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ckstar RAW novel - Chapter 6
5화
조례가 끝나고 첫 수업들이 시작되었다.
역시나 자율적인 학습 계획 수립과 느린 진도가 장점인 태양고 학생들답게 대다수가 수업 진행 계획 설명뿐인 첫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듯했다.
‘성적도 챙기려는 몇몇 애들 빼고는 다 정신이 콩밭에 가 있네.’
물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
‘이따가 연습실 한번 봐야지. 꽤 괜찮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학교에 마련된 장소치고는 시설이 나쁘지 않은 학생용 연습실을 둘러보고 싶었다.
학년별로 사용하는 건물이 다르니 고학년들의 점령 같은 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되고, 자리도 충분히 많은 편이니 종례하자마자 사용 신청을 넣으면 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첫날이지만 생각할 것이 꽤 많았다.
‘일단 1학기에는 성악 관련 활동도 조금은 해야 하고, 학교에서 연습실을 빌려서 따로 연습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 같아. 학원을 다닐 수 있으면 더 편하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니 점검은 어쩔 수 없이 선우 형을 통해서 해야겠지.’
보컬 트레이닝을 따로 받고 있다면 혹시나 보컬 밸런스가 무너지지는 않았는지, 피지컬 변화로 발성이 흔들리지는 않는지 따위를 강사를 통해 점검할 수 있을 테지만 나는 지금 그럴 상황이 되지 않는다.
트레이닝과 공부를 학교 전공 수업과 독학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
그렇다고는 해도 가출해서 땅을 구르며 배웠던 옛날에 비하면 훨씬 좋은 환경이기는 하다.
먼 길을 가야 하는데 길잡이가 있고 없고는 꽤 큰 차이가 있으니까.
‘지원 빵빵하게 받으면서 음악하는 예고 엘리트 애들에 비하면 모자라지만 뭐 어때. 내가 더 잘하는데.’
비록 환경은 아주 조금 더 열악하지만 내게는 그들에게 없는 압도적인 실력과 경험이 있다.
굳이 발걸음 늦춰 없는 여유 만들어 가며 천천히 걸을 필요는 없지만, 내 페이스만 유지하고 가도 충분할 것이다.
딩동댕동! 딩동댕동!
“오케이, 첫 수업은 여기까지. 물어볼 거 없지?”
“네!”
“그럼 식당으로 출발.”
열심히 딴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
다년간의 예체능과 수업을 통해 4교시는 일찍 마쳐 주진 못할지언정 정시에 끝내 주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던 국어 선생님은 그대로 수업을 종료하고 나갔다.
“야, 야. 밥. 밥. 밥.”
“가자. 식당 어딘지 알지?”
“엉. 빨리 가자.”
열심히 졸다가 4교시 막바지가 되어서야 겨우 눈을 뜬 태호가 나를 보챈다.
하긴 학교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밥이니 들떠 있을 만도 했다.
“밥바라 밥바라밥. 빕비리 밥밥밥…….”
“조용히 좀 가면 안 되냐?”
“아, 왜?”
잔뜩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는 것이 정신 사나웠다.
“에라이……. 밥바라 밥바라밥…….”
아무튼 오전 공통 교과 수업이 끝나서 나도 기뻤기에 함께 폴짝폴짝 뛰며 식당으로 향했다.
* * *
첫날이라 그런지 밥은 아주 맛있었다.
급식이라는 게 원체 배만 채우기 위한 것이라는 편견이 있기는 한데, 기억을 떠올려 보면 마냥 못 먹을 밥도 아니었던 것 같다.
“이야……. 음악실 좋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우리는 전공 수업이 실시되는 교실로 각각 이동했다.
나와 태호를 비롯한 실용음악과는 음악실 B.
계단식 강의실이었는데 자리도 띄엄띄엄 넓고, 음향 시설도 잘되어 있어 아주 괜찮은 환경이었다.
과연 시설만큼은 예고에 뒤지지 않는 자율 고등학교다웠다.
“알아서들 앉으세요. 쉬는 시간 끝나기까지 얼마 안 남았네요.”
교실 앞의 교탁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던 음악 선생님이 애들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한다.
“오우. 카리스마…….”
“되게 꼬장꼬장할 것 같아.”
“교양 음악은 점수 쉽게 따기 힘들 것 같은데?”
정갈하게 머리를 쭉 넘기고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안경 쓴 중년 선생님의 외양이 다소 빡빡해 보였는지 학생들은 살짝 긴장한 듯 나름 평을 내려 댔다.
확실히 그런 분위기가 맞았다.
나는 그를 알고 있다.
‘맞아. 교양 음악 담당이 권 선생님이었지.’
음악계에서는 나름 여러 방향으로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분이다.
7080세대에게 있어서는 부드러운 락과 블루스 색의 음악으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선보인 가수이고, 90년도 이후 사람들에게는 A급 프로듀서 혹은 작곡가로 이름 높은 아티스트.
그리고 가수들에게는 호랑이 선생님, 혹은 독설의 황제쯤으로 인식되는 사람이다.
이런 인물이 어째서 유명 예대 교수도 아니고 사립 학교 음악 선생님 겸 트레이너로 재직 중인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배우는 입장에서는 감지덕지지만.
딩동댕동…….
수업 종이 울리고 웅성거리며 떠들던 애들이 모두 착석한 후에야 그는 읽던 책을 내려두고 일어서서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진학반부터 실용음악반까지 교양 음악 과목을 맡고 있고, 실용음악반 전공 실기 강사 중 한 명인 권인찬이라고 합니다.”
나직한 톤이지만 교실 앞부터 저 끝까지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
완고한 성격에 걸맞지 않은 아주 따뜻한 음색이다.
“90년도까지 가수 생활을 했고, 현재는 작곡가 겸 태양고 교사로 지내고 있습니다. 가수 활동은 일감 들어오면 간간이 하는 정도죠. 앞으로 한 학기 동안 여러분과 교양 음악 수업을 진행하게 될 예정입니다.”
권 선생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교양 음악은 공통 교과 과목과 비슷하게 전체 학생들에게 열려 있는 수업이지만, 평가는 음악 계열 예체능 학생들을 위주로 떨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공부를 소홀히 한다면 비전공 학생들보다 낮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걸 명심하셔야 할 겁니다.”
즉 기본적으로 전공자들에게 학과 점수를 만들어 주는 수업이지만, 내팽개치면 페널티쯤은 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여러분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맞죠?”
“네…….”
“여기 모인 여러분들 중 몇 사람이나 계속해서 음악을 생업으로 삼고 살아갈지는 모릅니다. 사실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언제나 잔혹한 것이 음악이라는 일이기도 하죠. 동경을 품고 쉽게 시작해서 좌절감과 함께 미끄러지는 게 일상다반사입니다.”
이전의 공통 교과 수업 시간과 달리 아이들의 눈빛이 꽤나 초롱초롱했다.
애들이 관심을 가진 내용이기도 하고, 현업에서 당당히 성공을 거머쥐었던 음악계 선배의 말씀이기도 했으니까.
“제가 하는 수업의 역할은 그런 식으로 여러분이 미끄러질 때마다 한 발자국 정도는 받아 줄 수 있는 디딤돌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단단하게 쌓아 둔 지식은 예측 못 한 상황에서 큰 힘이 되는 법이니까요.”
관록에서 나오는 수업 개요였다.
교양 음악 수업에서는 폭넓은 범위에서 음악을 배우게 된다.
가벼운 음악사부터 시작해 장르 이해나 기초적인 화성학 정도인데, 음악 활동에 필요한 기반 지식들이 수업 전체를 이루고 있다 보니 교양으로 배우기에도 적절하고, 음악가들에게는 기본적인 지식으로 쌓아 두면 좋은 내용들이다.
‘확실히……. 지식이라는 게 한 번 쓰러져도 딛고 일어나서 계속 도전하게 만들 디딤돌이면서 혹시나 진로를 변경해도 방향을 틀어 걸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긴 하지.’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권 선생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었다.
미래 경험 탓에 조금 낡아 있는 내 생각에 딱 맞는 금과옥조 같은 수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출석 번호 3번?”
선생님의 입에서 갑작스러운 호명이 튀어나왔다.
출석 번호 3번…….
“띃?”
나다.
“있군요. 잠깐 일어나 보겠습니까?”
“앗, 네.”
나는 선생님의 손짓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구. 어디 보자……. 루치아노 학생이군요. 루치아노 학생의 덩치가 커서 뒤의 학생들을 다 가리고 있으니, 잠깐 앞으로 나와 주세요.”
그냥 적당히 가운데쯤 앉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뒤쪽으로 갈 것을 그랬다.
아니, 아니다.
오히려 좋았다.
‘첫 학과 수업부터 이런 관심을?’
하필 3번을 호명하신 것은 순전히 우연이지만, 반 친구들의 시선이 내게 모이고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상황임이 틀림없다.
나는 당당하게 앞으로 나가 자세를 바르게 하고 섰다.
“음악을 생업으로 삼다 보면 다소 억지가 있더라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일어나고는 합니다. 지금 같은 경우는 가만히 앉아서 열심히 수업 개요를 듣고 있는데 선생님이 불러일으켜 나온 상황이죠.”
“하하하.”
권 선생님은 약간의 유머를 곁들이며 본인이 설정한 상황을 설명했다.
“루치아노 학생?”
“네.”
“실용음악, 보컬 전공이군요.”
“네.”
“좋습니다. 지금부터 가벼운 놀이를 하나 해 볼게요. 제가 한 음을 지르면 루치아노 학생은 그에 맞는 화음을 찍어 주면 되는 겁니다.”
말로는 가벼운 놀이라고는 하지만 일단은 청음 테스트 같은 느낌이다.
선생님이 어떤 음을 내는지 듣고 그에 맞는 화음을 맞추는 놀이.
그리 어렵지는 않은 일이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넵.”
“그럼 시작해봅시다. 아아아아…….”
내 대답에 이어 권 선생님이 한 음을 골라 계속해서 끌어갔다.
‘솔. 그럼 대충…….’
순간 음계를 캐치하고 그에 맞춘 음을 내질렀다.
“아아아아아…….”
선생님에 솔에 맞춰 내가 내는 음은 미 플랫.
시나 위 옥타브 도를 낼 수도 있었겠지만, 선생님의 소리가 너무나 부드러우면서 깊게 울리는 소리라 아래쪽 마이너 화음을 넣었다.
이어서 권 선생님이 음을 바꿨다.
“아아아!”
아래로 쭉 내려가 찍힌 음계는 도.
‘지금도 맞는데……. 그냥 지속하기만 하면 재미가 없겠지?’
도와 미 플랫이면 마이너 C에서 딱 맞는 화음이지만, 기껏 놀이라는 탈을 쓰고 있는데 나도 놀아 주지 않을 이유는 없다.
나도 따라서 음을 옮긴다.
“아아아아…….”
이번에는 솔 플랫. 내가 윗자리 화음을 차지했다.
순간 선생님의 얼굴에 미소가 살짝 번지고, 그의 손이 올라오며 소리가 멎었다.
“여기까지.”
“휴.”
“금방 루치아노 학생이 어떤 음을 냈는지 모두 들었겠죠?”
“네.”
“마이너 스케일…….”
“맞습니다.”
한 친구의 답에 권 선생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이너를 잡았다가 제가 도로 음을 내리자 또 반음 내려가는 화음인 디미니쉬드 쪽을 구성해 주었죠. 평범하게 도미솔이든 솔시레든 메이저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물어왔고, 나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 그럴까 했는데 소리를 깊게 내셔서……, 조금 어두운 쪽 노래를 연상하신 게 아닐까 해서 마이너로 넣었습니다.”
“호오……. 좋습니다. 자리에 앉아 주세요.”
“넵.”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원래 앉았던 자리로 돌아오자 권 선생님의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좋은 발상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부름이었고 뜬금없는 상황이었죠. 첫 수업인데 설명하다 말고 일으켜 세우더니 화음 맞추고 놀자는 거야. 그런데 당황하지 않고 제 목소리를 듣고는 이건 마이너가 어울리네 하면서 그대로 받았어요.”
빙긋 웃은 중년 신사가 기쁜 얼굴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아마 루치아노 학생은 어떤 방향에서든 음악 공부를 꽤 오래 해 온 것 같습니다. 맞나요?”
“아, 네…….”
“이렇게 기본적인 지식이 쌓여 있었기에 조금은 갑작스러웠던 사건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자기 색깔을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저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결국 이번 수업의 목표를 설명하기 위한 실험 무대였다는 뜻.
“이야…….”
“전공 수업이라도 학년 공통이라서 별로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수업 괜찮은 것 같다.”
“그러게. 선생님 되게 좋은 듯.”
그의 의도는 학생들에게 훌륭하게 들어 먹힌 듯싶었다.
“그럼 여러분도 이 교양 음악 수업을 계기로 삼아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발판을 다지길 기원하면서, 첫 수업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아직 다른 수업을 하고 있는 반이 있을지 모르니까 천천히 조용히 교실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권 선생님은 따로 반장을 시켜 인사를 올리는 일도 없이 학생들을 내보냈다.
“매점 들렀다 가쉴?”
“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발판이라…….’
수업 개요에서 들었던 앞으로 배울 것들은 대개 중학교 때 따로 배웠거나 음악 생활을 하며 익혔던 것들이다.
하지만 하나씩 되짚어 가며 기본을 다지는 데에는 꽤 좋을 것 같았다.
‘나쁘지 않아.’
나는 작게 마이너 스케일을 흥얼거리며 태호를 따라 별관 뒤쪽의 매점으로 향했다.
* * *
“루치아노 학생…….”
권인찬은 출석부를 다시 들추며 금방 봤던 재밌는 학생의 이름을 확인했다.
노래 한 곡을 완창한 것도 아니고 발성 스킬을 본 것도 아니지만, 수업에 임하는 자세도 그렇고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도 그렇고 유별난 구석이 있는 학생이었다.
“마이너라……. 마이너……. 특이한 길을 밟네. 메이저가 아니라 마이너에 디미니쉬드 스케일. 허허. 재밌어.”
인상 깊은 부분은 더 있었다.
“재밌는 만큼 지나치긴 쉽지만, 호흡도 좋고 발성이 안정적이야……. 끝까지 음이 흐트러지지 않은 걸 보니 여유도 있었고……. 아마 계속했으면 내가 먼저 숨이 차서 그만뒀겠지.”
권인찬 역시 한 음 내기 같은 것은 어디서 꿇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이 학생은 그보다 더했다.
기본적인 피지컬 자체가 아주 훌륭하고, 발성 기초 역시 안정적이고 탄탄한 학생이었다.
이런 학생들이 있으니 대학교보다 고등학교 쪽이 가르치는 맛이 있구나 싶어, 그는 허허 웃었다.
오늘 수업에 들어왔던 학생들 중 기억에 남는 몇몇이 그의 뇌리에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평소처럼 화음 놀이 같은 가벼운 장난이 아니라 애국가 제창을 시켰다면 또 어땠을까 싶었다.
어쩌면 자기 기대보다 더욱 좋은 노래를 불렀을지 몰랐다.
“언질이나 해 둬야겠군.”
그는 전화기를 들고 이 소식을 반길 만한 제자의 연락처를 찾았다.
오늘 마주한 몇몇 재밌는 학생들의 이야기를 해 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