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244)
〈 244화 〉 수춘(3)
* * *
낮에 시작된 회의는 상당히 오랫동안 진행되었으나, 내가 손책을 수춘 태수로 임명하는 걸 마지막으로 끝을 보였다.
“흠….”
시간이 상당히 늦었음을 직감한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창문을 확인했다.
이제 슬슬 해가 저물어가며 땅거미가 내려앉는 시간.
확실히 늦긴 늦었다.
내가 바깥 풍경을 확인하는 모습에 제장들은 일제히 침묵을 지켰다.
그들이 무슨 말을 기다리는지 눈치챈 나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늦었으니 돌아가 보도록.”
건물에 모인 모든 인원은 내게 예를 올린 다음 눈에 안 띄는 모습으로 물러났다.
물론 저기 있는 꼬꼬마 책사 둘 빼고.
“…….”
내게 자신을 어필할 기회를 사마의에게 빼앗긴 제갈량.
슬슬 본래 역사처럼 제갈량에게 은근슬쩍 1패씩 적립하던 사마의.
분명 눈은 마주치지 않았지만 저 둘 사이에서 은은하게 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나도 잘 알 수 있었다.
소년 만화에서 자주 나오는 라이벌 관계 같네.
대놓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니 그냥 선의의 경쟁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으아아….”
나는 그 둘 사이에 끼인 채 천천히 말라죽어 가는 방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강하게 크렴.
그때 무언가가 떠오른 나는 눈앞에 있는 여인에게 중얼거렸다.
“아, 손책. 그러고 보니 이 말을 안 했군.”
“…?”
절도 있는 발걸음으로 물러나던 손책은 자리에 우뚝 멈춰 선 다음 다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말씀하십시오.”
와, 깍듯이 움직이는 거 봐라.
진짜 예의범절 하나는 확실하네.
손책은 자신의 의자매인 주유나 동료 장수에게는 한없이 장난스러우면서도 나에겐 끝까지 예의를 보였다.
아니, 어찌 보면 이게 당연한 건데….
이 세계는 아랫사람이나 윗사람이나 한결같은 태도를 보이는 인물이 많지 않나.
오히려 직급 구분이 철저한 인물을 보니 신기할 지경이다.
“…갑자기 왜 쳐다봐?”
“그냥.”
나는 곁에 있던 여포를 잠깐 바라본 다음 시선을 돌렸다.
“손책.”
“예.”
“낙양에 있는 자네의 아버지가 나를 자주 초대했다는 건 알고 있었나?”
“…예?”
놀랐네.
손책은 정말 처음 들어본다는 듯 예의도 잊고 내게 되물었다.
“구체적으로 무슨 소리를 했더라…. 아, 그래.”
나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뜬 손책에게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최근 자신의 첫째 딸이 걱정된다 하더군.”
“그, 그게 무슨….”
손책은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직감한 듯 목소리를 벌벌 떨었다.
“자신을 닮아 성격이 너무나도 강맹해서 손자 손녀를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고….”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다.
나도 처음에는 손견의 초대를 받고 살짝 긴장한 적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인물이니 당연했다.
손견이 누군가.
바로 그 강동의 호랑이가 아닌가.
본래 역사에서 동탁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기록하던 인물이고, 지금 이 세계에서도 나와 맞섰던 인물 중 제일 강적이었던 인물.
나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손견이 나를 초대한 걸까 걱정했었지.
근데 손견은 그런 내 걱정을 산산이 깨부숴버렸다.
‘자, 제 인맥으로 직접 공수한 강동의 명주입니다! 쭉 들이키시지요!’
‘…그래.’
‘하하하! 역시 사나이다우십니다!’
손견은 완전 동네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나를 대했다.
처음에는 연기가 아닐까 싶었는데 황궁에 오래 머무르면서 온갖 인간군상을 본 나는 알 수 있었다.
‘어떠십니까 대장군! 우리 권(?), 정말 예쁘고 귀엽지 않습니까?’
‘아, 아버지…! 취하셨어요!’
손견은 이게 진짜 모습이었다.
‘우리 상향(?)! 이 아비 품에 안기거라!’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호탕한 성격도 너무 과하면 조금 추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장군, 폐를 끼쳐드려 면목없습니다.’
‘으어어?’
나는 자신의 부인에게 등짝을 맞고 질질 끌려가는 손견의 모습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
이러니까 본래 역사에서 손권의 술버릇이 지독했던 거구나.
‘…저기.’
내가 혼자 결론은 내리고 고개를 끄덕일 무렵 근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죄, 죄송합니다….’
파란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녀는 내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마자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나는 그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다. 나로서도 꽤 유쾌한 경험이었으니.’
‘…….’
제갈량보다도 나이가 적은 어린아이, 손권(??)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
그리고 지금, 손책의 반응도 그때 손권이 보였던 반응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동공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걸 보면 엄청나게 당황한 건 확실한데 말이야.
근처에 있던 주유는 손책에게 필사적인 눈빛을 보냈다.
아마도 진정하라는 뜻이 아닐까.
식은땀을 흘리면서 손책의 시야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꽤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런 주유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뒤늦게 정신을 되찾은 손책은 내게 물었다.
“무, 무슨 연유로 그 내용을 제게 알려주시는지….”
“그냥 그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을 뿐이다.”
정말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는 내 말에 손책이 다행이란 기색을 내보였다.
“…그렇습니까.”
“이거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군. 이만 돌아가도 좋다.”
“예.”
손책은 내게 예를 올린 다음 자리에서 재빨리 물러났다.
본래 역사에서 소패왕이라 불렸던 무장답게 동요했음에도 절제된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
그 발걸음에 부끄러운 감정이 뒤섞였다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지금 낙양에 있을 손견 입장에선 참 다행이겠네.
아마 지금 손책을 만났으면 손견은 분명 훈련을 명목으로 흠씬 두들겨 맞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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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또 여성을 꾀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런 결론이 나는 거지?”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돌아간 시간.
즐겁게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자택에 돌아오자마자 방에 틀어박혀 다음날까지 휴식을 취하려 했다.
그래, 한 인물이 불현듯 내게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권력을 안겨주고, 장난스럽게 말을 걸며 이성을 꼬드기는 것 아니었나?”
“아니다.”
조조 맹덕.
오밤중에 술을 들고 찾아온 은발의 여인은 여느 때와 같이 내게 장난스러운 태도로 말을 걸었다.
“흠…. 그건 유감이군.”
조조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필시 여성의 맛을 알아버린 그대가 이성을 유혹하는 것이라 생각했다만.”
“…….”
맛이 뭐냐. 맛이.
어떻게 표현을 해도 그런 저속한 표현을 하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조조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하긴, 정말 마음을 먹었다면 진작 자빠트렸을 테니 진실이라 볼 수밖에.”
나를 대체 뭐라 생각하는 거냐.
누가 들으면 내가 여자 꾀는 데 도가 튼 인물로 착각하겠다.
겉모습만 보면 신비롭게 생긴 여인이 이런 말만 골라 하니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래서 찾아온 이유가 뭐냐.”
“대장군도 대충 눈치챘으리라 생각한다만.”
조조는 술잔에 담긴 술을 휘휘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과연 내가 그대와 함께 걸어나갈 수 있는가.”
“…….”
“이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그 노곤한 몸을 이끌고 대화에 응한 것이 아닌가?”
“…그런가.”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재 조조의 세력은 이렇다.
자신에게 음습한 계략을 펼친 전임 연주자사 유대를 역으로 물리친 조조는 연주를 전부 집어삼켰다.
원술을 광정 전투에서 깨부순 조조는 그 과정 중 예주에도 손길을 일부 뻗쳤으며, 최근 자신의 뒤통수를 노리던 도겸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고 서주의 절반이나 차지한 상황.
즉 천하의 중심은 조조의 손아귀에 들어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서주의 일부를 차지한 조조가 대효도를 펼치는 일은 없었다.
그냥 자신이 차지한 다른 지역들과 같이 평범하게 다스릴 뿐.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은 현재 연주 내부에서 잘 먹고 잘 산다 들었다.
소문으로 듣자하니 덩치가 좀…. 과하게 큰 여자를 좋아한다던데.
이성 취향이 특이한 건 조씨 가문의 특징일까.
하여튼 조조의 세력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인 건 확실했으나, 나는 저번에 조조를 한 번 믿어보겠다는 결정을 내린 적이 있었다.
조조가 내 뒤통수를 치지 않는 한 나도 먼저 조조를 적대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조조는 그런 내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내가 유표를 공격할 때 조조는 심드렁한 태도로 유표를 돕는 척하다가 휙 되돌아갔고, 지금 원술을 공격할 때는 서주를 완전히 차지할 수 있는 기회도 내버려 둔 채 나를 도왔다.
사실상 같은 세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호적인 모습.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살짝 걱정이 들 수밖에 없겠지?”
조조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조금 전 언급했던 행동으로 조조가 큰 손해를 본 것은 아니었다.
비록 동맹을 잃었으나 자신은 서주를 손에 넣었고, 서주를 완전히 차지하지는 못했으나 대외적으로 황실을 따른다는 충신의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보전진(二???)을 위한 일보후퇴(一???)라 말하면 또 아귀가 들어맞는다는 것.
“그렇기에 오늘, 내가 그대의 불안감을 없애주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흥미로운데.”
나는 조조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그 방법이 뭐지?”
“후후, 간단하다.”
내가 그리 묻자 조조는 거리를 좁혀왔다.
“같은 핏줄로 맺어지면 되는 일 아닌가.”
“…뭐?”
“아, 그렇다고 혼인을 맺자는 뜻은 아니다.”
조조의 눈길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지 않나.”
“…….”
내 근처에서 여성 특유의 기분 좋은 체취가 풍겨왔고, 나는 침묵을 지켰다.
조조가 내게 속삭였다.
“그대의 각오를, 내게 보여다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