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ckstar RAW novel - Chapter 27
26화
딱 여덟 마디짜리 짧은 길이의 mp3 음원 파일.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멜로디와 코드가 묘하게 익숙하다.
‘가을의 향기가 안 쓰는 곡 모음에 들어 있다니. 이게 말이 돼?’
가을의 향기, 다른 말로는 가을의 연금이라고 불리는 메가 히트 송.
그것이 상만 아저씨가 안 쓰는 곡 모음이라며 보내 준 작업물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이 가을에 쏟아지는 단풍잎……, 비에…….”
가을의 향기는 데뷔 때부터 메이저에서 놀았던 아이돌 밴드 레드버드의 노래로, 락이라는 장르가 죽었다고 해도 무방한 2010년대 대한민국에서 이례적으로 히트를 친 락발라드 노래였다.
그것도 음원 발매 이후로 1년이고 2년이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단풍 들 때가 오면 어느새 차트 위로 훌쩍 날아오르던 효자 곡.
그야말로 연금이라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는 히트작이다.
“둘이 함께 걸었던 시간들이 흘러가…….”
한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후렴구의 멜로디와 가사를 흥얼거렸다.
역시나 오래오래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노래답게, 입에 착 달라붙는 것이 대박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러고 보니 레드버드도 CMYK 소속이잖아? 이것들이 아예 작정을 하고 벗겨 먹었구나.’
혹여나 남의 손에 들어가 대박을 터뜨릴 곡을 내가 가져다가 부르면 도둑질이 되는 건 아닐지 싶어 껄끄러웠는데, 그 작자들이 노래 주인이라면 상관없을 것 같았다.
도둑놈 물건을 원래 주인 허락 받아 가져가겠다는데 그게 나쁜 일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읏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서랍에 엉망으로 흩어져 있던 종이 더미에서 오선지 몇 장을 골라내 펼쳤다.
‘전주는 C 샵 마이너로 시작해서 첫 소절 들어갈 때 G로 잇고…….’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가을의 향기를 쭉 따라 악보를 그렸다.
기억에만 의존해 그려 내고 있지만 왜인지 집중력이 한도 끝도 없이 올라가며 완벽하게 따라 만들 수 있었다.
‘아니야, 여기는 차라리 두 마디 빼서 메인 리프를 당겨 주는 게…….’
거기에 추가로 내 취향을 곁들인 편곡까지.
잠은 못 잤어도 달콤한 밤이었다.
* * *
“새 레퍼토리?”
“그것도 오리지널?”
“그렇다니까. 상만 아저씨가 넘겨준 곡들 중에 마음에 쏙 드는 게 있어서. 일단 가상 악기로 찍어 왔으니까 들어 봐.”
다음 날, 수업이 모두 끝나고 연습실에 모인 멤버들에게 내가 직접 편곡한 김루치 버전 ‘가을의 향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반응은 역시나 나쁘지 않았다.
“오.”
“락발라드? 코드 진행은 흔한데, 멜로디가 중독성 있어서 좋은 것 같아. 이게 편곡 최종본이 아니라면 뒷부분 네 마디에…….”
“와, 이거 좋다. 드럼이 심심하긴 한데, 가늘고 길게 끌어가는 것도 괜찮지.”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미래에서 검증된 메가 히트 작품이었으니까.
‘이게 별로라고 하면 대중적인 픽을 아예 못 한다는 뜻이지.’
다행히도 재우는 장르 불문 듣기에만 좋다면 다 듣는 오타쿠 스타일이고, 수현이도 딱히 가리는 것 없이 노래를 분석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편이며, 라희는 아예 음악의 음도 모르는 비전문가 음알못이다.
메이저 마이너 가려서 듣는, 취향이 한곳으로 몰린 멤버는 우리 밴드에 없다.
“그치? 괜찮지?”
그리고 나 역시 원래 아예 다른 장르인 성악에서 옮겨온 입장인지라 장르를 가려 듣지 않는 편이다.
트로트, 힙합, 재즈 상관없이 듣고 그중 락 음악을 가장 사랑할 뿐.
그러니까 메탈, 펑크, 하드락, 락발라드 할 것 없이 우리는 연주만 재밌게 할 수 있으면 장땡이라는 뜻이다.
“이거 같이 완성해 볼래?”
나는 기쁜 얼굴로 애들에게 물었고, 녀석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응.”
“수정 편곡이 그렇게 길게 걸릴 것 같진 않은데……. 고칠 부분부터 일단 빠르게 찾아내고 라인별로 포인트 잡은 다음에 연주자 배려한 수정까지 하면…….”
“나도 좋아!”
수현이가 또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뭔가 중얼거리고 있지만 어쨌든 다들 찬성 의견이다.
상만 아저씨에게 이걸로 고르겠다고 말도 해 놨겠다, 이제 달려 봐도 괜찮을 것 같다.
“오케이. 가 보자고. 천천히 자기 포지션 따서 포인트 잡아 보자.”
재우는 이어폰을 꽂고 앰프에 연결하지 않은 기타로 멜로디를 따기 시작했고, 수현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오선지에 뭔가를 끄적였으며, 라희는 예전 합주 수업 때처럼 비트박스를 하며 박자를 계산했다.
‘음, 음. 멋져. 아주 멋져.’
모두 자기 포지션에 제대로 이입해서 음악 세포를 예열하기 시작했으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뿌르르르르르!”
나도 립 트릴을 하며 성대를 풀어 두었다.
* * *
널따란 회의실.
긴 탁자에 태양 고등학교 교사진이 둘러앉아 있다.
특이한 점이라면 앉아 있는 모든 교사들이 음악 전공 학생들이 포함된 반을 맡고 있는 담임들이라는 것.
회의용 책상 끝자락, 상석에 앉은 부장 선생이 입을 연다.
“그러면 실기 교과 평가 기준 제출은 모레까지 마무리하는 걸로 하고, 다음 안건이……. 뭐였지?”
가르치는 능력만큼은 인정받는 교사이지만 평소 느슨한 성격 탓에 뭔가를 자주 잊어버리는 현수한 부장이 어김없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에 2반 담임 윤영현 선생이 그에게 남은 안건을 상기시켰다.
“1학년 대상 외부 대회 공지입니다.”
“아, 그래. 이번에 들어온 공문이……. 보자…….”
곧 회의 시간의 마지막을 장식할 외부 대회 관련 공지를 이어 나가려 파일 사이를 뒤적이다가, 그가 몇 장의 종이를 꺼내 들고 말했다.
“바이올린, 피아노, 성악, 그리고 밴드 대회네요.”
“어? 관현악 없나요? 수은 예대에서 이번 분기에 공문 날릴 거라고 했는데…….”
“저한테 들어온 건 따로 없어요. 나중에 연락해서 확인해 보세요.”
“이상하다……. 일단 알겠습니다.”
“그래서 각 반 담임 선생님이 공지, 혹은 선발을 해 주어야 하는데……. 보자……. 바이올린, 피아노, 성악은 참가 신청서만 받으면 되고, 밴드는 우리가 따로 선발해서 내보내야 하네요.”
상반기 콩쿠르 및 외부 경연 대회.
그중에서도 중요도가 높은 것들을 따로 빼서 담임 교사들이 무겁게 인지하도록 회의 시간을 따로 빼서 공지하는 것이다.
특히 이번 건에는 학교 이름을 달고 나갈 대표 참가자를 선발해야 하기도 하고 말이다.
“스스로 콩쿠르 같은 걸 찾아서 참가했던 몇몇을 제외한 1학년 학생들 입장에서는 첫 외부 대회가 될 겁니다. 중요한 첫 단추인 만큼 신경을 좀 써야겠지요.”
태양 고등학교에 예체능 전공으로 입학한 아이들의 절반 정도는 아주 어릴 때부터 전공 분야를 배우고 익혀 온 학생들이다.
그렇기에 중학교 때부터 콩쿠르나 대회, 공모전 등에 나가 입상을 한 아이들도 꽤 있었다.
다만 이제 아이들이 정말 깊게 신경 써야 할 대학 입시에서는 중학 시절 입상보다는 고등학교 입상 경력이 훨씬,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니 이번 대회 공지가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첫 단추라는 부장의 말은 매우 정확했다.
대학 원서 첫 줄을 장식할 귀중한 기회이니까.
“바이올린, 피아노, 성악은 지원자 받는다고 종례에서 따로 공지하면 되겠고……. 밴드는 저희가 회의를 통해서 뽑아야 할까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지요. 누구 혼자 맡아서 내보낸다면 그것도 취향 따라서 갈리니 공정성 문제가 생길 테니까요.”
“그런데 1학년 애들 중에 완전하게 결성이 된 밴드가 있긴 한가?”
“왜, 합주 수업 있잖아요.”
“아 그렇지. 2반 학생이 만들었다고…….”
선생들은 꽤 민감해진 눈치로 대화를 나누었다.
당연한 일이다.
혹여라도 대표 참가자 선정 과정에 불만이 생긴다면 전화 테러, 항의 폭탄에 몇 날 며칠을 시달려야 할 것이니까.
“합주 실습 담당 선생님 누구시죠?”
현 부장이 교사들을 둘러보며 묻자, 김하선 선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접니다!”
“김 선생님. 선생님 생각에 대표로 내보낼 학생들이 있나요?”
김하선 선생은 부장의 물음에 잠깐 고민하다가 되물었다.
“밴드 당 인원 제한은 없을 테고, 선발 팀은 몇 팀이나 필요한가요?”
“최대 세 팀 선발로 나와 있네요.”
“그러면! 우선 한 팀은 추천드리고 싶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편애라면 편애고 차별이라면 차별인데, 그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한 팀은 역시 정해져 있었다.
* * *
“쫘잔! 그래서 너희가 우리 학교 대표 딱지를 달고!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는 말씀!”
“어…….”
“어때?”
치킨과 함께 연습실에 들이닥친 김하선 선생님은 의기양양 위풍당당 우리에게 말했고, 나의 담임 윤영현 선생님께서는 그걸 왜 내일이 아니라 굳이 오늘 미리 말해 주냐는 듯 얼굴을 감싸 쥐고 서 계셨다.
“어…….”
“음…….”
당황스러웠다.
“분위기가 왜들 그래? 싫어?”
“아뇨, 아뇨. 싫은 건 아닌데…….”
조금 갑작스러웠다.
“원래 신청도 안 받고 그냥 차출되는 대회인가요?”
“아하. 아니. 너희가 싫다면 안 나가도 돼. 그런데 실음과 입장에서는 이만큼 좋은 기회가 또 없을걸?”
신청하지도 않은 대회에 학교 대표로 참가하게 되다니.
우리의 의사야 어쨌든 간에 일정 조율도 해야 하고, 곡 준비도 해야 하는 입장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잠시만요. 일단 저는 어떤 행사가 됐든 다 괜찮은데, 일단 애들부터…….”
“난 괜찮.”
“재우는 오케이라고, 수현이는?”
“나, 나도…….”
“셋 오케이. 라희는?”
“나는……. 음…….”
어차피 집에서 쇠줄만 튕기고 있을 둘은 괜찮다는 의사를 표현했고, 남은 것은 귀하디귀한 우리 불량 드러머 라희 님이시다.
라희는 잠깐 생각하다가 선생님에게 물었다.
“쌤, 대회 날짜는요?”
“4월 마지막 주 토요일.”
“으으……. 일정은 괜찮은데……. 혹시 거기 나가면 이름 부르고 그럴까요?”
“어……. 아마 그렇겠지? 아, 너 마스크 써야 해서?”
“네.”
생각해 보니 그도 그런 것이, 라희는 부모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타이거 마스크를 쓰고 버스킹에 나간 전력까지 있다.
교복 입고, 명찰 달고, 학교를 대표해 나가서 얼굴을 파는 것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이런 대회에 나갔다가 혹시나 부모님이 그 모습을 보신다고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니까.
“잠깐 기다려 봐.”
이에 대강의 사정을 알고 있던 김하선 선생님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더니 뭔가를 하기 시작했고, 잠시 후 우리에게 그것을 넘겨주었다.
화면 안에서 영상 하나가 재생되고 있었다.
“네, 한소 고등학교 밴드부 맑음의 무대였습니다. 다음 참가자 바로 모시겠습니다. 사명 고등학교 밴드 동아리, 자가입니다.”
그것을 본 라희의 표정이 밝아졌다.
“옹! 이름은 안 부르네요?”
“그런 것 같네. 잘됐다.”
“그럼 나도 오케이! 다 조지고 와야지!”
이렇게 모든 멤버들의 의견이 일치되었다.
나는 모두의 생각을 확인하고, 김하선 선생님께 답했다.
“좋아. 그럼 나가는 걸로 할게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년 대회에서 진행자가 학생들 개개인의 이름을 호명하지 않았다고 해서 올해에도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속마음을 꾹 눌러 담고 말이다.
“좋아. 우선 대회 개요부터 설명해 줄게. 이거 받아서 넘겨줘. 각자 세 장씩.”
“넵.”
우리는 그녀에게 청소년 밴드 음악 경연 대회의 참가 신청서와 함께 참가 제한, 평가 기준 등이 적힌 대회 요강 프린트를 받았다.
“참가 제한이나 이런 건 너희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고……. 여기부터 보자. 평가 기준과 경연 기준. 모든 분야의 음악 두 곡을 10분 내외로 연주하고, 개최 측 심사 위원의 평가에 맞추어 등수를 정한다.”
“모든 분야의 음악이라 하심은?”
“기성곡, 창작곡, 전통 음악까지 뭐든지 가능하다는 뜻이지.”
“호오?”
아무래도 우리의 오리지널을 처음 선보일 기회가 꽤 크게 주어진 것 같다.
“왜? 뭐 있어?”
“있죠. 뭐 있죠.”
멤버 모두의 입꼬리가 슬쩍슬쩍 움직였다.
선생님은 영문을 몰라 잠시 당황했지만 어차피 그 이유야 곧 알게 될 것이라며 금방 넘어가고는 설명을 이었다.
대강의 개요를 모두 들은 후, 그녀가 우리에게 물었다.
“참, 너희 밴드명은 어쩔 거야? 바꾼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 그거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