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ckstar RAW novel - Chapter 100
99화
“앗, 그, 그게…….”
단독 MC로서 프로그램 하나를 맡아 진행하는 진행자의 이름은 무시하지 못할 무게를 가지고 있다.
특히나 그 사람이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서 꽤나 인상적인 활약을 하며 자신의 주가를 높이고 있는 연예인임에야.
“묻잖습니까? 싸우는 거냐고요.”
“아, 아뇨……. 그게 아니라……. 그냥 대화 중이었습니다.”
천지 분간 못 하고 망나니처럼 달려들듯 굴던 그 현태섭도 꼬리를 내리고 쩔쩔맨다.
하긴, 이미 찍혀 있는 상황에 더 밉보여서 그에게 좋을 것도 없으니 당연한 처세긴 하다.
‘멍청한 놈…….’
그 망가진 꼴이 꽤나 볼 만하긴 했지만 이렇게 계속 둘 수도 없다.
나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연호랑에게 말했다.
“네, 조금 격하게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호랑 님이 들어오셨어요.”
대충 상황을 무마하기 위한 말임이 눈에 훤히 보이지만, 연호랑은 그것을 받아 주었다.
내 면을 세워 주는 행동이나 마찬가지였다.
“쯧……. 럭키데이 분들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혹시 자리 좀 비켜 주실 수?”
“아……. 예…….”
마지못해 속아 준다는 듯 혀를 차고 말하는 연호랑은 피넛버터에게 자리를 비켜 줄 것을 요구했고, 그들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사라졌다.
한판 붙을 것처럼 소리치다가 꼬리를 마는 모습이 뭔가 허무한 느낌이다.
“이야……. 럭키데이.”
그들이 사라진 후, 연호랑이 우리를 보며 말했다.
“방송도 방송인데, 챙겨 주는 솜씨가 좋네. 물고 뜯으려던 사람한테 이렇게 깔끔하게 실드를 줘? 방송 처음 맞아요? 아역 같은 거 해 보셨나?”
생각도 안 한 처세에 대한 칭찬이 쏟아졌다.
“하하. 아니에요. 이번에 데뷔한 거 맞습니다.”
이번 생에는 말이지.
“잘했어요. 이 동네 일이라는 게 원래 맘에 드는 사람들이랑 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거든.”
융통성 있게 넘어가기도 하고, 싫은 놈들이랑도 끝까지 가지 않는 선에서 같이 일을 하기는 해야 하니, 적절한 대처였다며 연호랑은 내게 칭찬을 해 댔다.
‘부모님이랑 동생 말을 귀담아들어 둔 게 도움이 되네.’
유명인 부모님과 형제를 두었기에 백스테이지에서 사람 대하는 법 같은 걸 귀동냥으로나마 자주 들어 봤다.
거기에 오랜 인디 경력이 더해져 최대한 남들의 호감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버릇이 들었기에 이렇게 자잘하게 좋은 인상을 쌓는 데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
“하여튼 오늘 촬영 진짜 잘 뽑힌 것 같아요. 럭키데이 분량으로만 가득 채워도 방송 시간 전부 메울 수 있을걸? 고마워요.”
연호랑은 우리에게 방송 분량이 잘 뽑힌 것 같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하긴 토크와 퍼포먼스 전반에 걸쳐 맹활약을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마 전체 분량의 절반 정도는 우리가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
“하하. 아뇨. 이끌어 주시는 대로 따라간 것뿐인데요, 뭘.”
“겸손까지. 크으으…….”
그는 이미 우리에게 콩깍지가 단단히 씐 것처럼 뭘 해도 좋게 포장하며 무한 칭찬 세례를 퍼부었고,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 다음번에 젊은 천재들 콘셉트로 좀 꾸며 볼 것 같은데, 출연 괜찮아요? 응? 딱 좋을 것 같은데.”
심지어 다음번 기획 방송에 나와 줄 것을 제안받아 일정을 찾아보기까지 했다.
촬영 일자를 들어 보니 대충 앨범 내고 활동기가 한창일 때.
“언제든 불러만 주세요. 달려오겠습니다.”
“하하하. 약속했어요.”
흔쾌히 수락했다.
시청률도 나쁘지 않은 프로그램이고, MC와 연도 쌓았으니 당연히 받아야 할 제안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고, 연호랑과 주고받은 정보는 꽤나 많았다.
일단 그는 우리와 피넛버터 사이의 작은 스파크가 ‘얌전한 럭키데이를 일방적으로 갈구려는 피넛버터’의 구도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비록 실드 아닌 실드를 쳐 주기는 했으나 그것은 방송국 안에서 분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는 의사 표시일 뿐, 물고 뜯으려던 사람을 챙겨 주냐는 그의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기에 시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 학생들이라 그런 쪽으로는 전혀 기대 안 했는데, 성격 세고 좋네.”
동시에 우리는 큰 말썽을 일으킬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사이 틀어진 이후에도 얌전히 있는 순둥이들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래도 촬영할 때 저쪽 노래 가져다가 주물럭댄 거. 그거 괜찮았어요. 방송 내적으로도 그림 좋았고, 전후 분위기를 아는 사람한테는 통쾌한 복수였고.”
“하하. 즐겁게 보셨다니 다행이네요. 혹시 문제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에이, 다들 봤는데 뭐. 사실 제작진들은 영상만 예쁘게 뽑히면 선악 구도도 잘 꾸며서 내보내 줄 거예요. 당연히 럭키데이에 유리한 쪽으로.”
더군다나 얄팍하지만 확실한 그 보복을 멋들어지게 해낼 실력이 있음 역시 오늘 녹화를 통해 보여 줬고 말이다.
“아니면 내가 직접 말해 놓을 수도 있는데. 잘 좀 해 달라고.”
“아뇨, 괜찮습니다. 그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는 없어요.”
“흠. 어련히 알아서들 하겠지만……. 혹시 문제 생기면 연락해요. 도와줄 수 있는 건 다 도와줄게.”
“감사합니다.”
아무튼 연호랑은 긴 촬영과 짧은 대화를 통해 우리를 좋게 보게 되었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어설프게 착하기만 한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없는 시장인데, 전투력 있는 팀은 잘 보일 여지가 충분하지.’
무조건 가는 자리마다 먼지 일으키며 싸움질을 하는 사람들이 각광을 받는다는 뜻은 아니지만, 적어도 제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사랑을 받기 마련이다.
비단 연예계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만, 이곳은 특히 더욱 그러했다.
“먼저 책 잡힐 일 한 건 없죠?”
“당연하죠.”
“그럴 줄 알았어.”
먼저 시비나 걸어 대는 싸움닭은 아닌데, 필요할 때는 적극적으로 행동해서 적에게 펀치를 날릴 줄 안다?
“럭키데이 참 마음에 들어. 다음에 또 봐요. 응?”
“넵!”
선배들 마음 뻑 가게 만드는 데에는 충분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대화를 마무리하고, 우리는 대기실을 나가는 연호랑을 배웅했다.
“으아, 피곤해.”
“촬영도 촬영인데 인사드리는 게 더 힘든 것 같아.”
“인정.”
어른들한테 인사하고 대화 이어 가는 일들은 내가 거의 다 맡아서 했거늘, 엄살은 수현이와 재우가 부린다.
다소 얄밉기는 했지만 긴 촬영이었으니 피곤할 만도 하다.
“짐 챙겨서 얼른 가자.”
“이응.”
“나 가방 어디 뒀지…….”
우리는 일정을 마치고 나가기 위해 대기실 곳곳에 널어 두었던 짐들을 하나씩 챙기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
“럭키데이!”
“뿌, 뿌우!”
“인사하러 왔지롱!”
같이 방송에 출연한 밴드, 데드록커스였다.
“앗, 안녕하세요!”
“뭐야, 설마 아는 척도 없이 쪼로록 가려고 했어? 응?”
“하하. 짐 챙겨서 나가면서 인사드리려고 했죠.”
“그 걸음 귀찮을까 봐 우리가 직접 왔지. 푸하하!”
친화력도 좋은 그들은 같이 출연한 동료들에게 인사도 하고 친분도 다질 겸 후배인 우리들의 대기실로 직접 찾아왔다.
“피넛버터 걔네는 진즉 갔더라고.”
“됐어. 오히려 안 갔으면 그 면상들 다시 보고 인사 나눴어야 했는데, 뭐.”
“어휴, 재수 없어. 자기네 회사 크다고 얼마나 재는지…….”
간단한 인사로 시작했던 대화는 어느새 피넛버터의 뒷담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미 가고 없는 그들의 흉을 보고 있는 그 모습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사람 보는 눈이 있는 분들이네.’
나쁜 놈을 기가 막히게 구분하시는구나.
“확실히 재수 없긴 했어요.”
“맞아, 맞아.”
“노래 개못하던데 너무 잘난 척함.”
“푸하하하! 너 말 웃긴다!”
한동안 우리는 피넛버터로 대동단결하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어?”
그러던 것도 잠시.
데드록커스의 보컬 김희정이 잠깐 동안 말을 멈추더니 수현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왜, 왜 그러세요?”
“혹시…….”
그러더니 수현이에게 물었다.
“너 수영이 동생?”
“네, 네? 네…….”
“옴맘마, 얘 좀 봐! 너 언니 기억 안 나?”
알고 보니 김희정 보컬이 수현이의 오빠이자 밴드 스코프의 베이시스트인 수영이 형과 친구였던 모양이다.
“와, 많이 컸다! 전에 봤을 때는 네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나? 거의 요만했는데. 어머, 어머. 세상 참 좁다.”
그것도 어릴 적부터 안면이 있는.
“앗, 아아…….”
“그렇구나. 수영이 동생도 베이스를……. 역시, 역시. 어릴 때부터 음악 조금 들려주면 고개부터 끄덕끄덕하는 게, 리듬감이 그냥…….”
그녀는 수현이를 붙잡고 한참 동안이나 과거 회상을 진행했다.
어린 시절 작았던 수현이가 언제 이렇게 컸느냐, 어릴 때부터 리듬감이 남달라서 뭘 해도 할 줄 알았다 등등.
인연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추억 섞인 이야기들이 줄줄 나왔다.
“아……. 아하……. 하…….”
물론 수줍음 많고 대화는 힘들어하는 수현이 입장에서는 곤혹이었지만 말이다.
“아, 맞다.”
그렇게 한참 옛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던 김희정 보컬은 손뼉을 한번 짝 치더니 우리에게 말했다.
“언니네 밴드랑 너네 오빠네랑 같이 공연하는데, 혹시 시간 나면 보러 올래?”
“네?”
“다른 밴드 없이 데드록커스랑 스코프 연합 공연 느낌인데, 큰맘 먹고 규모를 조금 키웠거든. 어때?”
데드록커스와 스코프의 이틀 연속 공연 초대.
“기획하는 쪽에서 하자는 대로 맞춰서 짜 보긴 했는데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네.”
평소에 자주 하던 소극장 공연의 틀에서 벗어나서, 전문적인 인력들과 손을 맞춰 조금 큰 무대를 꾸미기로 했다고.
“요즘 이런 식으로 많이 하는 것 같더라고요. 이틀 연속인데 공연 내용은 또 다르니까 1회차 본 사람들이 2회차도 구매하게 되는 식으로.”
당연히 첫날과 둘째 날의 티켓은 따로 사야 하고, 공연의 내용도 다르다.
조금 지리멸렬한 장사 수단이기는 하지만 관람객들에게도 그리 나쁜 방식은 아니라고 평가받던 것이 기억났다.
‘티켓 가격에 따라서 팬심으로 이틀 연속 관람하러 가는 것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게 만들 수 있고, 시간이 모자란 사람은 하나만 사서 구경해도 되니 좋고. 혹시 밴드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첫 공연을 보고 2회차를 고려할 수도 있고.’
나름 침체되어 가는 공연 시장의 종사자들이 머리를 굴려 만들어 낸 시스템이다.
다만 공연의 퀄리티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둘째 날이 완전히 망해 버린다는 단점이 있긴 한데, 그거야 뭐 공연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퀄리티는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거지.’
그 정도 실력도 없이 공연이라는 것을 천년만년 할 수도 없을 테고 말이다.
“헤헤헤. 잘 안되면 다시 소극장 공연이나 돌아야지, 뭐. 그래도 그 사람들이 공연 기획의 프로인데 설마 우리한테 안 될 일 소개해 줬으려고 싶기도 하고. 자, 이거 받아.”
김희정 보컬은 헤헤 웃더니 우리에게 여덟 장의 티켓을 건넸다.
“혹시 같이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몫은 결제해서 올 것! 오케이?”
“오케이!”
깨알 같은 홍보는 덤이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