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290)
〈 290화 〉 잔치(5)
* * *
장각이 담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신기하네요. 장난기가 든 게 아니고서야 이런 자리에는 나타나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요.”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가 말본새하고는.”
말은 거칠었으나 추레한 몰골의 노인은 그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냥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찾아온 거니 신경 쓸 것 없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산통에서 산가지를 뽑은 여인은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노인이 눈대중으로 산가지를 살펴본 다음 말했다.
“건(?, 하늘)인가. 참 기가 막히는 걸 뽑았군.”
“그게 무슨 뜻이죠?”
“다 알면서 물어보지 마라.”
만물의 첫 번째를 뜻하는 건(?)은 보통 크게 발전하는 것을 상징하는 괘다.
하늘은 인간의 세세한 사정을 신경 쓰지 않는 법이니 긍정적인 의미만 담긴 것은 아니지.
가장 순수하며 드높지만, 그렇기에 가장 큰 노력이 있어야 하는 괘.
선선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는 여인에게 한 차례 혀를 찬 노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누구의 점괘를 본 것이냐? 장각.”
“글쎄요…. 누굴까요?”
“쯧쯧. 감당할 수 없는 운명은 파멸만을 불러올 뿐이지.”
달이 차면 기울고, 물이 차면 넘치는 법이다.
과연 하늘을 뜻하는 글자처럼 높이 날아오를 것인가.
아니면 모든 걸 잃고 대지로 추락할 것인가.
노인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대놓고 날뛸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그건 지금도 반성하고 있습니다.”
나라는 갈라지고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상을 품고 일어났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결국 또 다른 비극을 불러왔을 뿐이다.
어쩌면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장각의 기색이 가라앉을 것을 확인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쯧, 또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
“그 진시황이 세운 통일 제국이 어째서 몇 년도 가지 못했는지 잊었나?”
“그건….”
───어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느냐!
나라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들고일어난 백성이 외쳤던 말.
실제로 반란군을 이끌었던 이는 강제로 건설 현장에 동원되던 일개 농민이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이 나라에 칼침 한 방은 꽂아보겠다!
가혹한 법으로 인해 극형을 면치 못할 것을 예상하고 살고자 움직인 소작농.
───내 장담하건대, 이 상처를 시작으로 너희는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그 외침은 예언처럼 이루어졌다.
백성의 반란으로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진나라가 휘청거렸고, 그 후폭풍을 수습하기도 전에 곳곳에서 군웅들이 발호하며 진나라를 한 차례 더 뒤흔들었다.
결국 서초패왕이 이끄는 초나라 군대가 거록대전에서 진나라를 크게 이기고 멸망시켰으니 백성이 말한 그대로 흘러간 것이다.
“그저 살고자 외쳤을 뿐인 그 백성을 누가 감히 나무라겠는가.”
“…….”
“굳이 네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언젠간 일어날 일이었다.”
어딜 가든 윗대가리들이 문제라며 노인네는 탄식을 내뱉었다.
“어떤 일의 결과만 보고 마냥 잘못됐다 말하는 놈들도 막상 다른 방안을 내놓으라 하면 입도 뻥긋 못하더군.”
노인이 말했다.
“무게만 잡고 탁상공론만 내뱉는 것들의 말은 전혀 신경 쓸 가치가 없다.”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이 질문에 대답이나 해봐라.”
장각이 감사를 표하기 무섭게 노인은 궁금한 점을 캐묻기 시작했다.
“신선의 당부를 어기고 속세로 내려가서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는데도 어떻게 살아있는 거냐?”
“…글쎄요?”
그건 장각도 몰랐다.
한나라가 부패할 대로 부패했다는 걸 느끼고 관직에 오르는 것을 포기했던 과거.
어느날 산에서 약초를 캐고 있던 장각에게 한 어린아이가 다가와 이렇게 말했었다.
‘쓰잘데기 없는 짓은 그만하고 이걸로 공부나 해봐라.’
‘……?’
‘네가 이 책을 얻었으니 마땅히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교화하고 구제하여야 한다. 알겠느냐?’
그때 제 할 말만 내뱉는 어린아이를 보면서 장각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꼬마야, 길이라도 잃었니?’
‘아이 취급하지 마라! 내가 동년배보다 조금 어려 보일 뿐이지, 나이는 먹을 대로 먹었느니라!’
화를 왁왁 내는 소녀의 모습에 장각은 소녀가 어린아이 취급을 싫어한다는 걸 깨닫고 싱긋 미소 지었다.
‘그렇구나. 일단 같이 산이라도 내려갈까?’
‘이익…! 도저히 들어먹질 않는구나! 됐다! 이걸 공부하든 말든 네 마음이다!’
소녀는 그리 외치고 바로 눈앞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기억하거라! 만약 네가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천벌이 내릴 것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장각은 조금 전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 이야기로만 듣던 신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장각이 물었다.
‘그…. 존함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흥! 남화노선(????)이다! 잘 기억해두도록!
그렇게 공기가 한 차례 진동하더니 신선은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
장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태평요술이라 적힌 책을 바라보았고, 책을 잘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그게 바로 과거의 기억.
“저도 제가 어째서 지금까지 살아있는지 모르겠네요.”
백성들을 구제하라는 본래 의도에서 벗어나 다른 마음을 품는 순간 천벌이 내릴 것이라고 하던가.
잠깐 고민하던 장각이 선선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직까진 괜찮다고 판단하신 게 아닐까요?”
“어이구, 속도 편하구나.”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여튼 특이해. 속세에 과하게 개입했던 연놈들이 오래 산 적은 없는데 말이야.”
“동탁 때 직접 움직이셔 놓고 그런 말을 하시면 설득력이 없습니다.”
여인의 말을 들은 노인이 콧방귀를 뀌면서 대답했다.
“흥. 그건 그 돼지 새끼가 극악무도한 일을 벌였기 때문에 예외로 친 거다.”
동탁 중영(?? ??).
불과 하룻밤 만에 수십만 명을 고통스럽게 태워죽인 역신(??).
장안을 불태우고 천수까지 도망간 동탁의 군대에 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노인이었다.
───서량의 역적은 죽어서도 땅에 묻히지 못할 것이다!
───저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내뱉는 노인네는 뭐냐! 당장 쳐죽여라!
날이면 날마다 불길한 예언을 내뱉어 불안감을 조장하고,
───눈이 도대체 어디에 달린 것이냐? 짐승과 사람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냐?
───뭐, 뭐야? 소가 두 발로 일어나서 말을 한다!
온갖 동물로 변해 동탁의 추격을 유유히 따돌렸으며,
───죄 없는 목숨을 그렇게나 앗아가 놓고 잘도 자는구나! 이 억울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느냐!
───분명 목을 베었을 텐데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대장군의 군대가 도착하는 전날까지 온갖 난리를 피워 제대로 숙면도 취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온갖 괴력난신에 시달리던 동탁의 군대는 결사항전을 주장한 것치곤 너무나도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노인은 꾀죄죄한 몰골로 자신의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었다.
“어차피 조만간 잡혀 죽을 놈, 명줄을 조금 더 짧게 해준 것이 뭐가 문제란 말이더냐.”
“예.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
자기 주장 하나는 확실한 노인의 대답에 여인은 그저 싱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강동 쪽에 있는 노인네도 그렇고 죄다 이상한 연놈들뿐이야.”
“마치 본인은 아니라는 듯 얘기하셔도….”
“시끄럽다!”
노인이 괄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가 네년처럼 천문에 능한 것은 아니다만,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는 별들이 여럿 있는 건 알고 있다.”
“…….”
“허구한 날 천기가 어떻다 중얼거리는 너라면 알 수 있겠지.”
노인은 진지한 눈초리로 장각을 바라봤다.
“존재하지 말아야 할 별들이 이 천하를 어지럽힐 것 같더냐?”
그 질문을 들은 장각이 싱긋 웃어 보였다.
“저는 예언자가 아니지만…. 적어도 어느 분께 변고가 생기지 않는 이상 괜찮을 겁니다.”
“변고라니?”
“천기를 너무 누설하면 안 될 일이지요.”
“에잉, 또 애매한 대답만 내놓고 말이야.”
노인은 천기가 어지러워진 것을 깨닫고 이미 손을 놓아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눈앞의 여인은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일까.
“됐다. 술맛도 없어졌으니 이제 가봐야겠군.”
“아, 혹시나 싶어서 드리는 말씀인데….”
“음?”
몸을 일으킨 노인이 장각을 바라봤다.
“심심하답시고 아무런 말도 없이 대장군께 가까이 다가가시면 안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이것도 천기누설입니다.”
“이번에는 그냥 대답하기 싫어서 피하는 기분인데?”
장각은 구태여 부정하지 않고 눈앞에 놓인 차를 한 잔 마셨다.
“하여간 성격도 이상하군. 이제 진짜 가보겠다.”
“예. 안녕히 가시길.”
그 말과 동시에 노인네는 한쪽 다리를 절뚝이면서 모습을 감췄다.
한동안 그런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장각은 살짝 대장군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연회장에 있는 그 누구도 노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한 인물만큼은 달랐다.
“…….”
보기만 해도 살벌한 커다란 검을 등에 지고, 무감정한 눈빛으로 계속 노인을 지켜보던 흑빛의 소녀.
대장군을 호위하는 소녀를 바라본 장각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흐흠…. 자기 몸 하나는 잘 건사하시는 분이니 괜찮겠죠.”
장난기가 과해 가끔 권력자들을 골탕먹이는 짓을 즐겨하던 노인.
조만간 노인이 화들짝 놀라며 식은땀을 흘리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도 재밌을 거 같다며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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