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376)
EP.376 예주(4)
십만 명의 포위를 단 팔백 명으로 돌파하고, 적국의 군주를 위협하여 도망치게 한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게 가능하냐고 물으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당연히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십만 명 대 팔백 명이다.
창작물에서도 팔백 명이 이기는 전개가 나온다면 이게 맞냐면서 한바탕 난리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걸.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짓을 진짜로 해낸 장수가 있다고 하면 믿어지겠는가?
장료 문원(張遼 文遠).
그는 손권이 직접 이끄는 십만 군세가 성을 포위하자 겨우 팔백 명만 이끌고 출진해 말 그대로 포위망을 분쇄하기 시작했다.
진형이고 뭐고 전부 부수고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돌격력.
탱크 그 자체가 되어 적들이 앞을 가로막는 족족 로드킬을 내버리는 장료에게 손권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대로 자신의 군주가 있는 곳까지 쭉 밀려버렸다.
난데없이 대장기(大將旗, 대장이 군대를 지휘하는 데 쓰던 군기) 근처까지 당도한 장료의 모습에 손권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어떻게 하기는.
당연히 도망치지.
화들짝 놀란 손권은 장료라는 인간 흉기를 피해서 근처에 있는 작은 언덕까지 후다닥 도망쳤다.
과연 손제리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도주 솜씨라 해야 할까.
우왕좌왕 거리던 손권은 곧 장료의 병사가 얼마 없다는 걸 깨닫고 포위 섬멸을 지시했으나, 장료는 뭐 어쩌라는 듯 그 포위망도 뚫어버리고 유유히 돌아간다.
‘장군은 저희를 버리시려는 겁니까!’
또 귀환 도중 포위망을 빠져나오지 못한 병사가 이렇게 외치자 다시 유턴해서 포위망을 세 번째로 박살 내고 구출해오는 건 헛웃음이 나올 수준.
이 어이가 없는 상황에 손권은 완전히 넋이 나갔고, 초반에 기가 제대로 꺾인 손권군은 결국 10만이라는 규모가 무색하게 허무히 철군해버린다.
더욱 가관인 건 장료가 그걸 보고 또 돌진을 했다는 것.
감녕, 여몽, 능통 등 손권을 호위하던 장수가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져서 망정이지 손권은 하마터면 거기서 장료에게 명을 달리할 뻔했다.
당시 장료가 이런 공적을 남길 수 있었던 건 여러 가지 요소가 겹쳤기 때문이었다.
합비를 공격하기 이전에 오나라 군영 측에서 역병이 돌았고, 오나라 특유의 호족 연합 집단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지휘권도 완전히 통일된 상태가 아니었다.
또 유비와 투닥거리던 조조가 상황을 보고받은 다음 장료에게 어찌 행동해야 할지 지침을 내려주기도 했지.
단지 장료가 그 지침을 엄청나게 잘 이행했을 뿐.
오나라 병사들이 약했단 뜻은 아니었다.
그들이 진짜 약했다면 적벽대전 때 조조를 이기지도 못했겠지.
근데 이런저런 요소를 생각하더라도 장료가 십만 명을 팔백 명으로 물리친 건 엄청나게 굉장한 일이었다.
훗날 관우의 광역 저주 때문에 조조가 세상을 뜬 이후에도 오나라가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내던 장수.
비록 항장 출신이라 도독 작위를 받지는 못했지만, 식읍만으로 따지면 조조의 친척인 조인보다도 많이 받은 어마어마한 인물이었다.
“제게 예주 정벌을 맡긴다는 뜻이신지요?”
“그래.”
나는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갈색 머리카락을 포니테일 모양으로 묶은 장료는 제 눈동자를 깜빡이다가 싱긋 웃었다.
“행동 방침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건 간단하다.”
담담히 제 할 일을 묻는 장료에게 난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명을 받고 예주에 왔음을 드러내면서 예주자사와 진왕의 반응을 살펴보도록.”
막말로 진왕 유총과 예주자사 공주가 유표처럼 권력에 미친 사람일 수도 있지 않나.
비록 그럴 확률은 무척 낮겠지만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만약 그들이 우리 세력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기를 든다면….”
“…….”
거기까지 언급한 나는 한 박자 쉰 다음 이어서 말했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말이 안 통한다면 결국 몽둥이를 들어야지.
지금은 저승에 있을 형주자사 유표와 꿀물쟁이 원술도 인정하는 방식이었다.
두 세력에 대한 방침을 정했으니 이제 남은 건 황건군뿐인데, 그에 대해서도 이미 생각을 끝마쳤다.
“황건적 문제는 부관으로 장예(장각의 가명)를 붙여줄 테니 그녀의 의견을 따르도록.”
“아…. 그분 말씀이시군요.”
장료는 우리 세력 최고참답게 척하면 척이라는 듯 알아들었다.
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폐하께서 몸을 챙기라고 신신당부하였기에 당분간 출진할 수 없는 처지라서 말이야.”
“…….”
“내가 추가로 붙여주길 원하는 장수나 책사가 있나?”
여포나 장비처럼 내 아이를 기르거나 임신한 여인은 힘들지만, 그게 아니라면 얼마든지 장료에게 붙여줄 생각이 있었다.
내가 병주에 있던 시절부터 나를 따랐던 장수다 보니 세력 짬밥으로 장료에게 비빌 만한 인재도 없고.
장료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바락바락 대들 만한 인물을 굳이 꼽아보자면 훨씬 계급이 높은 여포밖에 없었다.
서여는 그냥 내 곁을 벗어나지 않으니 예외로 치자.
내 질문을 받은 장료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두 분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두 분?”
장료가 말한 두 분이 누구를 뜻하는 건지 고민에 빠졌던 나는 머지않아 알아챌 수 있었다.
“고순과 서황을 말하는 건가?”
“예.”
확실히 그 두 명도 고참이긴 하지.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세 명은 똘똘 뭉쳐 다니며 온갖 전공을 세우고 다녔다.
고순과 서황은 최근 남중 정벌 때도 맹획이 이끄는 이민족의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기며 개싸움을 벌였고, 장료는 마초와 함께 타사대왕을 급습하여 적장을 사로잡았다.
…그러고 보니 마초와 끝을 봐야 하는 일이 있지 않았나?
분명 본방을 치르기 전에 익주와 관련된 일이 터져 뒤로 미뤘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이후 이런저런 일이 겹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지금이라도 떠올린 게 다행이네.
마초는 내가 초콜릿 세 개를 먹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조만간 서신이라도 보내야겠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또 다른 요청 사항은?”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질문을 던지자 장료는 청순하게 웃는 표정 그대로 대답했다.
“주군께서 맡기신 일이 무사히 끝난다면 지금처럼 독대를 요청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를 들은 나는 의문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독대?
대체 무슨 의미로 이런 요청을 하는 거지.
그때 장료가 나와 서서히 거리를 좁혔다.
“…….”
거리를 좁히는 것과 동시에 느껴지는 꽃향기.
장료는 자신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외모처럼 산뜻한 향기를 지니고 있었다.
순식간에 입술을 빼앗긴 내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자 장료는 말을 이었다.
“이다음은 나중에 포상으로 받도록 할게요.”
발랄하고 순수한 말투.
평소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 장료의 또 다른 일면과 마주친 순간이었다.
내게 의외의 면모를 보인 장료는 곧장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어, 어…. 그래.”
설마설마 했는데 장료도 나한테 연심을 품고 있을 줄이야.
사실 호로관에서 연합군을 막아낸 다음 장료가 내게 귀엽다고 말했을 때부터 의심을 품긴 했다.
하지만 그 이후 별다른 티를 내지 않아서 기분 탓인가 하고 넘겨버렸는데….
이쯤 되면 내게 뭔가가 있긴 있나 봐.
근데 그 뭔가가 뭐지?
나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장료가 있었던 빈자리를 쳐다보았다.
“…….”
나한테 들이대는 여성을 볼 때마다 여자는 짐승이라고 말했던 서여는 이제 지적하기도 지친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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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이사, 황천당립!(蒼天已死, 黃天當立!)’
‘세제갑자, 천하대길!(歲在甲子, 天下大吉!)’
그것은 과거의 기억.
땅바닥에 눌어붙은 핏자국처럼 결코 지워지지 않는 죄의 무게.
지금도 눈을 감을 때마다 그 비참한 광경이 생생히 떠오른다.
자신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무기를 놓지 않은 황건군.
눈을 부릅뜬 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한나라 병사.
‘당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굳이 네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지만 여인은 알고 있었다.
그 어떤 대의를 가져다 붙여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옳지 못한 것이라고.
전쟁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비참한 상황을 끝낼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모순(矛盾).
죄 없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벌인 일이,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의 삶을 구렁텅이로 빠트리고 있었다.
수백, 수천, 수만 명이 죽어나갔다.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강처럼 흘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사상자의 숫자가 수십만을 헤아렸을 때, 여인은 생각했다.
…지금 자신이, 한나라의 부패한 황제와 뭐가 다르지?
그때부터 여인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기억하거라! 만약 네가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천벌이 내릴 것이다!’
신선께서 말씀하셨던 천벌의 뜻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실력 있는 의원인 자신조차 치료할 수 없는 마음의 병.
날이 지날수록 초췌해지는 제 모습에 여인은 속으로 자조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총명한 여인은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은 한나라에 깊은 상흔을 남긴 채 토벌당하고, 오히려 이 기회를 틈탄 야심가들이 곳곳에서 할거하며 나라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 이 보잘것없는 목이라도 의미 있게 쓰여야만 했다.
하다못해 선한 심성을 지닌 이에게 도움을 주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를 초대했고, 자신은 죽음을 맞이하려 했다.
‘마지막으로 묻자.’
‘정말로 사람들을 돕고 싶어?’
그런 질문을 던진 남성은 픽 웃으며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을 버렸다.
‘그렇다면 안 죽여.’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원한다는 남성은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막대한 명예와 재산을 아무렇지 않게 포기하고 제 손을 붙잡아왔다.
‘대현량사님! 어서 도망치십시오!’
‘저희가 이곳에서 전부 죽더라도 당신만큼은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숙명이자 업보.
‘네가 정말 사람들을 위한다면 살아서 아픈 사람들을 도와줘.’
자신은 죽어서 도망치는 것이 아닌, 살아서 속죄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게 바로 여인이 살아가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