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ckstar RAW novel - Chapter 94
93화
영어 가사를 쓸 사람.
‘이거 은근 큰일인데?’
난제다.
우리 밴드에서 그나마 작사 작곡에 신경을 쓰는 것은 나와 수현이.
수현이는 영어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니고, 내 경우는 회화쯤이나 어느 정도 가능하고 더듬더듬 사전을 뒤져 가며 논문까지는 볼 수 있지만, 영어로 가사를 쓸 정도의 영작 실력은 없다.
애초에 그만큼 재주가 있었으면 공부로 대성했으리라.
‘각운 맞추는 것도 어려울 거고, 내 허접한 영어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온전히 표현하기도 힘들 거야.’
영문 가사를 만들 때는 각운, 흔히 라임이라고 부르는 그 운율을 맞추는 것이 퍽 중요하게 여겨진다.
Ol’ man river, that ol’ man river. He must know something, but he don’t say nothing.
He don’t plant cotton. Them that plants ‘em is soon forgotten.
거의 100년 전에 나온 노래의 가사에서도 보이는 각운.
나는 뜻과 리듬감이 절묘하게 융화된 그 선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한국에 영어 가사를 전문으로 쓰는 작사가가 있던가?’
그렇다고 당장 가사를 맡길 사람도 없다.
영어로 된 가사를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을 찾기도 힘들뿐더러, 자칫 잘못하면 기계적인 통번역에 의존해 한국어 버전과 영어 버전의 괴리가 생길 확률이 높았다.
물론 해외 작사가에게 컨택을 넣어도 되겠지만, 시간도 오래 걸릴 테고 무명인 우리에게 이름값 높은 사람이 붙을 리 없다.
‘지금이라도 영어 공부를 해야 되나?’
열심히 생각을 해 봤지만 좋은 수가 떠오르질 않았다.
“뭘 고민해?”
그때 박창희 베이시스트가 엄지를 척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형이 써 줄게!”
“오?”
이 곡의 작곡가가 직접 작사가 역할을 자청했다.
‘그러고 보니 이 선배님 작사도 수준급으로 하시지 않았던가?’
그는 디밴드의 베이시스트이자 나름 히트곡도 몇몇 만든 작곡가임과 동시에 꽤 괜찮은 작사가이기도 했다.
작사가로서 그렇게 명성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의외로 영어 능력자였기에 디밴드가 미국 시장에 도전했을 때 번안과 작사를 혼자 맡은 바 있을 정도.
“형님이 써 주신다면 저희야 환영, 대환영이죠!”
그 호의에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흐허허허. 그래. 그러면…….”
그는 작업비도 따로 받지 않고 저작권료만 가져간다면서 신경을 써 주었다.
이 정도면 거의 부담스러울 지경이었지만, 마음에 든 후배들에게 이 정도는 당연히 해 줘야 한다며 그는 껄껄 웃었다.
“이 밴드 바닥이 얼마나 더럽냐. 쉽게 쉽게 들어왔다가 쉽게 또 포기하고, 아득바득 버텨 보면 성공하기는 또 더럽게 어렵고.”
“그건……. 그렇죠.”
접하기도 쉽고, 배우기도 쉽다.
그래서 가볍게 들어와서 익히다가 차가운 현실에 쉽게 좌절해 떨어져 나가는 밴드맨들이 부지기수.
“후배들이라고 반갑게 인사했다가 금방금방 사라져 없어지는 애들 보면 그게 또 가슴이 아파.”
힘든 초반을 버티고 본격적으로 시장에 진입해 발전을 꾀할 때부터는 또 배고픈 하루하루가 기다린다.
결국 끝까지 남는 건 아득바득 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기반을 다진 사람이거나, 한 발자국 물러나는 타협을 한 사람이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밥 대신 꿈을 먹는 사람들뿐이다.
“너희도 나중에 가면 알 거다. 유망한 후배가 눈앞에 떡 나타나면 얼마나 예뻐 보이는지 말이야.”
박창희 베이시스트는 가만히 고개를 까딱거리며 웃었다.
나중에 더 자라고 더 경력을 쌓은 뒤에 보면 무슨 느낌인지 알 것이라는 듯.
이 자리에서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마 나뿐일 것이다.
‘잘 배우고 잘 자라는 학생들이 얼마나 예뻐 보이는지는 나도 잘 알지.’
그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기분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아는 만큼 감사히 그 기회를 손에 쥘 생각이다.
가장 큰 보답은 그가 준 기회를 발판 삼아 더더욱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임을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심지어 내가 어떤 걸 던져 줘도 자기식으로 소화할 것이 보이는 애들에게 주는 거라면? 나 역시 영광이지. 베이시스트 말고 작곡가로서. 창작혼이 타오른다고. 무슨 뜻인지 알지?”
“기대를 너무 크게 받아서 부담스러운데요.”
“뭐, 첫 앨범이니 대차게 망할 생각으로 달려 보면 되지. 그렇다고 진짜 망하라는 기도는 아니니까, 응? 알지?”
“하하. 당연하죠.”
우리는 좋은 곡을 넘겨주고 수고스러운 일까지 맡아 주기로 한 박창희 베이시스트에게 깊게 고개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냐. 우선 곡부터 건드려 보자. 아까 들려준 원안에다가 붙일 멜로디 두 개를 먼저 틀어 줄 건데…….”
그리고 다 함께 곡에 대해 자세히 파고들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일의 진행을 고민하던 것이 피곤하지도 않은지, 모두가 귀에 들어오는 음악의 발전 방향에 금방 깊게도 깊게 빠져들었다.
“퍼스트 기타가 리프로 시작을 열고, 두 마디 직후에 베이스, 드럼, 리듬 기타가 따라붙으니까 이펙트는 최대한 거칠게…….”
“응, 그게 제일 간편하고 임팩트 주기가 쉽지.”
“드럼, 베이스만 먼저 붙고 두두두둥 하면서 포인트를 준 다음에 리듬 기타까지 뛰어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것도 괜찮을 것 같네. 둘 다 들어 보자.”
어린 천재들이 각자 맡은 파트를 면밀히 살피며 어떻게 꾸며야 더 아름다울지를 토해 내고, 경험 많은 선배가 그것을 정리해 묶어 곡에 반영한다.
그야말로 빛나는 아이디어의 향연.
편곡에 직접적으로 손을 들이미는 경우가 잘 없는 재우와 라희도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말하면서 참여하니, 악보가 순식간에 번쩍번쩍하는 완전체가 되어 갔다.
“우리 밴드는 언제든 정박으로 멱살 잡고 끌어올 수 있는 드러머가 있으니까 조금 더 복잡해도 됨.”
“리프를 조금 고치고 싶다는 뜻이지? 더 화려하게.”
“어차피 님들 만지다 보면 베이스도 더 화려해질 거 아님? 차라리 처음부터 대놓고 복잡해 버리는 게 나을 듯.”
“그것도 그렇지.”
“얘기 나와서 말인데, 전주, 간주, 후주 전부 리프 강조가 있더라고. 마지막 부분 기타 리프를 베이스 리프로 대체해도 신선할 것 같은…….”
처음부터 화려하게 만들어진 하드락 스타일의 곡. 각 연주자들이 자신의 상상력을 투영해 의견을 내기에 딱 좋았다.
과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있는 대로 오버를 하면서 다 불태우는 노래이기에 화려하고 복잡하고 난리를 쳐도 나름의 맛이 있을 것 같았다.
“이건 이런 식으로…….”
얘기로만 하기에 답답했는지 재우가 기타를 꺼내 아예 시범을 보이며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해 버린다.
그걸 또 찰떡같이 알아들은 멤버들은 이에 맞춘 아이디어를 또다시 뱉어 내고, 창희 형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악보를 만진다.
‘빠른데?’
눈 한번 깜빡이면 곡이 달라져 있을 정도로 일의 진행 속도가 매우 빨랐다.
모두가 열정을 불태우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우리는 계속해서 곡에 이것저것을 가져다 붙이고, 수정을 가해 가며 토론을 나누었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창희 형님이 우리에게 말했다.
“그런데 얘들아.”
“네?”
“넹?”
왜 부르냐며 존경스러운 선배님을 바라보는 우리.
그가 말했다.
“너희 여기서 편곡도 전부 하고 가려고?”
“앗.”
“아.”
시계를 보니 이미 숫자 8을 넘어가고 있는 시침.
꽤 늦은 시간이었다.
“안 되나요?”
“어……. 형이 그래도 집에 가긴 가야 하니까……. 작업실에서 살 순 없잖…….”
“아…….”
“힝…….”
“쫓겨나는구나…….”
애들의 표정이 급격히 시무룩해지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박창희 베이시스트가 움찔하더니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 이제 어디로 가지…….”
“큰일이네…….”
“편곡 작업 더 하고 싶었는데…….”
묘하게 음울한 목소리로 종알거리는 애들의 모습을 보며 창희 형님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리고는 곧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하……. 밥부터 먹고 하자. 오늘은 집에 못 들어간다고 말해 놔야겠구먼…….”
“와!”
“예!”
단숨에 밝아지는 애들의 표정과 목소리.
이것들 백 퍼센트 연기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확 들었다.
‘와, 이 악마 같은 녀석들.’
그도 그럴 것이…….
씨익.
“성공.”
“대박.”
짜악!
진짜 쫓겨나는 것이 서러워 침울해졌던 거라면, 박창희 베이시스트가 전화를 한다며 몸을 돌려 나가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하이 파이브를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너희 진짜…….”
“나이 어린 것도 잘 이용하면 무기라며?”
“나도 들었음.”
“다, 다 루치한테 배운 거야.”
아니, 그건 방송 얘기지.
“일상생활에서 써먹으라는 팁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어쩌겠나? 일단 눈에 든 것이라면 뭐든지 배울 의지가 충만한 이 녀석들 앞에서 모범적이지 못한 수작을 보기 좋게 선보인 내 잘못이지.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물론 나는 같은 나이라 녀석들에게 말려 뭔가 사기를 당할 일이 없으니 상관은 없겠다만.
“너희들 짜장 괜찮냐?”
“좋아요!”
“넵넵!”
“그럼 저녁은 중식이다! 대신 차 끊기기 전에 돌아가야 해!”
“넵!”
불쌍하게도 제대로 낚여 버린 창희 형님은 사기꾼 놈들의 배를 채워 주기 위해 짜장면까지 시켜 대령하게 되었다.
‘까마득한 대선배의 작업실에 눌러앉아 넉살도 좋게 밥까지 얻어먹게 되다니.’
묘한 기분이었다.
“맞다. 다시 기타. 난 이 부분을 그냥 쭉 당겼으면 좋겠음.”
“어……. 당긴다는 게 무슨 말이야? 박자를? 슬라이딩을?”
“이렇게, 이렇게.”
지이잉! 지이이잉!
“아하. 그러면 딱딱딱 부분에서 합쳐지는 소리를 조금 더…….”
녀석들은 밥을 먹는 도중에도 뭔가가 떠오르면 악기를 두드리며 아이디어를 기록했다.
도대체 이게 뭔 상황이냐 싶긴 하지만, 아무튼 연주자들끼리 직접 열변들을 토해 내며 곡을 꾸미는 것을 보니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 아닐까.
‘새벽에 수현이랑 둘이서 눈 부릅뜨고 편곡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고 말이지.’
여기서 방향성을 제대로 잡고 가면 나중에 여러 차례 수정을 거치며 편곡할 필요가 없으니, 내 입장에선 그야말로 개이득 소이득 말이득인 셈이다.
어느 정도 의견을 받아 정리한 후 내가 자연스럽게 수정해야겠지만, 그게 어디인가?
난데없이 집에 늦게 들어가게 생긴 창희 형님에게 죄책감이 들긴 하지만…….
‘오늘은 일찍 잘 수 있겠군.’
나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최근 곡 작업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사는데, 재능 넘치는 우리 멤버들의 고사리손으로 곡을 빠르게 완성할 기회가 왔다.
지금까지 무리했으니 오늘 정도는 조금 편하게 가도 괜찮으리라.
슥.
작업은 애들에게 대부분 맡겨 놓고 나는 슬쩍 뒤로 빠져서 그 장면을 구경했다.
아.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