의 군주가 필니츠에 모여 결의했다.
첫째. 프랑스는 혁명을 수출하지 않을 것.
둘째. 침해되고 있는 제국 변경작들의 권리를 다시 보장할 것.
“···이게 과연 옳은 판단인지… 소관은 잘 모르겠습니다. 대공 전하.”
“하하, 장군은 걱정마세요. 단순한 구두 경고 아닙니까. 그리고 겨우 조그마한 영지에 관한 내용인데요.”
카를 대공은, 어딘가 께름칙하다는 듯 입을 연 라제츠키 장군의 말을 웃어넘기며 말했다.
제국 내 불순분자는 모두 걷어낸 지 오래.
그러나 위정자들은 본 사태 이후 다들 마음 한켠에 천인공노할 공화주의자들이 국가 내에 암약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프랑스가 혁명을 수출하지 않고, 침해된 독일인들의 권리를 돌려놓는다는 약속만 한다면 별 일이 일어나겠나.
프랑스가 미치지 않고서는 이 나라들과 1 대 다로 전쟁을 걸 생각은 못할 테다.
그래. 미치지 않고서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