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 the Dungeon! RAW novel - Chapter 97
96화 – 강림
세상을 가득 메우며 짓쳐드는 그림자의 파도. 그 포악하고 악랄한 힘에 용훈은 진저리쳤다.
“자비스! 저게 도대체 뭐야!”
디멘션 슬라이드를 섞으며 용훈이 빛살처럼 뒤로 날았다.
[파악되지 않습니다! 시간을 좀 더 주십시오!]“그러다가 죽겠다고!”
용훈은 멸절의 광선을 난사하며 거리를 벌리려 노력했지만, 그림자의 파도는 느긋하게 용훈을 향해 다가왔다.
멸절의 광선은 부딪히는 족족 그림자의 파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럴 수가···. 어떻게 멸절의 광선이 저렇게 무력하게 먹혀버릴 수 있지? 저게 가능해?”
[제가 가진 DB 내에서는 저것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어비스’라는 이름에서 유추해본다면, 아마도 무화(無化) 능력이 아닐까 싶습니다.]“무화? 모든 것을 무로 돌린다는 거야? 그게 말이 돼?”
[저도 저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용훈은 미친 듯이 뒤로 몸을 날렸다. 지금으로써는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주인님. 인스턴스 침식률이 46%에서 고정되었습니다. 더이상 침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뷔네스가 아르고스를 벗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면 좋은 거 아냐?”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저 그림자의 파도는 인스턴스를 침식하는 대신 아예 인스턴스 공간 전체를 무효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인스턴스를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미치겠네. 자비스, 무슨 좋은 수 없어?”
[주인님.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뭔데! 아무거나 좋으니까 빨리 말해봐!”
[인스턴스 공간을 일부러 붕괴시키는 겁니다. 주인님은 기회를 봐서 혼자 밖으로 이동하십시오. 그리고 불안정한 상태의 인스턴스를 외력을 가해 붕괴시킨다면 그 내부로 끌려온 뷔네스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던전 프로세스가 붕괴될 때 던전 내부에 있던 헌터들이 목숨을 잃었던 것처럼 말입니다.]용훈은 그 당시를 떠올렸다. 던전 프로세스가 미친 듯이 맥동하며 이미 생성된 던전들을 폭죽처럼 터트리던 시기. 그 던전에 들어갔던 인원들은 던전과 함께 먼지 한톨 남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었다.
“좋아, 그걸로 간다.”
용훈은 세상을 가득 메운 채 밀려드는 그림자의 파도를 똑바로 보며 발을 멈췄다.
그 너머에서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을 뷔네스가 궁금했지만, 그를 보려 노력하지는 않았다.
그는 눈을 감았고, 그 머리 위로 그림자의 파도가 떨어져 내렸다.
훅. 다음 순간 용훈은 알제리의 사막 한가운데에서 눈을 떴다.
쿠콰콰콰쾅! 사방에서 어마어마한 폭음들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칼리오스의 병사들과 지구의 헌터들이 아직도 격렬히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용훈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칼리오스 병사 하나를 광휘의 창으로 박살 내며 자비스를 향해 소리쳤다.
“자비스! 인스턴스 붕괴, 지금 바로 시작해!”
[주인님, 뷔네스의 저항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인스턴스 침식률이 단숨에 80%를 넘어섰습니다! 뭔지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인스턴스 내부에 가득 차서 붕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런 망할! 자비스! 이준수에게 나를 지키라고 해! 나는 인스턴스 붕괴에 전력을 다하겠다!”
[알겠습니다!]자비스의 지시를 받았는지 사방에서 헌터들이 그를 지키기 위해 모여들었다.
용훈은 그들을 보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의 의식이 빠르게 메인 시스템으로 흘러들었다.
용훈의 인스턴스는 메인 시스템의 한쪽 구석에 있었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원래대로라면 버려진 공간에 만들어진 인스턴스. 용훈의 의지가 꿈틀대면 그대로 사라져버려야 할 운명의 인스턴스는 지금 새카만 어둠으로 둘러싸여 맥동하고 있었다.
‘이 새끼. 그림자로 인스턴스를 완전히 집어삼킨 거냐. 그래도 소용없다. 그것만 깨트리면 너는 끝이야!’
용훈은 새카맣게 변한 인스턴스를 향해 의식을 집중했다. 그의 의식을 따라 어마어마한 신력이 인스턴스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안쪽에 가득 들어찬 힘으로 인스턴스의 붕괴를 막고 있는 뷔네스를 처치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외력(外力)을 쏟아부어야 했다.
아니, 이 싸움은 용훈에게 훨씬 유리한 싸움이다. 인스턴스에 갇힌 뷔네스는 자신의 전력을 다 사용하지 못한다.
반면에 현실의 성역에 발을 걸친 용훈은 본신의 힘을 200% 발휘할 수 있다.
‘이긴다!’
쑤와아악! 거대한 힘이 한 점에 집중되자 메인 시스템 일부가 비틀리며 왜곡되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용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대로 인스턴스만 붕괴시키면 뷔네스를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쿠콰칵! 인스턴스의 표면에 거미줄처럼 가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붕괴의 전조였다.
‘가라!’
강렬한 기합과 함께 신력의 흐름이 한층 강해졌다. 인스턴스가 마구 진동하며 균열이 빠르게 영역을 넓혀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인스턴스를 둘러싼 외력이 내력의 저항을 넘어섰다. 한계치를 넘어선 힘이 인스턴스를 옥죄어 들어가자 마치 프레스에 끼인 알사탕처럼 인스턴스가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됐어!’
[아닙니다! 주인님, 주변을 살피십시오!]‘뭐?’
자비스의 외침에 용훈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인스턴스는 사라졌고 아무 곳에서도 위협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단지 기괴한 형태로 왜곡된 메인 시스템의 일부가 눈에 들어올 뿐.
… 잠깐. 인스턴스가 붕괴됐는데도 메인 시스템이 왜곡돼 있다고? 왜? 힘의 충돌은 이미 끝났는데?
[주인님!]자비스의 외침과 동시에 용훈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는 얼른 의식을 뽑아 올려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에서는 용훈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메뚜기떼처럼 몰려드는 칼리오스 병사를 막으려 카엘로 아르마를 걸친 헌터들이 스크럼을 짜고 있었고, 그 안에 모여선 원거리 헌터들이 온갖 마법과 스킬을 난사해댔다.
용훈은 그 격전의 한가운데서 텅 빈 허공을 바라보았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메인 시스템의 왜곡은 현실에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설마···.”
순간 현실의 왜곡점이 급격하게 수축하며 주변을 빨아들였다. 미처 피하지 못한 칼리오스 병사와 헌터 수십 명이 왜곡점 속으로 빨려 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뻐어엉. 다음 순간 왜곡점이 단숨에 터져나가며 공간에 구멍이 뚫렸다.
아르고르를 장착한 뷔네스가 구멍 밖으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고스는 폐차장 압축기에 이리저리 눌린 것처럼 형편없이 우그러져 있었고 전체가 붉게 달아올라 흰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턱. 뷔네스가 바닥을 디디자 허공에 뚫린 구멍은 거짓말처럼 깨끗이 사라져버렸다.
“더러운 수법을 쓰는구나. 하지만 날 죽이기에는 너무도 미약하다. 너무도 부족하다.”
“도,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나온 거지? 붕괴되는 인스턴스에서 빠져나올 방법 같은 건 있을 수가 없는데···.”
“칼리오스의 기술력을 얕보지 마라. 드넓은 차원계를 호령하던 우리가 겨우 너 정도의 상대를 겪어보지 못했을 것 같으냐.”
[주인님, 속지 마십시오. 지금 뷔네스도 한계입니다. 보십시오. 아르고스가 거의 완파 상태이지 않습니까. 지금이 기회입니다. 공격을 집중하십시오.]‘알았어.’
용훈은 암암리에 신력을 체크했다. 방금 인스턴스를 붕괴시키느라 너무 많은 신력을 소모했다. 아무리 성역의 보조를 받는다 해도 여유로운 상태는 아니었다.
‘빨리 끝내자.’
펄럭. 용훈은 징벌의 손길을 들어 뷔네스를 겨눴다.
“이제 좀 끝내자! 멸절의 광선!”
용훈의 손끝에서 압도적인 광선이 솟구쳤다.
“아르고스! 모드 체인지, 창!”
뷔네스의 말에 아르고스가 변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예전처럼 원활하지 않았다.
위이잉, 철컥! 쿵! 심하게 우그러지고 망가진 아르고스는 변화 과정에서 심한 충격을 일으켰다. 곳곳에서 스파크가 튀어 오르고 파츠가 떨어져 나왔다.
결국 아르고스의 창은 그 위력이 반 이하로 떨어지고 말았다.
쿠콰콰쾅! 아르고스의 창을 분질러 꺾으며 멸절의 광선이 뷔네스를 향해 쇄도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궤도가 틀어졌는지 뷔네스의 어깨를 살짝 스친 채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아직이다! 멸절의 광선!”
용훈이 또 한 번 신력을 끌어모아 멸절의 광선을 날렸다.
“크윽! 아르고스! 모드 체인지, 방패!”
아르고스가 또다시 소름 끼치는 소음과 함께 스파크를 내며 변화했다.
아르고스의 눈이 정면으로 모여들더니 하나로 합쳐져 커다란 에너지의 방패를 만들어냈다.
뷔네스는 그것을 비스듬히 세워 멸절의 광선을 빗겨냈다.
콰앙! 거대한 충격이 뷔네스를 흔들었지만 뷔네스는 밀려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충격에 정면으로 맞서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제 제발 좀 죽어라! 멸절의 광선!”
용훈은 바닥까지 신력을 끌어올려 멸절의 광선을 연달아 토해냈다.
꽝! 꽈앙! 꽝!
무지막지한 충격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두 절대자의 싸움에 칼리오스 병사들과 헌터들은 싸움을 멈추고 멀찍이 물러선 상태였다.
꽝! 한번 부딪힐 때마다 뷔네스의 아르고스는 불꽃을 튀기며 부스러기를 떨어트렸다.
꽝! 하지만 그럴 때마다 뷔네스는 한 걸음, 두 걸음씩 꼬박꼬박 앞으로 나섰다.
꽝! 이제 둘 사이의 거리는 고작 다섯 걸음 정도. 용훈은 이 마지막 한 방으로 그를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모든 게 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더이상 남아있는 신력이 없었다.
그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지금 남은 신력을 멸절의 광선이 아닌 ‘그것’에 사용한다면?
그래, ‘그것’이라면 이번에야말로 뷔네스를 죽일 수 있다!
용훈은 징벌의 손길을 해제하며 팔을 내렸다. 그러자 뷔네스가 방패의 형태를 검의 형태로 바꾸며 맹렬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용훈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로 칼날이 떨어져 내렸다.
“마스터!”
[주인님!]이준수와 자비스가 동시에 그를 불렀다. 그리고 칼날에 집어삼켜 지는 용훈을 보며 이준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 거기까지.
푸화악! 터덩, 텅.
격렬한 소리 후 이어지는 적막. 사람들은 감았던 눈을 떠 상황을 살폈다.
그런데 상황은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용훈의 앞에는 새하얀 의복을 걸치고 새하얀 후광을 내뿜는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뷔네스의 에너지 칼날을 받아든 채 다른 한 손으로 뷔네스의 허리를 꿰뚫은 상태였다.
“으···. 너, 너는 뭐냐···.”
울컥 피를 토하며 뷔네스가 중얼거렸다. 새하얀 남자는 뷔네스의 허리에서 쑥 손을 뽑아 그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 나? 나는 이곳의 진정한 신이다.
퍽! 뷔네스의 머리가 아르고스의 금속 투구와 함께 풍선처럼 터져버렸다.
“뷔네스 님!”
“으아아아아! 뷔네스 니이임!”
사방에서 칼리오스의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새하얀 남자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그런 그들을 돌아보았다.
– 나를 경배하라. 이 미천한 벌레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