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275)
〈 275화 〉 혼례(2)
* * *
최근 흉노족의 선우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이후 병주는 다른 이민족의 침입에 매우 취약한 상태가 됐다.
흉노족 수만 명과 정면으로 충돌한 흑산적의 피해는 셀 수도 없을 수준이었고,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들도 여럿 죽어나간 상황이었다.
이민족과 맞설 수 있을 수준의 정예 병사가 그렇게 쉽게 보충되는 것도 아니었으니 대장군은 일단 궁여지책으로 병사와 장수 몇 명을 병주에 남겨놓았다.
그렇게 병주에 남게 된 인원들이 누구냐.
“으으음….”
“…….”
장료, 고순, 서황.
대장군의 군세를 초창기부터 지탱해왔다고 볼 수 있는 베테랑 장수들이었다.
“역시 신경 쓰이네요.”
평소처럼 서황과 같이 무예를 연습하던 장료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앙─!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
장료의 언월도를 힘찬 몸짓으로 튕겨낸 서황이 물었고, 고순은 아무렇지 않게 제 무기를 손질하는 데 집중할 뿐이었다.
장료가 입을 열었다.
“최근 저희 자리가 좁아지는 기분이 들지 않나요?”
“…….”
서황은 잠깐 입을 우물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리 생각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요.”
장료는 무언가 확신하지 못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버린 상황 같달까요.”
“주군께선 그런 의도로 저희를 이곳에 남겨두신 것이 아닙니다.”
서황은 공과 사의 구분이 철저한 인물답게 경직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자칫 잘못하면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갈 수 있는 말이었으나 장료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죠.”
대장군이 어째서 이곳에 자신들을 남겨두었는지 장료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능력 있는 인재들을 한 곳에 몰아두는 건 상당히 비효율적인 일이었으니까.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신선들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날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사람들은 모두 거리의 제약을 받으며 살아간다.
자신이 작정하고 움직여도 병주에서 낙양까지는 족히 이틀은 걸리는 거리.
이것도 자신 혼자 움직였을 때의 이야기고, 만약 병사들까지 같이 데려간다면 일주일도 넘게 걸릴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점 때문에 흉노족에게 병주를 약탈당할 뻔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신경 쓰일 수밖에요.”
장료는 살짝 서운한 기색으로 말했다.
“조운이라고 했던가요.”
“…….”
“대장군께서 별다른 뜻이 없었다고 해도 그녀를 데려간 건 사실이잖아요?”
어디선가 혜성처럼 나타나 흉노 선우의 호위대를 뚫고 단신으로 그를 추격한 장수.
그 차분한 인상의 여인이 현재 대장군의 부곡에서 종군하고 있다는 건 꽤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래.
한때 호로관에서 여포 장군을 막아냈던 유비 자매들처럼 말이다.
“으음…. 따지고 보면 저희가 승진한 것이나 다름없지만….”
대장군의 군세 일부만을 이끌던 위치에서 아예 독립적인 부대의 지휘관이 된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장군(??)이라 부를 수 있는 위치가 된 것.
장료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왜 섭섭한 기분이 드는 걸까요.”
분명 자신만의 군대가 생기고 승진까지 했다.
하지만 장료는 아직 세력이 자그마하던 시절 모두와 함께 적을 무찌르던 시절이 더 마음에 들었었다.
“장군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
장료의 질문에 묵묵히 제 무기를 손질하던 고순이 말했다.
“…저는 맡은 임무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 딱딱한 대답에 장료는 쓴웃음을 지었다.
고순은 많고 많은 대장군의 장수 중에서도 유독 이질적인 편이었다.
가히 충성을 넘어선 숭배의 영역.
한때 태평도를 따르던 장각의 황건군이 딱 이런 눈빛을 지어 보였던가.
대장군이 자진(??, 스스로 목숨을 끊음)을 명령한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찌르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보다 보면 참 신경 쓰이는 분입니다.”
서황도 그런 고순의 면모를 눈치채고 있었는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장군께서는 저런 분을 어떻게 찾으신 건지….”
“저도 자세한 건 알 수 없어요.”
고순이라는 인물이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대장군을 따르기 시작했는지는 장료도 알지 못했다.
병사에서부터 차근차근 진급한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장수로 발탁된 건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느샌가 대장군을 따르며 충성을 바치기 시작했다는 것.
비록 방향성은 다를지라도, 고순이 대장군을 따르는 충정은 지고지순(?高??, 더할 수 없이 높고 순수함)하다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장군께 무언가 변고가 생긴다면 충격받을 인물이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고순이라면 아마도….
장료는 거기까지 생각한 다음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대장군께서 황제 폐하와 맺어지신다는 소식은 아시나요?”
“아, 저도 압니다. 최근 그걸로 꽤나 떠들썩하더군요.”
서황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
제 장비를 묵묵히 손질하던 고순도 그 소리를 듣자마자 우뚝 멈춰 섰다.
저런 모습을 보면 지고지순한 충성심만 가진 건 아닌 듯한데….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아무것도.”
장료는 자신의 회색 머리카락을 올림머리로 가지런히 정리한 고순의 모습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대장군께 계속 신뢰를 받는 것도 괜찮겠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다른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 말을 들은 서황이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그 말씀은?”
“장성한 여인이 남성에게 품을 욕심이 뭐겠나요.”
갈색 머리카락을 말꼬리 모양으로 묶은 여성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리기만 해서는 답이 없으니 직접 움직여야 하지 않겠어요?”
“…….”
“제 마지막 기억으로는 분명 대장군을 향한 그분의 눈빛이 심상치 않던데….”
어쩌면 이미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겠다 생각한 장료는 서둘러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초대장도 왔답니다.”
장료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곤 또박또박 말했다.
‘이미 아는 사람도 있겠다만 조만간 황제 폐하의 혼례식이 있을 예정이다.’
‘엄청나게 호화로운 규모로 열릴 것이 분명하니, 참여할 의사가 있다면 올해가 지나기 전까지 낙양으로 찾아오도록.’
‘아, 그리고 폐하께 밉보이기 싫다면 선물도 가져오거라.’
누가 썼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편지의 내용을 읊은 장료가 싱긋 웃었다.
“이민족들도 최근 잠잠하고 병사들 훈련도 끝마쳤으니 며칠 정도는 자리를 비워도 되겠죠.”
“…….”
“장군께서는 어찌하실 건가요?”
장비 손질을 마치고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던 고순이 대답했다.
“저는 주군께서 맡기신 이곳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공명(??, 서황의 자) 씨와 같이 가는 수밖에.”
대화를 듣던 서황이 자신의 큼지막한 눈동자를 깜빡였다.
“…어느샌가 저도 같이 가는 걸로 된 겁니까?”
“여기 남아계시면 대련할 사람도 없지 않나요?”
“그건….”
서황이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장료가 자리를 비운다면 자신의 유일한 취미인 무예 훈련을 같이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눈앞에 있는 고순 장군도 자신과 좋은 승부를 펼칠 수 있겠지만, 고순 장군은 그 시간에 부대 정비를 한 번이라도 더할 인물이었던지라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도 공적인 일에 관해선 깐깐한 편이라 생각했는데 여기 자신보다 더한 사람이 있었다니….
그때 장료가 서황에게 질문을 던졌다.
“생각해보세요. 낙양에 있는 이름 높은 장수들만 지금 몇 명일까요?”
“어, 어….”
서황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열 번은 무기를 맞댈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대장군의 호위 장수.
마찬가지로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무(?)를 지닌 천하무쌍.
호로관에서 눈을 뗄 수 없는 무예를 보인 관우와 장비.
홀로 흉노 선우를 도망치게 한 상산의 조자룡까지.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요.”
“그렇죠?”
만인지적과 같은 여러 장수를 떠올린 서황은 결국 장료에게 설득당했다.
실제로 대장군이 걱정했던 것과 달리 병주로 침입하는 이민족의 숫자는 적었다.
곧 날씨가 추워지기도 했고, 북흉노와 남흉노가 본격적으로 맞붙었다던가.
아마 대장군께서는 거기서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낀 것이리라.
흉노족이 언제 하나로 합쳐져 침입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렇다고 드넓은 평야 지대로 진출하기에는 너무나 큰 피해를 감당해야 했으니 참 불공평한 일이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 산맥 너머로 진출할 날이 오겠지.
한나라의 여러 황제가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평온한 세상을 위해서는 결국 이민족 문제를 해결해야 했으니까.
“저는 오랜만에 얼굴이나 봐야겠네요~”
“…….”
장료는 여전히 고순을 살살 자극하고 있었다.
…왠지 그 모습이 질투심을 유발하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
청녹색 눈동자를 지닌 고순은 무언가를 깊이 고민하는 듯 생각에 빠져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