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10)
EP.10 흑산적(1)
거록공방전을 끝으로 황건적의 난은 종식되었다.
미처 토벌하지 못한 황건적 잔당이 어딘가에 있을 수는 있으나 적어도 본거지라 할 수 있는 기주 황건적은 전부 소탕되었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면 아무것도 안 했다.
장료 근처에서 조조가 계속 맴돌고 있더라고.
아무리 봐도 나를 노리는 것 같아서 여포를 보내 당분간 군 지휘를 장료에게 맡긴다는 말만 남기고 요리조리 숨어지냈다.
왜 대체 무엇 때문에 내게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그만둬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동안 숨바꼭질을 하며 지내길 며칠.
병주에서 급하게 전령이 찾아왔다.
급하게 말을 타고 달려온 전령이 땀을 뻘뻘 흘려댔다.
“장연(張燕)이 이끄는 흑산적 10만 대군이 병주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
결국 올 것이 왔다.
──────────
황건적의 난을 틈탄 흑산적의 본격적인 등장.
그 좁아터진 산속에서 그만한 숫자가 나오는 게 말이 되나 싶다.
본래 역사에서 사예주 북부, 병주 전체, 기주 북동을 점거한 최대 규모였을 땐 흑산적은 1백만이라는 무식한 숫자를 자랑했다고 한다.
뻥튀기가 좀 되어있을 거란 걸 고려해도 엄청나게 많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병주에 자리 잡지 못하게 눈에 띌 때마다 계속 후드려 팼는데도 이 정도라면 과연 이조차 안 했을 땐 얼마나 됐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괜히 본래 역사에서 조정에서도 도적들에 불과한 흑산적에게 관직을 내려주고 흑산적의 자치를 인정한 게 아니란 말이지.
관직까지 받고 관리를 조정에 천거할 권리를 얻은 흑산적.
자신들의 세상이 왔다고 즐거워할 무렵 기주에 흑산적 예의 주입기가 나타난다.
원소.
공손찬과 싸우느라 정신없던 원소의 뒤통수를 치며 원소 휘하 지역인 위군을 점령하자 눈이 돌아간 원소의 집요한 반격에 전투마다 몇만씩 잃으며 대패.
흑산적은 원소에게 처맞고 예의 주입을 당한 채 쭈그리가 된다.
결국 장연은 원소에게 영혼까지 털리고 쥐죽은 듯 살다가 관도대전 이후 상승세를 타는 조조에게 항복한다.
10만이라는 군사를 이끌고 조조에게 항복했으나 조조는 장로와 장수에게 온갖 대우를 해줬던 것과 달리 장연에게는 겨우 식읍 5백 호만을 내렸다.
그러나 장연은 그에 만족하며 조용히 살다 죽었다고 하지.
뭐라고 해야 할까.
젊을 때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날뛰다가 여러번 호되게 맞고 자기 주제를 알아버린 놈.
엄청나게 현실적이네.
하여튼 지금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할 시절의 장연이니 싸우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저 도적들이 병주 전체를 다 잡아먹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
원소가 할 걸 내가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흑산적은 숫자만 많을 뿐 결국 도적들 연합에 불과한 놈들이라 조직력이 아주 개똥이다.
내부 분열도 심심찮게 일어나는 오합지졸.
황보숭 장군에게 양해를 구하고 병주로 돌아온 나는 군대를 정비하며 흑산적을 기다렸다.
내가 데려온 병사들이 전원 기병이었기에 흑산적이 도시에 도달하기 전 빠르게 병주로 돌아와 재정비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장각 자매들도 잊지 않고 데려왔다.
관군들은 장각을 찾아야 한다며 여전히 거록을 뒤엎고 있었다.
들킬 일은 없겠지만 만약 몰래 빼낸 것이 걸린다면 어떻게 될까. 좀 궁금하긴 했다.
“듣자 하니 흑산적 수령 장연이란 놈이 제비보다도 몸이 날래다면서?”
내 옆에서 여포가 몸을 풀며 입을 열었다.
“걔 별명도 너랑 똑같이 비장이었을 걸.”
“하! 재밌네.”
진짜다.
그렇기에 도적들이 감히 반항할 생각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
정말 비장이라 불릴 수준이 될까? 나는 잘 모르겠다.
재밌다는 듯이 여포가 씩 웃었다.
“그래도 천하무쌍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사실 내 뒤에 있는 서여가 진짜 천하무쌍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서여가 그 칭호에 관심이 없는 것 같으니 현재 천하무쌍은 여포가 맞다.
그렇게 성벽 위에서 여포와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저 멀리서 흙먼지를 휘날리며 기세등등하게 진군하고 있는 흑산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로 떨어져 진형도 갖추지 않은 오합지졸. 각개격파라도 해달라는 뜻인가?
누가 도적들 아니랄까 봐 멀리서도 파벌이 나뉜 게 눈에 보였다.
정말 수적 우위만 믿는 그 모습에 여포가 코웃음을 쳤다.
“흥. 10만이라고 했지?”
“그래.”
“적어도 오늘 3만 이하로 떨어질걸.”
자신만만한 여포의 모습에 나는 미소지었다.
그런 내 모습을 여포가 새초롬하게 쳐다봤다.
“왜 웃어?”
“자신만만한 게 보기 좋아서.”
“그러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왁왁 소리 지르는 여포를 뒤로하며 나는 멀리서 다가오는 흑산적들을 바라보았다.
이긴다 쳐도 산에서 한 번은 싸워야겠는데.
가만히 내버려 두면 수를 불려서 또 쳐들어올 테니 아예 뿌리를 뽑아버려야 한다.
짐승도 자기 집에서 반은 먹고 들어가는데 산적들은 산에서 얼마나 먹고 들어가겠는가.
잠깐 생각에 잠긴 나는 고개를 돌려 서여를 바라보았다.
“……?”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쳐다보기만 하자 서여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나 지켜줄 수 있지?”
솔직히 도적 두 명만 붙어도 억하고 죽을 자신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싸우는 타입은 아닌가 봐.
선천적으로 타고 나야 장수가 될 수 있는 것 같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네. 무조건.”
내 물음에 서여가 결의가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
상당을 공격하던 흑산적은 어렵지 않게 격파했다.
수비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공성전인 데다가 도적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했으니 수가 많아도 그를 이끌 엄청난 인물이 없는 이상에야 도시를 함락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눈여겨볼 인물인 장연조차 본인의 무력만 뛰어날 뿐이지 병사를 지휘하는 건 평범했으니 다른 도적 수령들은 어떻겠는가.
결국 병사를 크게 잃고 물러난 흑산적을 새벽을 틈타 기습.
흑산적은 비명을 지르며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헐레벌떡 도망가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아. 장연은 제일 먼저 도망쳤다.
“비장이라는 놈이 제일 먼저 꽁무니를 빼?! 돌아와서 한 판 붙자고!”
기습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백 명을 넘게 죽여버린 여포가 말에 탄 채로 성을 냈다.
피칠갑을 한 상태로 저리 살기를 흩뿌려대는데 누가 안 도망가겠냐.
“크아악!”
서여는 내 주변을 지키며 도적이 내게 조금 가까워졌다 싶으면 망설임 없이 검으로 베어버렸다.
근데 휘두르는 게 안 보여. 그냥 도적들이 오다가 갑자기 피를 뿌리면서 자기 혼자 쓰러지는 모습으로밖에 안 보였다.
장료나 위속 같은 장수들도 각자 병사를 이끌면서 도적들을 쓰러트리고 있었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흑산적은 무기를 버리며 항복하기 시작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갖 곳에 널려있는 시체들.
여포의 말처럼 7만은 오늘 이 상당에서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전쟁에서 가장 사상자가 많이 생길 때가 부대가 패전하고 도망갈 때라 하니 새벽이 끝나기 전에 더 많이 죽어 나가겠지.
이래서 전쟁이 싫다.
사람이 마치 벌레처럼 죽어 나가는 세상.
여러 번 겪는 일이라지만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는 참혹함이었다.
여기서 더 생각해봤자 기분만 우울해지니 빨리 끝내고 당분간 놀아야지.
워낙 숫자가 많아서 놓친 흑산적들이 상당했다.
일단 하루 쉬고 산맥으로 뒤쫓아가서 결정타를 가해야한다.
그땐 오늘보다 좀 더 어려운 전투가 될 거다.
흑산적도 죽을 듯이 달려들 거고 시야 확보가 어려운 숲이니 산의 지리를 꿰고 있는 장연에게 무조건 기습받을 거다.
피해가 커질 수도 있는 일. 하지만 병주를 안정시키기 위해선 꼭 필요한 일이었다.
빌어먹을 흉노랑 선비만 있어도 이 병주는 충분히 지옥이다. 바퀴벌레처럼 늘어나는 산적까지 필요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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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갑옷도 제대로 챙겨입지 못한 채 헐레벌떡 말에 타고 달아난 장연은 생각했다.
분명 도적들을 규합한 1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군세가 나를 따르고 있었다.
근데 그게 이렇게 하루 만에 대부분 갈려 나갔다.
뭐가 문제였을까.
지리멸렬한 내분? 병사들의 정예도? 아니면 그 귀신 같았던 핏빛 장수?
장연은 이를 까득 물었다.
괜찮다. 아직 자신과 같이 도망치고 있는 3천이라는 정예병이 남아있고, 다른 도적 수령 휘하에 있던 5천 정도는 두목이 죽어 날 따르게 될 테니.
산에 있는 본진으로 돌아가 다시 수를 불리고 때가 됐을 때 다시 공격하면 되는 일이다.
정면에서 힘 대결로 맞붙는 건 멍청한 일이라는 걸 알았으니 앞으로는 유격전 위주로 갉아먹는다.
결국 그들이 참지 못하고 산으로 들어왔을 때 지리의 이점을 살려 똑같이 갚아주면 되는 일.
두고 봐라.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장연은 복수심으로 활활 타오르는 가슴을 억누르며 말의 고삐를 굳세게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