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 the Dungeon! RAW novel - Chapter 56
55화 – 괴물의 육체, 인간의 기술
르세인은 긴장된 얼굴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맞은편에서는 커다란 덩치의 우르크 투사가 넓적하고 완만하게 휜 곡도를 사납게 휘두르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르세인이 걸음을 멈췄다. 그는 마치 겁에 잔뜩 질린 듯 허리를 숙인 채 발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작이군.”
용훈은 르세인의 몸속에서 사납게 휘몰아치는 어둠을 느꼈다. 그것은 신격 특성으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된 용훈마저 침을 꿀꺽 삼킬 만큼 짙었고 포악했다.
투두둑. 그가 걸친 옷가지가 터져나가며 샤커의 검게 번들거리는 피부가 드러났다. 그리고는 곧 바람 빠진 풍선에 바람을 넣듯, 샤커의 몸이 쑥쑥 자라났다.
용훈은 결국 바지마저 터트려 버리는 샤커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신축성 좋은 옷 한 벌 구해줘야겠는데···.”
[그보다 아이템을 하나 만드시는 건 어떨까요. 샤커의 내면에 깃든 어둠을 재료로 삼는다면 변신과 동시에 흡수됐다가 변신이 풀리면 다시 옷으로 돌아오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오, 그거 좋네. 여기 클리어하면 바로 진행하자.”
[알겠습니다.]용훈과 자비스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샤커는 포악한 괴성을 지르며 우르크 투사를 덮치고 있었다.
“크와아아악!”
“취아아악!”
두 괴물은 정면에서 맞부딪쳤다. 우르크 투사 역시 위압적인 체구를 자랑했지만, 샤커에 비하면 그저 조금 건강한 정도였다.
우르크 투사가 곡도를 휘두르자 샤커가 왼팔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퍽, 소리와 함께 곡도의 칼날이 샤커의 두꺼운 팔에 반쯤 틀어박혔다.
“뭐야. 가르친 보람이 전혀 없는 움직임인데.”
[아직은 그렇군요.]샤커는 괴물 같은 힘으로 우르크의 곡도를 뿌리쳤다. 깊숙한 상처에서는 피 대신 검은 어둠이 뭉클뭉클 새 나오고 있었다.
콱!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샤커가 우르크의 어깨를 물었다. 원래는 머리를 물어뜯으려 한 것 같은데 그것을 눈치챈 우르크가 머리를 비틀어 피해낸 것이었다.
샤커는 한 손으로는 우르크의 머리를, 다른 한 손으로는 우르크의 팔을 붙잡고 턱을 비틀어 그의 어깨를 뭉텅 뜯어냈다. 그리고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양팔을 벌려 우르크의 몸을 반으로 찢어버렸다.
“크와아아아!”
그는 분수처럼 솟구치는 우르크 투사의 뜨거운 피에 취해 괴성을 내질렀다.
“쳇. 몸도 못 풀었겠는데. 샤커 저놈, 너무 강해. 이래서야 힘들게 무술을 가르친 보람이 없잖아.”
[조금 더 지켜보시지요. 도전자들은 점점 더 강해질 겁니다.]자비스의 말대로 도전자들은 점점 더 강해졌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샤커는 무식한 육탄 공세 하나로 모든 도전자를 박살 내 버렸다.
샤커의 싸움은 그저 뛰어들어 물어뜯고 찢어발기고 때려 부수는 것뿐이었지만, 그 어떤 도전자도 그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계속되는 똑같은 패턴에 용훈이 낙심할 때쯤, 희소식이 들려왔다.
[주인님, 보스가 출현했습니다. 보스는 다르얀의 영웅 개체, 철권무적(鐵拳無敵) 카라쿠스입니다. 등급은 에픽 B로군요.]“오오, 다르얀? 옛날에 날 애먹였던 그 크라카우랑 같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카라쿠스의 경우에는 제 DB에도 올라있는 자입니다. 단단한 몸과 묵직한 주먹으로 다르얀 내에서도 상당히 유명하다고 합니다. 게다가 크라카우는 레어 S등급이었고 카라쿠스는 에픽 B등급입니다. 이 정도면 조금 모자란 브라가 수준이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어찌 보면 위험할 수도 있는 소식이었지만 용훈은 그 말에 환히 웃었다.
“샤커 이놈, 드디어 임자 만났네. 신나게 맞고 나면 배운 게 떠오르겠지.”
그는 턱을 긁으며 흥미로운 눈으로 샤커를 주시했다.
샤커 역시 카라쿠스의 등장을 알아챘다. 자신에 비하면 한참 작고 가냘픈 카라쿠스의 모습에 샤커는 코웃음을 쳤다.
“크와아악!”
괴성과 함께 샤커가 바닥을 박찼다. 그의 거대한 덩치가 놀랍도록 빠르게 허공을 가르더니 금세 카라쿠스의 머리 위에 도달했다.
반면 카라쿠스는 여유로웠다. 키가 2m에 달하는, 두 발로 일어선 장수하늘소같이 생긴 카라쿠스는 자연스럽게 네 개의 팔을 늘어트리고 있었다.
샤커는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며 입을 쩍 벌렸다. 잭나이프같이 뾰족한 이빨들이 카라쿠스의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때 카라쿠스가 움직였다.
오른쪽으로 반 보 움직이며 살짝 몸을 튼 그는 부드럽게 손을 뻗어 샤커의 뒤통수를 짚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샤커의 머리를 당겨 바닥에 내리꽂았다.
꽈아앙!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샤커의 상반신이 바닥을 깨고 틀어박혔다. 충격이 상당했는지 부서진 바닥 사이로 새카만 어둠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워···. 저건 좀 아프겠는데.”
자신도 모르게 용훈이 중얼거리자 카라쿠스의 고개가 그를 향해 돌아갔다. 카라쿠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용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멍청한 놈. 니 상대는 거기 있잖아. 내가 아니라.”
용훈의 말을 못 알아듣는 카라쿠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콰광! 그의 뒤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카라쿠스는 놀라서 몸을 돌렸고 용훈은 그런 그를 비웃었다.
“걔가 머리는 쫌 떨어져도 우습게 보지 마. 그러다 잡아먹힌다, 너?”
용훈의 비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카라쿠스는 용훈을 향해 사나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그를 향해 달려들지는 않았다. 샤커가 워낙에 흉흉한 기운을 피워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상체를 가린 어둠이 가시자 처음처럼 멀쩡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내면에 어둠이 있는 한, 그는 쓰러지지 않는다. 어떠한 상처라도 어둠으로 회복한다. 그야말로 완벽한 탱커의 자질.
데미지를 떨쳐낸 샤커는 보다 조심스러운 태도로 카라쿠스를 대했다. 상대의 강함을 인정한 것 같았다.
“오오. 뭔가 시작되려는 것 같다.”
[그렇군요.]“자비스, 팝콘이랑 콜라 좀. 편한 의자도.”
[죄송하지만 여기는 주인님의 인스턴스가 아닙니다.]“아, 그렇구나. 아쉽네.”
용훈이 입맛을 다시는 사이 둘의 재격돌이 시작됐다. 선공은 이번에도 샤커였다.
급작스럽게 거리를 좁힌 샤커가 오른팔을 휘둘렀다. 아쉽게도 무술의 형태를 띄진 않았지만, 무식하게 물어뜯는 것 보다는 봐줄 만했다.
카라쿠스가 왼쪽의 두 팔을 들어 샤커의 오른팔을 방어했다. 꽝! 폭음과 함께 카라쿠스의 몸이 오른쪽으로 튕겨 나갔다.
놀랍게도 샤커는 에픽 B등급의 다르얀 영웅 개체를 피지컬로 압도하고 있었다.
“볼수록 놀랍네. 뭐, 저런 괴물이 다 있냐.”
[아직입니다. 겨우 신체능력의 우위만으로는 저 다르얀을 이길 수 없습니다.]자비스의 말이 옳았다.
카라쿠스는 튕겨 나가자마자 샤커의 품을 향해 두 배의 속도로 뛰어들었다. 잔뜩 당겨져 있던 두 개의 오른손이 샤커를 향해 번개처럼 내뻗어졌다.
뻐억! 강렬한 타격음과 함께 샤커가 뒤로 주욱 밀려났다.
기회를 잡은 카라쿠스는 멈추지 않았다. 파란빛이 어린 그의 네 개의 주먹이 연달아 허공을 수놓았다.
샤커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도무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답답했다. 딱 한 번, 손에 잡히기만 하면 과자처럼 부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안 된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고통보다도 그 답답함이 더욱 괴로웠다.
‘…드를 올려!’
갑자기 그의 내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륵?”
정신없이 얻어맞으면서도 샤커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체를 낮추고 머리를 흔들… 발을 멈추면 안…’
“크와아악!”
샤커는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자꾸만 커지는 내면의 목소리를 떨쳐 내려는 것 같았다.
‘…런 멍청아! 발을 움직이란 말야! 옆으로 돌라고!’
마침내 목소리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순간 샤커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겨났다. 민첩한 사이드스텝으로 카라쿠스의 공세를 피해낸 것이었다.
“좋아. 슬슬 효과가 나오는 것 같은데.”
[그렇군요. 확실히 샤커의 움직임에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습니다.]자비스의 말대로 샤커의 움직임은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거대한 두 팔로 가드를 올리자 카라쿠스의 공격 대부분이 막혀버렸다. 거기에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이 더해지자 카라쿠스는 당장 샤커를 상대하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카라쿠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강력한 공격으로 샤커의 가드를 부수려는 것이었다.
카라쿠스의 주먹으로 막대한 에너지가 모여들었다. 두 발을 넓게 벌려 단단히 버티고 선 카라쿠스가 주먹을 비틀며 내질렀다.
샤커는 두 팔의 틈 사이로 날아드는 거대한 힘을 보았다. 겁이 뭔지 모르는 샤커는 아무 생각 없었지만, 그의 내면에서 눈을 뜬 르세인은 거대한 공포를 느꼈다.
‘너무 강하다. 아무리 샤커라도 이런 건 막을 수 없어. 피해야 해.’
르세인은 샤커를 움직여 카라쿠스의 공격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샤커가 그것을 거부했다.
‘이 멍청아! 도망쳐야 한다고!
르세인이 아무리 날뛰어도 샤커는 요지부동이었다.
“크르륵!”
닥치고 잘 보라는 듯이 샤커가 목을 울리며 으르렁거렸다.
르세인은 말을 잃었다. 안쪽에서 바라보고 있는 탓에 샤커에게 일어나는 일이 손에 잡힐 듯 확연히 느껴졌다.
어둠이 움직이고 있었다.
샤커의 내면에 꽉꽉 들어찬 어둠 한 자락이 풀려나오더니 회오리치듯 그의 양팔을 감싸는 것이었다.
어둠에 물든 샤커의 양팔 위로 카라쿠스의 막대한 힘이 담긴 주먹이 내리꽂혔다.
꽈아아아앙!
무지막지한 힘의 폭발이 일어났다. 사방으로 몰아치는 힘의 잔재들이 고대의 투기장을 후려쳤다. 기둥이 부러지고 벽이 터져 허공에 흩날렸다.
용훈은 눈살을 좁힌 채 먼지 속을 주시했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좀전의 격돌에서 우위를 점한 것은 놀랍게도 샤커였다. 둘 다 팔이 박살 날 정도로 데미지를 입었지만, 벌써 회복하고 달려드는 샤커와 달리 카라쿠스는 충격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샤커는 거대한 포탄처럼 빠르게 먼지 속을 가르며 달려나갔다. 당황한 카라쿠스는 다급하게 멀쩡한 왼 주먹을 내질렀다.
순간 샤커의 오른손이 날아드는 카라쿠스의 왼 주먹을 붙잡으며 안쪽으로 궤도를 틀었다. 동시에 둘의 거리가 가까워지며 샤커의 오른 팔꿈치가 카라쿠스의 왼 어깨를 내려찍었다.
콰자작!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다르얀의 막강한 각질 피부가 박살이 났다. 부서진 틈 사이로 진한 녹색의 체액이 분수처럼 뿜어졌다.
“——!”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카라쿠스가 비틀비틀 물러섰다. 그런 카라쿠스를 단 한 걸음으로 따라붙으며 샤커가 강하게 바닥을 틀어 밟았다.
쿵! 그와 동시에 낮게 가라앉는 몸, 그리고 미사일처럼 날아가 꽂히는 그의 왼팔 팔꿈치!
꽝!
폭음은 강렬하고 짧았다. 그리고 싸움은 거기까지였다.
“자비스. 봤어?”
[봤습니다.]“어때.”
[뭐가 말입니까.]“지금 본 장면 말이야. 어떠냐고.”
[… 솔직히 정말 엄청나군요.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동감이야.”
용훈은 샤커를 돌아보았다.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괴물의 육체, 그리고 그 육체로 완성한 인간의 기술.
그 결과가 이것이다. 차원을 넘나드는 존재들조차 벌벌 떨, 완벽한 형태의 이문정주(裡門頂肘).
이것이야말로 괴물의 육체와 인간의 기술의 완벽한 조화.
용훈은 사방 수십 미터에 걸쳐 그려진 갈색과 녹색의 추상화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합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