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11)
EP.11 흑산적(2)
허겁지겁 달아난 후 급히 병사들을 추스른 장연은 추격군이 온다는 사실에 이를 갈았다.
“그래. 아예 이 기회에 씨를 말려버리겠단 뜻이군.”
황건적의 난을 틈타 군세를 일으킨 건 좋았으나 정작 제일 중요한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치는 꼴이라니.
오히려 역공을 맞아 중원에서 흑산적이라는 이름 자체가 지워지게 생겼다.
“우리 이제 끝장 아니야?”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봐줄지 몰라.”
“조용!”
추격군 소식에 벌써 우왕좌왕거리는 도적들을 보며 장연은 고함을 질렀다.
“우린 흑산적이고, 이곳은 산맥이다! 산에서만큼은 흑산적을 이길 자가 없다는 걸 기억해라!”
그냥 등반하기도 힘든 지세가 험한 산이다.
하지만 자신과 같이 오랫동안 산적 활동을 한 흑산적 정예들은 이런 산맥을 제집처럼 원하는 대로 다닐 수 있다.
이민족들이 천하무쌍을 두려워한다고 하지만 그래봤자 아직 힘만 믿고 날뛰는 애송이.
안 보이는 곳에서 화살을 쏘며 살살 긁어만 줘도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뛰쳐나올 것이 분명했다.
잡힐 듯 안 잡히게 거리를 조절하며 싸우면 여포는 제풀에 지치겠지.
천하무쌍도 결국 사람이니 체력이 무한하지는 않을터.
그 순간 이 산맥이 이름 높은 천하무쌍의 무덤이 될 것이다.
장연의 말에 도적의 술렁거림이 멎자 옆에 있는 덩치 큰 남자가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대장. 여포가 딱 내 취향인데 어떻게 안 될까?”
“무슨 헛소리냐?”
“그런 표정 짓지 말고. 물론 처음은 대장이 가져야지? 난 나중에 기회나 달라는 소리야.”
“쯧쯧. 어깨 위에 달린 머리 놔두고 하반신으로만 생각하는군.”
질책을 받은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왜? 얼굴도 예쁘장하고 앙칼진 년이 좋다고 한 건 대장이잖아?”
능력이 뛰어난 여성일수록 외모가 아름답다는 건 이제 이 대륙에서 당연한 상식이다.
특히 이런 시대일수록 그 아름다움에 혹해 여성을 강제로 취하려는 놈들이 나오는 건 당연한 사실.
장연 자신도 그런 놈들을 몇몇 본 적이 있지만….
“쇠사슬도 힘으로 박살 낸 다음 내 모가지를 분질러버릴 년인데 어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런 놈들은 전부 죽었다.
주제에 맞게 살아야지.
똑같이 능력 있는 남자가 그러면 안 되겠냐고?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에야 그냥 그 능력으로 꼬실 생각을 하지 않을까.
장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포획은 없다. 여포는 오늘 이 산맥에서 죽는다.”
──────────
장연에게서 승리를 거둔 나는 하루 휴식을 취하고 장연을 쫓아 태행 산맥에 들어섰다.
산맥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반겨주는 압도적인 경사들.
잘도 이런 곳을 본거지로 삼았네.
산이 여러 개 겹쳐 쭉 길게 이어진 태행 산맥은 확실히 10만이라는 숫자를 수용할 수 있을법한 거대한 규모였다.
이젠 1만도 안 되겠지만 말이야.
“이 산들을 다 뒤져야 한다고?”
여포도 산맥의 규모에 질렸는지 눈가를 찌푸리며 불만을 내뱉었다.
“아마 저쪽에서 먼저 올 테니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은데.”
“하아….”
여포는 한숨을 내뱉으며 들고 있는 방천화극을 허공에 붕붕 휘둘러댔다.
처음에는 무엇을 하고 있나 싶었는데 방천화극 끄트머리에 걸린 날벌레들이 반으로 갈라지며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
참 신기한 묘기다.
마치 무협지에서나 볼법한 모습이라 해야 하나.
자기보다도 큰 무기를 아무렇지 않게 휘두르는 모습에 내가 감탄하고 있을 무렵 이변이 일어났다.
쐐애액─!
나무 사이에서 화살 하나가 여포를 노리고 날아왔다.
깡!
여포에게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의 공격이었지만 가볍게 화살을 튕겨낸 여포는 귀신같이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노려보았다.
쐐애액─!
그러거나 말거나 여포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에서 화살 한 발이 더 날아왔다.
깡!
마치 여포의 성질을 긁는 듯한 행동에 여포는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대놓고 나 유인하는 것 같은데.”
“너 혼자 뛰쳐나오는 거 기다리고 있을걸.”
쐐애액─!
말하고 있는 사이 화살이 또 날아왔다.
이번엔 살짝 방향을 틀어 여포가 아닌 근처에 있던 내게 화살이 날아오는 모습.
“응?”
깡!
방패도 없는데 평범한 사람이 날아오는 화살을 막을 수 있을 턱이 있나.
얼빠진 소리를 내며 화살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지켜준 건 한 자루의 검이었다.
“…….”
어느샌가 내 근처로 다가온 서여가 스산한 눈빛으로 숲속을 바라봤다.
“나 방금 죽을 뻔한 거 맞지?”
“네. 위험했어요.”
여포 목소리가 아닌데?
나는 고개를 돌려 내 물음에 답한 여성을 바라보았다.
서여보다 더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묶은 장료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같은 갈색 눈동자를 응시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여포는 어디로 갔어?”
“화살이 정릉 님에게 날아오는 것과 동시에 숲으로 뛰쳐나갔어요.”
나한테 날아오는 화살을 여포도 막을 수 있었다는 거네.
아마도 날 지키고 있을 서여를 믿고 화살 쏜 놈을 잡으러 간 게 아닐까 싶다.
나를 바라보던 장료는 고개를 돌려 여포가 뛰쳐나간 방향을 응시했다.
“아마 잡히면…. 곱게 죽지는 못하겠죠?”
“그게 무슨 소리야?”
“서여 님을 보시면 알 수 있을 거예요.”
강아지처럼 웃는 장료의 말에 나는 서여를 바라보았다.
“…….”
서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무서운 눈길로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보고 있었다.
확실히 날 해코지하려 한 놈들을 볼 때마다 항상 저런 눈빛이었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말도 없이 함정 속으로 뛰쳐나가면 어쩌자는 거야.”
“그야…. 정릉 님을 노렸으니까요.”
장료는 싱긋 웃더니 입을 열었다.
“가끔 보면 정릉 님은 자신의 존재가 저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잘 알고 있다 생각하는데…….”
“정릉 님에게 얼마나 많은 병주 사람이 구해졌는지 알고 계시는가요?”
그야 모르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고 있나.
“정릉 님 앞에서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정원 님은 그렇게 좋으신 분이 아니셨어요.”
“…재물을 좋아하긴 하셨지.”
세금을 줄이고도 군사 비용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어머니께서 지금까지 모아온 재물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그 많은 재물이 다 어디서 나왔겠는가. 백성에게서 나왔겠지.
아직 그러신 것 같지는 않지만 본래 역사에서 하진과 십상시의 갈등이 점점 심해질 무렵 정원은 병사를 흑산적으로 위장해 군사 활동을 벌인 기록이 있다.
병사를 흑산적으로 위장하고 벌일 군사 활동이 뭐겠는가. 민가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는 것 말고 더 있나?
내가 태어나 제일 소중한 것이 나로 바뀌지 않았다면 엇나가셨을 분.
다르게 생각하면 일평생 모아온 재물조차 쉽게 포기할 정도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뜻이기도 했다.
새삼스럽지만 모성애가 참 위대하다고 느꼈다.
“정원 님을 설득해 오랫동안 잠겨있던 곳간을 푸신 것도 정릉 님이고, 세금을 줄여 백성의 부담을 줄여주신 것도 정릉 님이죠.”
“설득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었는데.”
그냥 굶주리는 사람이 많아 곳간을 좀 푸는 게 어떻냐 하니 고민도 없이 수락하셨다.
“정릉 님이 아닌 다른 분이 건의했다면 과연 정원 님이 수락하셨을까요?”
“으음….”
그렇게 생각하니 또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1위가 나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좋아하시는 것 2위는 재물이었다.
“그러니까 좀 더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세요.”
담담히 읊는 장료를 바라보며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표현을 안 할 뿐이지 장료도 지금 화나 있다는 걸.
“그래도 혼자 함정으로 들어간 건 걱정되는데….”
“괜찮을 거예요.”
장료는 믿음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라면 누구보다도 잘 살아남으시는 분이니.”
──────────
“나와 이 새끼야!”
우지끈!
다 큰 나무가 박살 나며 쓰러지는 모습에 장연은 식은땀을 흘리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젠장. 아무래도 좀 잘못 건드린 것 같은데.”
지금 잡히면 무조건 죽는다.
여포를 꾀어낸 것은 좋지만 생각보다 더 화나게 만들어버린 것 같다.
힘을 이상한 곳에 쓸 정도로 분노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오히려 좋다고 해야 할까.
저 미친 짐승이 최대한 힘이 빠지길 기다려야만 했다.
열심히 달리고 있던 장연은 소름 끼치는 감각에 상체를 밑으로 휙 숙였다.
쾅!
“헉!”
살벌한 소리를 내며 바위에 박히는 화살을 보고 장연은 숨을 삼켰다.
조금만 더 피하는 게 늦었다면 저 화살이 자신의 가슴을 꿰뚫었으리라.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서 말에 탄 채로 여포가 활을 겨누고 있었다.
“어쭈. 이걸 피해? 너 소문대로 몸이 빠르긴 하구나?”
여포가 소름 끼치게 웃으며 화살을 시위에 물렸다.
“웬만하면 참으려 했는데 쏠 사람이 있고 안 쏠 사람이 있지. “
여포가 다시 화살을 쏘자 장연은 몸을 굴려 필사적으로 화살을 회피했다.
쾅─!
어떻게 화살이 박히는데 저딴 소리가 나는 거지?
장연은 특유의 날랜 몸놀림으로 나무를 타면서 여포에게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흐읍!”
“언제까지 겁쟁이처럼 도망만 칠 거야?”
쾅─! 쾅─! 쾅─!
여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장연을 뒤쫓아오며 활을 쏘아댔다.
가면 갈수록 장연의 이동 경로를 예측해서 화살을 쏘아대는 모습에 장연은 한계가 오는 걸 느꼈다.
“어디까지 피할 수 있나 한번 보자고.”
이게 끝이다.
더 유인하려는 순간 자신이 먼저 죽는다.
여포를 유인하며 지치게 만들겠다는 것이 멍청한 생각이었음을 깨달은 장연은 급히 입을 열었다.
“모두 나와라!”
쾅─!
장연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몸을 굴려 화살을 피했다.
“쯧. 이번에도 빗나갔네.”
여포가 혀를 차며 다시 화살을 시위에 물리려는 순간 수많은 화살이 여포에게 쏘아졌다.
“응? 뭐야.”
화살 세례에 여포가 활을 다시 집어넣고 방천화극을 꺼내 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손쉽게 화살 세례를 걷어낸 여포가 씩 웃었다.
“날 유인해서 뭘 하려고 하나 했더니 겨우 이런 거였어?”
숨을 고른 장연은 자신만만한 여포의 모습에 이를 까득 물었다.
“네년이 아무리 천하무쌍이라 불린들 고작 혼자서 천 명 넘게 벨 수 있을 리가 있겠느냐?”
“너희라면 될 것 같은데.”
끝까지 자신을 무시하는 모습에 장연의 얼굴이 분노로 붉어졌다.
“여기가 오늘 네 무덤이다! 돌격해라!”
“쯧쯧.”
방천화극을 고쳐 잡은 여포는 혀를 찼다.
“안 된다니까?”
나무가 드넓게 펼쳐진 산속에서 피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