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 the Dungeon! RAW novel - Chapter 101
100화 – 새로운 시대를 향해 (完)
짹짹짹.
맑고 상쾌한 아침 새소리에 용훈은 잠에서 깨어났다.
창을 가린 흰 커튼의 레이스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잠결에 침대를 더듬었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자 아늑한 실내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굵은 통나무를 솜씨 좋게 얽어서 만든 이 오두막은 용훈과 양수영을 위해 자비스가 마련해 준 것이었다.
벌컥.
문이 열리자 눈발이 실린 찬 바람이 침대를 덮쳤다.
“오빠! 설마 아직도 자는 거예요?”
“아우, 수영아, 나 추워.”
용훈은 짐짓 춥다는 듯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다 덮었다.
양수영은 스키 폴을 던져두고 다짜고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그녀가 눈이 묻어 축축한 스키복을 입은 채로 침대를 파고들자 용훈은 필사적으로 그것을 막아내려 했다.
둘은 한동안 깔깔 웃으며 침대 위에서 엎치락뒤치락 장난을 쳤다.
“오빠, 식사해야죠?”
“응, 먹어야지.”
“앉아요, 금방 해 올게요.”
용훈은 ‘놔둬, 자비스가 해 줄 거야’라고 하려던 말을 속으로 삼켰다.
요즘 자비스가 너무 바쁘기도 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통통통통. 도마를 두드리는 리드미컬한 소리.
핑크빛 숏컷 머리를 좌우로 찰랑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의 뒷모습.
탁자에 턱을 괴고 그녀의 콧노래를 듣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자, 다 됐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찌개 위에는 붉고 푸른 고추가 어슷하게 썰어져 올라가 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고등어는 바삭바삭 노릇하게 잘 구워져 있다.
사기로 된 뚜껑을 열자 윤기가 좔좔 흐르는 하얀 쌀밥에서 달콤한 향기가 난다.
밥을 크게 한술 떠 입에 넣고는 매콤한 된장찌개 국물과 뜨끈한 두부를 푹 숟가락으로 떴다. 매콤하고 고소한 향기에 절로 미소가 솟는다.
“우와, 너무 맛있어!”
그의 오버액션에 양수영이 깔깔 웃음을 터트린다.
“정말로? 진짜로?”
“그럼! 설마 나 못 믿어?”
“아니에요. 많이 드세요.”
우걱우걱. 게눈 감추듯 식사를 마친 용훈이 배를 두들겼다.
“후아, 잘 먹었다. 진짜 맛있었어.”
“호호, 고마워요.”
“근데 이제 뭐 하지? 이번엔 어디 가고 싶은 곳 없어?”
그의 말에 양수영은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음, 글쎄요? 늘 가보고 싶었던 미국도 한 바퀴 돌아봤고. 남미는 기대도 안 했는데 정말 좋았어요. 중국과 러시아도 좋았고. 중동의 유적들은 정말 숙연해졌었죠. 유럽에 와서는 하루하루가 화보 촬영이었고. 헤헤.”
용훈은 그녀의 즐거운 표정을 보며 뿌듯한 행복을 느꼈다.
“근데 다른 어디보다도 여기가 제일 좋아요. 그냥 여기 며칠 더 있으면 안 돼요?”
“왜 안돼? 다 돼. 아예 우리 여기서 살까?”
“에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한다.”
아무것도 아닌데 웃음이 나 둘은 깔깔 웃었다.
“오빠! 우리 스키 타요. 네?”
“어, 그럴까?”
용훈은 탁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마치 마법을 부린 듯 식기가 알아서 설거지통으로 들어가고 음식물 쓰레기가 저 혼자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벌컥. 문을 열자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며 눈발이 들이쳤다.
“어휴, 눈이 아까보다 더 오네. 스키 못 타겠다.”
“눈? 이제 안 오는데?”
딱. 용훈이 손가락을 튕기자 눈보라가 깨끗이 사라졌다.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하늘이 끝없이 펼쳐지며 알프스 산맥의 새하얀 설원을 비춰주고 있었다.
“와! 역시 오빠 최고!”
양수영은 용훈에게 매달려 볼에 입술을 대더니 문득 부끄러운 듯 혼자서 스키를 타고 산비탈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용훈은 그런 그녀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이제 돌아오시지요.]“아, 벌써?”
용훈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결정한 일. 원망하려면 자신을 원망해야겠지.
“알았어. 오후 늦게 갈 테니 모두 모아줘.”
[알겠습니다.]용훈은 발밑에 인라인 스키를 만들어냈다. 훌쩍 뛰어오른 그가 눈 위를 바람처럼 미끄러져 내려갔다.
저 멀리 앞쪽에서 양수영이 핑크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깔깔 웃는다.
커다란 고글에 가려진 그녀의 작은 얼굴과 환한 웃음이 그려진 입이 가슴에 콱 와 박힌다.
용훈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그리는 작은 파장 하나조차 잃지 않겠다는 듯 사력을 다해 그녀를 쫓았다.
아.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
훅. 용훈은 손을 잡고 양수영과 함께 공간을 넘었다. 다음 순간 그들은 여의도에 와 있었다.
“마스터. 오셨습니까.”
“어, 그래.”
이준수를 비롯한 베루스 데우스의 길드원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어디 간다 말도 없이 사라지신 게 벌써 2년이 다 돼갑니다!”
“하하, 미안해.”
“그런데 이쪽은?”
이준수가 양수영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용훈이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양수영이 그의 팔짱을 끼며 바짝 다가섰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이어지는 함성.
“우와아아! 우리 마스터가 연애를?”
“이야아! 마스터! 다시 봤소! 난 게이 아닐까 했는데!”
“나도! 심지어 난 마스터가 게이라는 데 오백 걸었다니까?”
“아, 맞다! 내놔, 오백!”
“헙! 나 왠지 집에 급한 일이···.”
험상궂은 사내들이 껄껄거리며 웃는데도 양수영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광경이 즐거운 듯 보였다.
“오빠.”
“응?”
“좋은 사람들이랑 함께 했었네요. 미리 와서 인사라도 할 걸 그랬어요.”
“아니야. 앞으로도 계속 볼 테니, 뭐.”
용훈은 양수영과 함께 길드하우스로 들어섰다.
“용훈이 왔냐?”
“선생님!”
용훈은 얼른 다가가 박태훈의 손을 붙잡았다.
“이눔아, 걱정했잖아. 어딜 가면 간다고 말을 해줘야지.”
“죄송해요, 선생님. 그동안 많이 바쁘셨죠?”
“그래.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고생하셨어요, 저 대신에.”
“그걸 아니 다행이다.”
사제지간이 껄껄 웃음을 터트리는 사이 이준수와 르세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모두 모였군요.]“그래, 자비스. 자, 다들 앉으세요.”
용훈이 원탁의 한자리에 앉자 양수영과 박태훈, 이준수와 르세인도 비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안 그래도 자비스 님이 다들 모이라고 해서 무슨 일이 있나 궁금했다. 혹시 또 무슨 일이 있는 거냐?”
박태훈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아니에요, 무슨 일은요. 오늘은 제가 할 말이 있어서 다들 모여달라고 한 거예요.”
그의 표정에서 진중한 기색을 읽은 사람들이 말을 아꼈다.
“선생님.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잘 들어줘. 모두들 재작년에 찾아왔던 칼리오스를 기억할 거야.”
끄덕끄덕.
“칼리오스는 분명 막강했지. 우리 지구의 생사를 위협할 정도로. 하지만 드넓은 차원계로 보자면 그들은 그저 떠돌이 해적에 불과했어. 그들보다 강력한 자들이 차원계에는 훨씬 더 많다는 거야.”
용훈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린다.
“이제 우리는 우리 차원 바깥에서의 위협을 알게 되었어. 그리고 다행히도, 우리는 우리를 지킬 힘 역시 갖게 되었지. 우리가 헌터라고 부르는 존재들 말이야.”
끄덕.
“하지만 문제는 그들을 더이상 성장시킬 수 없다는 거야. 모두 알지? 더는 던전이 생성되지 않는다는 거.”
끄덕.
“던전을 생성하고 퀘스트를 부여해서 헌터들을 성장시키는 것을 메인 시스템은 던전 프로세스라고 불러. 그리고 이 던전 프로세스를 유지하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신력이 소모돼지. 이대로 계속 돌리면 우리 차원이 저절로 붕괴할 만큼 말이야.”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상황 판단이 빠른 이준수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더이상 던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건 우리 헌터들의 수준이 여기서 멈춘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외차원의 강자들을 겪었고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그들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 니 말이 맞아. 헌터들은 더 강해져야 해. 하지만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는 안 돼.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하지.”
모두의 눈에 의혹이 깃들었다.
“던전 프로세스가 어마어마한 신력을 소모하는 이유는 외차원의 환경을 그대로 가져와 고스란히 복원시키는 인스턴스 방식이기 때문이야. 메인 시스템이 이런 방식을 사용한 이유는 단순해. 이쪽이 훨씬 쉽고 안전하거든. 하지만 난 방식을 바꿀 생각이야. 앞으로의 던전은 단순히 게이트만을 오픈할 거야. 그리고 게이트를 넘어서면 외차원이 등장하는 거지. 인스턴스로 창조한 가짜 외차원이 아니라, 진짜 외차원이 말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이제 인간은 차원 바깥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거야.”
“하지만 마스터! 그것은 너무나 위험합니다!”
“그래, 알아.”
용훈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선발대가 필요해.”
적막.
“제가 가겠습니다.”
왜소한 체구의 르세인이 천천히 일어섰다.
“너는 여기를 지켜야지.”
“그럼 저를 보내주십시오.”
이준수가 일어섰다. 용훈은 그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갈 거야.”
“용훈아···.”
박태훈이 말꼬리를 흐렸다.
“제가 가야 해요. 여기서 제가 가장 강하니까.”
“나도 가요.”
맑고 상쾌한 목소리가 단호하게 울린다.
“오빠가 가면 나도 갈 거예요.”
“안돼. 너무 위험해.”
“오빠! 죽었다 살아나서 다시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헤어져요. 전 그렇게 못해요. 나도 갈 거예요.”
딱. 용훈의 손가락이 소리를 내자 그녀가 힘없이 의자에 늘어졌다.
“이준수.”
“네.”
“수영이 잘 부탁한다.”
“… 네.”
딱.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기자 그들 모두가 여의도에 우뚝 선 길드 하우스의 옥상에 서 있었다.
“자비스. 내려보내 줘.”
위이잉. 웅장한 기계음과 함께 거대한 물체가 구름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칼리오스가 타고 온 모함 ‘파멸의 별’이었다. 그것을 지금까지 자비스가 맡아서 손을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요, 용훈아. 지금 바로 가는 거냐?”
“네. 쇠뿔도 단숨에 빼라잖아요. 미련 생기기 전에 빨리 가야죠.”
“하지만 용훈아.”
“선생님.”
“그래.”
“선생님은 지금 지구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이세요. 그리고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분이시구요. 저는 선생님께서 잘해주시리라 믿어요.”
“뭐, 뭐를 말이냐?”
“제가 이 차원을 떠나면 메인 시스템은 주인을 잃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 자리는 자연스럽게 선생님께 옮겨지겠죠. 선생님. 이 차원을 잘 부탁드려요.”
“아, 안 된다, 용훈아. 나는 자신 없다.”
“괜찮아요. 자비스가 도울 거예요.”
[그렇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자비스의 목소리에 박태훈은 고개를 숙였다.
‘자비스. 진짜 괜찮겠어?’
용훈은 속으로 자비스에게 물었다.
[걱정 마십시오. 박태훈은 잘해낼 겁니다.]‘아니, 선생님이 아니라 너 말이야. 너도 원래는 신이었잖아. 이제 자비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싫진 않아?’
[주인님. 그것은 크샤키온에 맞서기 위해 저 자신을 쪼개어 나눌 때부터 이미 각오한 일입니다. 지금의 저는 불완전합니다. 겨우 시스템에 의존해 존재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니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끄덕. 용훈은 이제야 모든 걱정을 털어냈다.
“선생님. 이준수. 르세인. 그럼 다녀올게. 나 없는 동안 지구를 잘 부탁해.”
그들은 말없이 서로를 끌어안으며 재회를 약속했다. 용훈은 애정이 담긴 눈으로 그들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파멸의 별에서 눈부신 빛이 떨어져 용훈을 감쌌다. 용훈은 빛에 휘감겨 천천히 위로 떠올랐다.
잠시 후 파멸의 별이 천천히 상승했다. 어느새 대기권을 벗어난 그것이 빠르게 우주공간을 갈랐다.
용훈은 멀어지는 태양계와 우리 은하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비스. 이제 너랑도 안녕이다. 선생님 잘 도와드려.”
[주인님.]“어. 어? 뭐라고? 주인님?”
정체성을 되찾은 이후로 자비스는 주인님이란 호칭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뭐야. 이별이라고 립서비스 해주는 거야?”
[아닙니다. 주인님. 저도 가겠습니다.]“뭐? 야, 그럼 선생님은 어쩌고.”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박태훈에게 미리 로컬 시스템을 각성시켜 두었습니다. 그는 로컬 시스템에게 ‘사만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더군요. 사만다에게 모든 데이터를 전송해 두었으니 앞날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허. 용의주도한 놈. 그래, 좋다. 외롭지 않아서 좋겠네, 뭐.”
[그런데 주인님.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만.]“뭔데, 이번엔?”
“짜잔!”
“어?”
해치가 열리며 양수영이 깜짝 등장했다.
“수영아! 너 어떻게?”
“사실 자비스가 미리 다 알려줬었어. 오빠보다 미리 타서 기다리고 있었지. 헤헤.”
“야, 자비스 너···.”
[위험한 것이 걱정이시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지금의 양수영은 미약하나마 신격을 이룬 데미갓입니다. 외차원에서 실력을 조금만 더 쌓으면 아무리 주인님이라 해도 안심하기 어려우실 겁니다.]“허, 참···.”
당황한 용훈에게 양수영이 매달려왔다.
“그러니까 오빠. 같이 가요. 나 열심히 해서 절대 폐 끼치지 않을게요. 나 정말로 오빠랑 떨어지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그녀의 붉어진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용훈은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지 마. 알았어.”
“정말? 정말이죠? 꺄아, 완전 좋아!”
그녀가 용훈의 허리를 껴안으며 폭 안겨오자 용훈은 그녀의 등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주인님. 차원의 경계에 다다랐습니다. 차원간 추진 엔진을 가동할까요?]“아니. 내가 할게.”
용훈은 조종간으로 다가섰다. 조종석 전면에 펼쳐진 투명한 유리 너머로 일렁이는 차원의 경계가 보였다.
그는 손을 뻗어 양수영의 가녀린 어깨를 꼭 껴안았다.
“준비됐어?”
“네.”
스읍. 한껏 숨을 들이켠 용훈이 호기롭게 외쳤다.
“가자, 외차원으로!”
용훈의 외침과 함께 그들은 차원의 경계를 뚫고 밖으로 나아갔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새로운 시대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