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ckstar RAW novel - Chapter 98
97화
다시 모두가 촬영장에 모였다.
“금방 있었던 언급은 편집될 거고요, 아예 없었던 일처럼 촬영 계속 진행하시면 됩니다.”
“넵.”
“네에.”
앞선 현태섭의 발언은 편집이 될 것이라는 공지가 있었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감정싸움인 것 같은데, 정확히는 일방적인 적의인 것 같은데 굳이 프로그램이 엮일 필요는 없지.’
PD 입장에서는 꽤 불편한 상황이었을 것이고,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지 않았을 터.
모르긴 몰라도 저놈들이 꽤나 밉보였을 것이라는 정도는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촬영 들어갑니다!”
“큐 사인은 호랑 씨가 직접 넣어 주세요!”
“넵! 레디!”
촬영이 재개되었다.
“저번에 보니까 데드록커스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쁘띠한 복장을…….”
“아, 저희가 그런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가 좀 있는데, 특히 할로윈 같은 때가 또 저희 같은 밴드들한테는 대목이거든요? 나름 홍보를 위해서 조금 눈에 띄게…….”
다시 토크가 진행되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촬영이 이어졌지만, 주목할 만한 점이 있었다.
‘완전히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이네.’
그것은 바로 피넛버터에게 제대로 된 토크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
“이야, 김희정 씨가 의외로 카리스마 리더군요? 여리여리하고 아리따우셔서 굉장히 화사하고 따뜻한 성격일 것만 같은데…….”
“학! 하학! 제가 사실 보이는 거랑 다르게 조금 유별나고 시끄러운 구석이 있어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 럭키데이도 만만치 않죠?”
“저, 저희요?”
“저희는 완전 정상인데요!”
“이야, 바로 자기들이 정상이라고 하는 거 봐. 여기서부터 완전 돌아이 기질이 나오는 거죠. 보통은 그렇게 말하지 않거든…….”
우리와 또 다른 게스트인 데드록커스가 MC 연호랑에게 여러 질문을 받고 답하는 사이, 피넛버터는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리액션 셔틀 역할이나 해야 했다.
그나마 휴식 시간 전까지 대놓고 보였던 적대적인 반응을 꾹 눌러 참고 있는 듯하니 다행이긴 한데, 이렇게 해서야 분량 확보가 될는지 의문이었다.
‘MC한테도 미운털 제대로 박혔네.’
하긴 그 전까지 토크에는 제대로 참여하지도 않고 우리 팀을 까내리는 데에만 집중하다가,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으로 프로그램 진행자를 곤혹스럽게 만든 만큼, 그런 대우를 받아도 딱히 할 말은 없을 것이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는!”
한참 동안 토크 분량을 뽑아낸 후, 코너 아닌 코너를 보여 주기 위해 연호랑이 시동을 걸었다.
“또 안 보고 넘어가면 섭섭하죠? 싱 앤 톡의 인기 코너!”
“어, 코너 구분이 따로 있었나요?”
“쉿! 제가 그렇다면 그런 겁니다. 인기 코너! 게스트들의 장기자랑 한마당입니다!”
“와…….”
“낡았다. 멘트.”
“조용, 조용!”
대충 이어질 코너를 소개하고 다른 출연자들과 티키타카를 나눈다.
고전적이고 식상하지만 이후 이어질 내용에 대한 기대감을 올리는 좋은 진행이다.
‘괜찮네.’
확실히 꾸준히 인기 있는 방송 프로그램은 그 이유가 있구나 싶었다.
애초에 정식으로 코너를 따로 만들지 않았기에 토크 중간중간 양념 역할로만 놔둘 수 있어서 크게 부담이 없다. 그러니 편하게 놀 수 있어 좋다.
반면 코너 자체는 게스트 각각의 매력도 잘 보여 줄 수 있고, 재주가 뛰어나지 않으면 그냥저냥 귀여운 퍼포먼스 정도로 얼버무려 주니, 효과 자체는 훌륭하다.
그리 특별한 내용도 아닌데 진행이 편안하니 승차감 훌륭한 택시를 얻어 탄 기분이었다.
“우선 모던락과 메탈을 넘나들며 맹활약 중인 우리 데드록커스! 어떤! 대단한! 장기를! 준비했을지! 과연!”
“하학학학! 부담 좀 주지 마세요!”
연호랑이 과장된 연기로 흥을 북돋고, 데드록커스가 천천히 자리를 잡았다.
보컬 하나, 기타 둘, 베이스 하나, 드럼 하나. 다섯 사람이 옹기종기 모이니 제법 모양이 살았다.
그리고 뭔가가 시작되었다.
“핫, 둘, 셋, 넷!”
“뿜치! 뿜치! 뿜치! 뿜치치!”
“둠둠, 둠둠, 둠두둠, 둠둠…….”
‘오? 아카펠라?’
진귀한 광경이다.
“Don’t you step on a snake.”
“Oh, oh, oh…….”
“It will kill you, just take a break…….”
방송 촬영하러 왔다가 락 밴드가 아카펠라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심지어 잘해.’
보통은 할 수 없는 경험이다.
악기 들고 떠들썩하게 뛰는 거 좋아하는 장르를 주로 파는 뮤지션들이 아카펠라라니.
심지어 노래는 악기들이 하고 보컬은 비트박스를 넣고 있다니!
진풍경이었다.
“와아아아!”
“잘한다!”
“아니, 락 밴드 맞아요? 이걸로 밀고 가도 되겠는데?”
“푸학학학!”
첫 스타트부터 어마어마한 걸 봐 버렸다.
분위기도 제대로 살았고, 내용도 충분히 이슈가 될 만큼 훌륭했다.
세상에 인디 신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밴드가 조그맣게 모여 아카펠라를 한다는데, 심지어 카리스마 넘치는 비주얼의 여성 보컬 김희정이 비트박스로 박자를 만들어 주고 있는데 그걸 안 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대박이네. 와.”
MC 연호랑도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아카펠라를 가지고 나온 팀은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럼 다음은 피넛버터 한번 보겠습니다. 준비한 거 있으신가요?”
그리고 이어진 피넛버터의 차례.
활기찼던 금방까지와는 달리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가 촬영장에 깔렸고, 연호랑의 태도 역시 게스트를 띄워 주기에 바빴던 방금과 달랐다.
“저희는 모창을 준비해 왔는데요, 한 곡을 같이 부르는 여러 선배 가수님들의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네, 기대가 됩니다. 보여 주시죠.”
무미건조.
오버스러운 멘트로 분위기를 띄우거나, 게스트의 긴장을 풀어 주는 농담도 없이 빠르게 하고 넘어가라는 듯한 눈치였다.
“그, 그러면 시작해 보겠습니다…….”
멤버들의 반주와 함께 현태섭의 모창이 시작되었고.
“워어얽! 크대느은! 나헤에게엙!”
“흠…….”
“아…….”
반응은 싸늘했다.
“너므늘 스릉흐……. 느므늘 그윽히…….”
‘이건 좀…….’
유머의 선을 제대로 타지 못한 모창이다.
분위기가 아주 좋았을 때야 혹시 모르겠지만…….
“훠우워어엉!”
꽤나 많은 선배 뮤지션들의 버릇을 차용해 우습게 따라 하는 건데, 포인트를 잘 잡긴 했어도 과한 면이 없잖아 있다.
그걸 재밌게라도 했다면 모르겠는데, 이런 류의 흉내는 주변 사람들의 리액션에 따라 재미가 정해지는 법.
“…….”
이미 진행자는 그들의 장기를 살려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모창이라는 행위 자체에 충실하냐면 그것도 아닌 게, 확실히 가수들의 버릇들을 잘 캐치해 선보이고는 있지만 소리가 비슷하냐면 글쎄 소리가 절로 나온다.
‘진심으로 이게 먹힐 거라고 생각한 건가?’
호응이 필요한 퍼포먼스다.
그들도 머리가 있다면 휴식 시간에 뭔가 대책을 짜 왔어야 했다.
자신들이 직접 분위기를 망쳐 놓은 직후였으니, 어떻게든 반전시킬 계기를 만들고자 노력했어야 했다.
하지만 저들은 그러지 않았다.
‘회사에서 짜 줬거나, 그런 식으로 일을 잘 넘기는 임기응변 능력이 부족하거나.’
그도 아니면 벌인 일을 뒷수습할 의지도 없을 정도로 게으르거나.
말이 우습게 꾸며 보여 주는 것이지, 경우에 따라서는 예의 없이 놀리고 비꼬는 퍼포먼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시간이 있었다.
이에 대처하지 않음으로써 오늘의 촬영은 그들의 무능과 무례를 부각시키는 방송으로 남게 생겼다.
‘잘된 일이지.’
보낼 놈 보냈다.
딱히 내가 펀치를 날리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쓰러지고 있다.
“네……. 잘 들었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피넛버터가 그들의 쇼를 마치고 앉는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밴드뿐이다.
“이제 우리 럭키데이만 남았군요.”
“크……. 이 팀은 뭘 보여 줄지 또 기대돼요. 응?”
재미없는 장기 자랑으로 자기들 스스로 무너져 버렸지만, 그걸로 용서할 생각은 없다.
‘쐐기골 박아 주러 한번 가 볼까?’
확인 사살을 갈겨 댈 준비는 확실히 되어 있다.
“크큭. 우리 차례인가.”
“아아. 오랜 기다림이었다.”
한 손은 이마에 짚고, 안면 한가득 썩소를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낯부끄러운 연출이지만, 좋아할 사람들은 좋아할 중2병 콘셉트의 짤막 콩트.
이것도 다 어리니까 할 수 있는 거다.
‘라희 잘하네.’
타이거 마스크 뒤집어쓰던 시절부터 묘하게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에 재능이 있는 라희가 옆에서 쿵짝을 맞춰 주었다.
“푸하하하!”
“뭐 하는 거야, 얘네!”
과연 한순간 뻘하게 웃기는 것에 성공했다.
나는 부끄러운 척 빠르게 자세를 정돈하고 그 호응에 탑승하며 우리가 선보일 장기를 소개했다.
“저희가 여러분들께 보여 드릴 것은 바로…….”
“바로?”
“섞어송입니다.”
“섞어송?”
다소 생소한 개인기 이름에 사람들이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다들 모르는 와중 연호랑이 혼자 무릎을 탁 쳤다.
“아! 그거 글라스박스 분들이 자주 보여 주던 그거 맞죠?”
섞어송.
2인조 발라드 듀오인 글라스박스가 예능에서 자주 선보이던 기묘하고 신기한 음악 놀이다.
“네, 그거 맞아요. 저희가 같은 학교에 다니다 보니까 넷이 같이 다니면서 연습을 하기가 쉽거든요? 그래서 거의 매일 합주를 하는데, 가끔 저희 곡을 연습하다가 심심하면 음악으로 할 수 있는 별의별 짓을 다…….”
나는 천천히 우리가 섞어송이라는 것을 익히게 된 배경, 섞어송이 무엇인지 따위를 설명했다.
하루는 우리가 영국의 전설적인 밴드 더 비틀의 노래, Just let it go를 연주하다가 머니 코드에 대해 고찰할 때였다.
“어차피 코드가 같으면 부르다가 섞어도 되는 거 아님?”
재우가 던진 합리적인 의문이 발단이었다.
머니 코드를 차용해 같은 코드 진행을 가진 수많은 노래들.
멜로디야 다르다지만 코드 진행이 같으니 조만 맞추면 전부 이어서 불러도 괜찮은 것 아닌가?
“하하. 그것참 이상한 생각이구나.”
모두의 생각이 일치했고.
“당장 해 보자.”
우리는 실제로 그것을 해 보며 여러 레퍼토리를 만들고 놀았다.
“이야, 이게 되네.”
“몇몇 노래는 진짜 자연스러운데?”
“이런 거 또 없나?”
“더 붙여 보는 건 어떰?”
코드 진행이 똑같은 노래들에서 몇몇 마디들을 골라 그대로 이어 놓은 메들리.
약간의 멜로디 변형을 통해 어색함을 줄이는 과정도 재밌었고,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잘 이어지면 그 쾌감도 적지 않았다.
여러 곡을 연주하며 편곡이나 합주에 대해 나름 배우는 것도 많았고, 그 자체로도 꽤나 재밌는 놀이였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이 노래 섞기 놀이를 즐겼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이미 오래전부터 선배 뮤지션 분들이 섞어송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선보이던 거더라고요?”
“크……. 이 사람 생각이라는 게.”
“다들 비슷비슷하지.”
“하하하. 아무튼 그래서 저희는…….”
우리 이야기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리액션을 해 주면서 집중력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이다.
감히 가만히 있던 우리를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할 때가 왔다.
“여기 계신 피넛버터 님들의 노래 몇 개를 섞어서 한번 불러 보려고 합니다.”
빅엿을 선사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