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354)
〈 355화 〉 사냥(3)
* * *
나는 황제 폐하께서 체면을 살릴 수 있게 거대한 수사슴을 잡는 데 성공했다.
황제가 사냥을 나갈 때 쓰는 화살은 누가 봐도 귀티가 줄줄 흘렀기에 신하들이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
“황제 폐하 만세!”
덕분에 신하들은 내가 죽인 사슴을 황제가 죽인 줄 알고 연신 만세를 외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신하가 내가 화살을 쏘는 광경을 못 본 것은 아니다.
“……황제 폐하 만세!”
황제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녀를 시중들던 신하들.
그들도 폐하께서 한 마리도 사냥하지 못해 체면을 구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건 마찬가지였던지라 눈치 있게 만세 행렬에 합류했다.
이게 바로 사회생활이지.
뭐…. 일이 잘못 풀리면 자신을 우습게 아느냐면서 오히려 역정을 낼 수 있겠지만 내가 아는 폐하께서는 그럴 분이 아니었다.
“……흐음.”
봐라.
지금도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계시지 않나.
덤으로 황실파 관료들에게 좋은 점수도 딸 수 있으니 모두가 이득 보는 거지.
이제 내가 다시 짐승을 사냥하는 데 성공하면 완벽하겠네.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만세 소리가 잦아들자 다시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푹!
그리고 내가 발사한 화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땅바닥에 파고들었다.
“…….”
뭐지.
조상님의 가호가 사라졌나?
아니 뭐, 굳이 시대를 따져보자면 내가 그 조상님들과 동년배가 되긴 하는데….
“끼이익.”
그때 내 화살이 땅바닥에 파고드는 걸 바라보던 사슴 하나가 울음소리를 냈다.
마치 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흰색 털.
똘망똘망한 검은색 눈동자.
누가 봐도 아름답다 생각할 흰 사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지금 날 비웃은 건가?
사슴은 종류에 따라 울음소리가 많이 다르다고 한다.
우어어엉 거리면서 우는 놈도 있고, 꿰에에엑 거리면서 우는 놈도 있지.
“끼이익.”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흰 사슴은 참 괴상한 울음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끼익. 끼익. 끼이익.”
무슨 여닫는 문도 아니고 계속 끼익거리네.
저거 나 비웃는 거 맞구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도발하는 걸까.
아무튼 자신을 노려달라니 그렇게 해주는 수밖에.
“오냐. 너 잘 걸렸다.”
“…?”
혼잣말을 중얼거린 내가 다시 활시위를 당기자 근처에서 호위에 전념하던 서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냥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었다.
──────────
그렇게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와, 되게 잘 피하네.”
흰 사슴을 열심히 뒤쫓던 나는 그런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달리기 속도가 빠른 건 짐승이니까 그렇다 쳐도 달리는 방향을 이리저리 트는 솜씨가 아주 예술이었다.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저리 기가 막힌 타이밍에 방향을 트는 거지.
저 심상치 않은 무빙과 조금 전 나를 비웃던 모습을 생각해보면 영물일 가능성도 컸다.
애초에 모습부터가 자연에서 극히 보기 드문 흰색 털이 아닌가.
“…쟤는 그냥 빠른 말 타고 쫓아가서 칼질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오죽하면 나를 졸졸 따라오던 여포조차 그런 소리를 할 정도였다.
그를 들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잡으면 잡은 게 아니지.”
“…….”
“이건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어, 응.”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여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수긍했다.
애초에 속도를 내서 쫓아가면 저놈도 더욱 속도를 올릴 것 같단 말이지.
서여의 오추마나 여포의 적토마, 또 맹획이 타고 다니는 붉은 소처럼 영물이란 생물은 하나같이 뛰어난 능력을 자랑했다.
그게 뜻하는 바는 무엇이냐.
저놈은 지금도 나를 봐주면서 상대해주고 있단 뜻이다.
자기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이렇게 여유를 부리다니….
사람 성질 긁는 방법 하난 제대로 알고 있는 짐승이었다.
그를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가 있지.
“끼이익.”
내가 속도를 줄이니까 흰 사슴도 속도를 줄이면서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끼익. 끼익.”
그리고 저 열받는 울음소리.
만약 저 울음소리를 앵무새처럼 의도해서 내는 거라면 나는 아주 칭찬해줄 자신이 있었다.
이건 내 예상인데, 내가 지금 저 흰 사슴을 포기하고 물러나도 끝까지 쫓아오면서 저 열받는 울음소리로 날 도발하지 않을까.
옛날 흰 사슴은 사람들이 되게 신령스러운 짐승으로 취급했는데 저 모습을 보면 그냥 불량배나 다름없었다.
“…내가 대신 잡아줄까?”
“아니.”
여포의 제안에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여포라면 적토마를 타고 쫓아가서 단번에 목을 베어버리겠다만, 이건 남자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비록 내가 패배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없지.
…근데 저놈 수컷 맞나?
머리에 뿔이 달린 걸 보면 맞겠지.
하여튼 저놈의 뿔로 녹용을 달여먹을 테다.
난 지금도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흰 사슴을 한 차례 바라본 다음 여포에게 말했다.
“거기서 지켜보고 있어. 내가 바로 잡아버릴 테니까.”
“……그래.”
웬만하면 내 말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는 여포였지만 이번만큼은 영 믿음이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허, 지켜보라니까.
어느샌가 흰 사슴과 추한 자존심 싸움을 벌이게 된 나는 다른 짐승을 일절 무시한 채 그놈만 쫓아다녔다.
──────────
한 차례 만세 삼창을 받은 황제는 멀지 않은 곳에서 특이한 광경이 펼쳐지는 것을 보고 툭 중얼거렸다.
“흐음, 백록(白?, 털의 빛깔이 흰 사슴)이구나.”
태어날 때부터 드물게 흰색 털을 타고난다는 사슴.
일생을 산에서 보내는 사냥꾼들조차 한두 번 보는 게 끝이라는 귀한 영물이 황실의 사냥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는 고개를 돌려 사냥터를 관리하던 신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백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나?”
“저, 저도 흰색 털을 지닌 사슴을 보는 것은 처음이옵니다.”
“그런가.”
다른 사람의 거짓말을 파악하는데 뛰어난 재주를 지녔던 황제는 지금 신하가 진실만을 말한다는 걸 눈치챘다.
적어도 십 년은 넘게 사냥터를 관리하던 인물조차 보지 못했던 짐승.
또 그런 영악한 짐승이 지금 이때 대장군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다.
이건 꽤 흥미로운 상황이 아닌가.
과연 저 흰 사슴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황제는 궁금증에 빠졌다.
“껄껄, 이는 필시 좋은 징조임이 분명합니다.”
그때 근처에서 나이를 먹은 노인이 소탈하게 웃어 보였다.
사마휘와 같이 제갈량을 와룡이라 일컫고, 방통을 봉추라 일컬은 인물.
황제는 그 노인에게 고개를 돌리며 질문을 던졌다.
“좋은 징조라?”
“예.”
대장군의 압박으로 조정에 강제로 출사하게 된 방덕공은 제 멋들어진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산해경(山??)에 따르면 흰색 빛깔을 지닌 사슴은 심성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한 인물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지요.”
천하의 온갖 지리와 환상 속에 나올 법한 짐승들조차 전부 기록한 산해경.
그에 통달한 노인은 눈앞에 보이는 진귀한 장면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백록을 본 사람은 모두 큰 행운을 얻으며 장수한다고 하니, 어찌 이를 보고 좋은 징조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저번에 해괴한 요술을 부리던 노인도 그렇고 참 신기한 일들 투성입니다.”
자신이 산에서 약초를 캐며 살던 시절에도 백록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며 방덕공이 계속 웃었다.
“수, 숙부….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아.”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방통이 그리 말하자 바로 웃음을 멈췄지만 말이다.
다른 인물을 동물에 빗대어 표현하길 좋아하는 방덕공은 짐승과 관련된 질문을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방덕공은 뒤늦게 입을 꾹 다물었지만 이미 주변 인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뒤였다.
황제는 제 부군을 높이 평가한 방덕공에게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대에게 걸맞은 업무가 있는 것 같구나.”
“허업….”
깊은 인상을 남긴 인재일수록 더욱 많은 일거리가 생긴다는 걸 알고 있던 방덕공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지금도 대장군은 괴상한 울음소리로 자신을 비웃는 흰 사슴을 열심히 쫓아다니며 활시위를 당겨대고 있었다.
그를 지켜보던 한 신하가 황제에게 의견을 올렸다.
“폐하, 예로부터 영물을 사냥하면 천벌이 내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지금이라도 대장군을 말리시는 것이….”
“그대는 아직도 모르겠느냐?”
신하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황제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대장군이 어떻게 화살을 날렸는지 그대도 보았을 터.”
“그건….”
황제가 쓰는 화살을 건네받자마자 단번에 사슴의 머리를 꿰뚫던 광경.
자세조차 제대로 잡기 힘든 말 위에서 달리는 사슴을 맞히기란 어지간한 장수들조차 불가능한 묘기였다.
그런 그가 화살을 못 맞히는 척하는 이유야 간단하지.
자신이 활 솜씨가 부족한 것에 대해 기가 죽을까 봐 배려해주는 것이었다.
황제는 애정이 담긴 눈길로 대장군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이는 저 백록에게 겁을 줘서 쫓아내려는 것뿐이다.”
“…….”
“제 고향에 있던 시절부터 온갖 흉폭한 맹수를 잡아왔던 그가 활을 못 쏘겠느냐?”
정릉이 들었다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화들짝 놀랄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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