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iting Filmography RAW novel - Chapter 225
225화. 에필로그
2019년 1월.
한 영화가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 개봉했다.
한국에서는 개봉 5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엄청난 인기를 누린 이 작품은, 범죄 스릴러 장르에 대한 색다른 해석으로 흥행과 별개로 작품성으로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반면 미국에서의 반응은 다소 아쉬웠다.
개봉 첫 주 차에 박스오피스 5위권에도 들지 못하며, 할리우드 자본이 투입되지 않은 순수 한국 영화의 한계를 보여 줄 것처럼 보였다.
입소문을 타기 전까지는 말이다.
개봉 1주 차 이후 몇몇 할리우드 스타들이 SNS를 통해 후기를 남기며 입소문이 퍼졌고, 이에 힘입어 2주 차에 처음으로 전미 박스오피스 1위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게 됐다.
이후로는 승승장구였다.
JP스튜디오가 유통을 맡았지만 할리우드 자본이 투자되지 않은 작품이고, 상대적으로 손익 분기점이 낮았기에 그만큼 수익이 불어났다.
한국에서는 개봉 41일 차에 1000만 관객 돌파했고, 최종적으로 135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미국에서도 최종적으로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흥행을 기록하며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마케팅조차 할리우드 영화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음에도 입소문과 작품성만으로 일궈낸 성과이기에 더욱 뜻깊었다.
언론 시사회 당시 감독이 밝혔던, 한국 영화가 미국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겠다는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다가온 5월.
해당 작품은 황금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대됐다.
그리고 2위상인 그랑프리상과 남우주연상, 그리고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3관왕 자리에 오르는 쾌거를 누렸다.
색다른 시선으로 범죄 스릴러 장르를 재해석했으며, 주연 배우의 열연이 돋보였으며, 기자 역할을 맡은 조연 배우가 신 스틸러로 방점을 찍은 영화라는 게 황금영화제에서 해당 영화가 받은 평가였다.
『흔적』.
박의준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안시현과 김진모가 주연을 맡았으며, 일찌감치 조연을 자청했던 손해수가 신 스틸러로 좋은 연기를 보여 준 영화.
이를 통해 박의준 감독은 입종작인 『90일』을 통해 이루지 못했던 황금영화제 수상의 영광을 안았으며, 안시현은 두 번째 남우주연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손해수 또한 남우조연상을 받으며 제주도에서 자신이 했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그렇게 『흔적』을 통해 혁혁한 성과를 내고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귀국하는 비행기 안.
“시현이 너, 이제 뭐 할 거냐?”
“흐음…….”
앞으로 뭘 할 생각이냐는 김진모의 질문에 안시현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위장취업』 이후 곧장 『흔적』을 준비했고, 2년이 지나 황금영화제 3관왕으로 보답받았다. 뿐만 아니라 순수 한국 자본으로 만들어진 한국 영화가 미국에서도 통한다는 걸 입증했다.
이쯤 되면 당초 김진모의 제안을 받아들일 당시의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데뷔 20주년인데 팬미팅이라도 할까 싶네. 그거 말고는 별생각이 없어. 아마 올해는 연기를 쉬지 않을까 싶은데. 진모 너는?”
“은근슬쩍 합동 팬미팅 제안해 봅니다, 고객님.”
“나야 좋지. 그거 말고는 너도 쉬려고?”
“그러지 않을까 싶은데. 20년 동안 열심히 달렸으니 조금 쉬어 갈 때도 됐잖아.”
어느새 안시현과 김진모는 데뷔 20년 차가 됐다.
이제는 선배에게 인사를 하는 것보다 후배에게 인사를 받는 게 익숙해졌고, 더 이상 두 사람의 연기력에 대해 의심하는 시선은 없어졌다.
최고의 배우를 이야기할 때면 빼놓지 않고 언급될 정도로 입지가 상승했고, 연기 열정은 여전하지만 다작을 할 필요성 자체는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 두 사람 다 『흔적』을 준비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보니 심신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흔적』은 무려 11개월을 촬영하며 극한으로 완성도를 끌어올린 작품이니까.
토시 하나, 사소한 제스처까지도 만족스러울 때까지 촬영을 거듭했다.
덕분에 황금영화제 3관왕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할 수 있었지만, 출연한 배우의 입장에서는 피로감이 짙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안시현과 김진모는 합동 팬미팅 이후 휴식을 취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 기간이 언제까지일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타난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카메라 앞에 설 것이라는 것.
* * *
2019년 하반기.
안시현에 대한 기사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안시현이 의도적으로 언론에 노출되는 걸 피한 채 휴식에 전념했고, 뭔가를 준비한다는 소문만 무성하지 자세한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JM액터스에 문의해도 휴식 후 복귀할 것이라는 원론적인 답변을 내놓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2019년이 지나고, 2020년이 됐다.
1월 1일.
JM액터스는 김희숙 작가와 대본을 집필하고 최창국이 연출을 맡으며, 김진모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의 제작 및 공개 오디션 일정을 발표했다.
여기서 안시현의 이름이 언급됐다. 배우로서 출연하는 게 아닌, 공개 오디션 심사위원 자격으로 말이다.
대중들이 원하는 건 심사위원이 아닌 배우 안시현이지만, 안시현은 인터뷰를 통해 2020년 내에 복귀할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부분은 안시현이 재충전을 위한 휴식 후 작품에 들어갈 거라고 예상할 뿐, 정확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김진모와 최정수와 박정상, 그리고 매니저인 하정남과 가족들을 제외하면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시현이 철저하게 자신의 행보를 숨겼으니까.
2월 말.
예정대로 김희숙 작가의 신작 공개 오디션이 열렸고, 안시현은 1500명 가까이 참가한 오디션 심사를 보느라 며칠 동안 지겹도록 연기를 봐야만 했다.
안시현은 그 시간을 즐겼다.
수많은 배우들의 연기를 감상하는 건 안시현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해 줬다. 특히나 몇몇 배우들의 연기에서는 배울 점 또한 있었기에 단순히 심사에서 그치지 않는 모습까지 보여 줬다.
그렇게 5일 동안 진행된 공개 오디션은, 이제 마지막 참가자만을 남겨 두게 됐다.
“후우. 드디어 마지막이네요.”
“그러게요.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마지막 참가자는 여주인공 유소진의 아역 역에 지원했습니다.”
“음. 유소진 아역에 지원한 배우 중에 괜찮은 배우가 없었는데, 이번 배우는 부디 기대치를 충족해 줬으면 좋겠네요.”
마지막 참가자의 프로필을 보며 안시현이 무덤덤하게 속삭였다.
“전 마지막 참가자한테는 0점 줄게요.”
“0점이요?”
“갑자기 왜…… 아!”
안시현의 말을 들은 이들이 다급히 프로필을 살폈고, 그제야 안시현이 0점을 주겠다고 한 이유를 깨달았다.
마지막 참가자의 이름은 안라온.
바로 안시현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흔적』과 관련된 스케줄을 마무리한 이후, 안시현은 라온이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위장취업』의 언론 시사회를 기점으로 배우가 되고 싶다는 뜻을 드러냈던 라온이는, 몇 년째 꾸준히 연기 공부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이에 안시현은 최선을 다해 라온이를 가르쳤다.
기본적으로 연기 재능이 뛰어난 편이고, 배움에 열정적이기도 했기에 가르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 전.
“아빠, 나 오디션 한번 나가 보려고.”
“오디션? 좋지.”
라온이가 오디션에 참가하겠다고 뜻을 밝히자, 안시현은 흔쾌히 동의했다
“지금부터 착실하게 경험을 쌓으면 성인이 됐을 때 너만의 연기를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작품은 정했고?”
“응. 정했어.”
“뭔데? 아빠가 대본 한번만 봐도 될까?”
“흐응…… 싫어. 비밀로 할래.”
“왜?”
“그게 더 재밌을 것 같으니까. 에헤헤.”
오디션에 참여할 것이라고만 말한 채 어떤 작품인지는 말해 주지 않은 라온이는 홀로 오디션을 준비했다.
설마 그 작품이 안시현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하고, 김희숙 작가가 대본을 집필한 드라마일 줄이야.
라온이가 작품 이름을 말해 주지 않은 이유를, 그게 더 재밌을 거라고 말한 게 무슨 뜻인지 안시현은 마지막 참가자의 프로필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라온이가 왜 여기서 나와?’
당황하는 것도 잠시.
안시현은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딸아이가 오디션을 준비한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이 작품인 줄은 저도 전혀 몰랐네요. 방금 말씀드렸던 대로 전 0점 주겠습니다.”
“괜찮겠어요?”
“네. 냉정하게 평가를 내리기 어려우니 0점을 주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라온이도 그걸 감안하고서 이 오디션에 참가한 걸 테고요.”
안시현은 라온이를 상대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플지 않을 딸아이를 평가하다 보면 팔이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렇기에 아예 평가를 포기했다.
그러는 편이 라온이가 합격하더라도 뒷말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심사위원은 도합 6명, 안시현을 제외하면 5명이다.
만점 600점 중 100점을 상실한 상황. 다른 참가자들을 압도하지 않는 한 라온이의 합격이 어려워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라온이는 여주인공 유소진의 아역 역에 지원한 배우들 중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안시현이 0점을 줬음에도 연기로 압도한 것이다.
오디션이 모두 끝난 뒤, 너저분하게 늘어진 프로필을 정리하며 김희숙 작가가 중얼거렸다.
“왜 0점을 주나 했더니, 합격할 거라는 자신이 있어서 그런 거였군요.”
“네. 제가 직접 가르쳤으니까요.”
“와. 재수 없는데 맞는 말이라 뭐라 반박할 수가 없네. 시현이 저 자식, 『흔적』 때문에 프랑스 다녀온 이후로 라온이 가르치는 데에 매진했거든요.”
“아역 배우들의 연기가 대체로 기대 이하여서, 제가 0점을 주더라도 합격할 거라 확신했어요.”
오디션이 끝난 뒤.
안시현은 심사위원들과 늦은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라온이와 연락하기 위해 좀처럼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로 말이다.
합격 여부를 말해 주지는 않았다.
합격은 기정사실이라고 봐야 하지만, 공식 발표가 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말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물론 안시현이 비밀로 하건 말건, 라온이는 자신이 합격했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연기를 잘했는데 떨어질 리가 없잖아.
라온이의 자신감에 안시현이 피식 웃었다.
“자신감 넘치는 거 보니까 내 딸 맞네.”
식사를 끝내고 JM액터스 사옥으로 돌아오는 길.
한 사내가 안시현의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안시현을 향해 대뜸 고개를 숙였다.
“길, 길 가로막아서 죄송합니다! 제 이야기를 딱 5분만 들어 주시면 안 될까요?”
안시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는 팬일까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팬이라면 사인이나 사진을 요청하지,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야기요?”
“거,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씀드리자면…… 안시현 배우님께서 제 작품에 투자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 진짜 대박 날 자신 있거든요? 무조건 손익 분기점 넘을 거라고 확신하거든요? 근데 아무도 제 작품에 관심이 없어요. 고민하다가 예전에 배우님께서 박의준 감독님 작품에 투자하셨던 이력을 떠올리고, 염치불구한 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시현이 사내와 시선을 마주했다.
기죽은 듯한 눈빛과 달리, 작품 이야기를 하는 사내의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에 대한 확신과 열정에 가득 차 있는 게, 마치 처음 만났을 때의 박의준 감독을 보는 것만 같았다.
“몇 살이에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데.”
“27살입니다. 대학 졸업하고 아르바이트하면서 시나리오 쓰고 있었어요.”
“그래요. 투자는 일단 시나리오 보고 나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물, 물론이죠!”
안시현이 사내와 함께 JM액터스 사옥으로 들어갔다. 커피를 사 들고서 회의실로 들어간 뒤, 사내가 챙겨 온 시나리오를 꼼꼼하게 살폈다.
몇 시간 뒤.
안시현이 시나리오를 손에 쥔 채 입을 열었다.
“이 작품, 제대로 만들려면 얼마가 필요할 거라 생각해요? 원하는 배우들의 출연료까지 포함해서요.”
“으, 으음. 제가 잘은 모르지만…… 100억 원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일단 전 안시현 배우님이 출연해 줬으면 하는데, 캐스팅 라인이야 유동적으로 변경 가능한 부분이니까요. 중요한 건 자금이죠.”
“100억 원이라…….”
금액을 들은 안시현이 10여 초 정도 고민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부담스러운 금액은 아니네요.”
“그, 그럼…….”
“네. 그 시나리오, 저랑 같이해 봐요. 『흔적』 이후로 한동안 연기를 할 생각이 없었는데, 시나리오를 보고 나니까 간만에 열정이 불타오르네요.”
『흔적』 이후, 안시현은 한 동안 휴식을 취하며 배우로서의 미래에 대해 고민한 뒤 천천히 복귀를 타진할 생각이었다.
데뷔 후 20년이 흐르며 수많은 성과를 이루어 내자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정이 줄어든 것이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역시 타고난 기질은 속일 수 없었다. 좋은 시나리오를 보고 있자니 연기하고 싶다는 욕심이 샘솟았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빨리 복귀하게 될 것 같네.’
안시현은 최정수가 지겹도록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배우는 결국 연기를 할 때 빛이 나는 존재라는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내 안시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간만에…… 다시 한번 빛나 볼까?’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