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379)
EP.379 예주(7)
예주 영천군(豫州 潁川郡).
어떤 이들에게는 훗날 위나라가 붙였던 허창(許昌)이란 이름이 더 익숙할 지역.
예주자사의 인장을 바친 공주는 제 앞에 있는 인물에게 몸을 낮추면서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 진왕 유총은 궁노를 잘 쏘며 용맹한 성품을 가진 인물입니다.”
“흐음…. 그런가요?”
“예. 전선에서 병사를 이끄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니 웬만한 수단으로는 꼼짝도 하지 않을 겁니다.”
공주의 설명을 들은 장료는 이해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이 말대로라면 진국을 다스리는 제후왕은 싸우다 죽을지언정 자신의 적에게 항복하는 인물은 아니란 뜻이었다.
즉 전쟁이 일어나는 순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것.
어느 한 곳이 멸망할 때까지 세력을 평화롭게 합치는 방법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렇다면 지금 가장 중요한 행동은 무엇이냐.
진왕 유총에게 괜한 적대감을 심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대화 자리부터 마련하는 게 좋겠군요.”
자신이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군대부터 끌고 간다면, 유총도 제 군대를 출진시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형성하겠지.
“후, 훌륭하신 선택입니다.”
적어도 바로 앞에서 눈치를 살피는 이 인물처럼 고개를 숙이진 않을 터.
그 행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건 아니었다.
헛된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고, 제 자존심조차 굽히며 다른 사람에게 목숨을 맡기는 행동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따로 좋은 평을 남겨주는 것도 좋겠다 생각한 장료는 공주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진왕에게 전령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
“으음…. 서로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내용이 좋겠죠?”
괜히 이상한 내용을 추가했다가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그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으니까.
전쟁이 일어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들은 보통 제 신념이 나름대로 확고한 상태다.
그것이 좋은 쪽으로든, 안 좋은 쪽으로든 말이다.
‘닥쳐라! 네놈이야말로 황실을 능멸하는 역적이 아니더냐!’
제 권력을 위해 전쟁도 불사하지 않던 형주자사 유표.
‘짐은 중나라의 황제란 말이다─!’
그 유표보다도 몇 발자국 더 나아가 아예 황제를 참칭하던 원술.
‘네놈만큼은 죽여버리겠다!’
어마어마한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동탁까지….
비록 방향성은 잘못됐으나 자신의 신념을 철저히 따르는 인물들이었다.
그렇다면 유총은 어떤 신념을 지니고 있을까.
“…….”
그건 시간만이 알려줄 터였다.
──────────
진국(陳國)은 영천군과 이웃이라 볼 수 있을 만큼 매우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지역이었기에 서신이 전해지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말을 타고 열심히 달리면 불과 하루도 안 걸려서 도달할 수 있는 거리.
그 정도 거리는 온갖 고된 훈련을 거친 대장군의 병사에게 산책하는 것과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전하. 최근 저희가 예의주시하는 부대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낙준(駱俊)인가. 어디 가져와 보도록.”
낙준이라 불린 차분한 인상의 장수는 한 차례 인사를 올린 다음 제 주군에게 공손히 서신을 건넸다.
진왕 유총(陳王 劉寵).
그는 세월의 흐름을 피해가지 못한 노쇠한 인상임에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강맹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일평생을 전장에서 보내온 인물만이 지닐 수 있는 상징 같은 것이었다.
몸 곳곳에 흉터가 새겨진 남성은 제 서신을 읽은 다음 중얼거렸다.
“흥. 자신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건가.”
“어찌 그런 무례한….”
유총의 말에 주변에 있던 관리는 경악한 기색을 드러냈다.
“대장군 본인이 직접 요청해도 모자란 마당에 어찌 일개 장군이 제후왕을 오가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전혀 고려할 가치도 없는 제안입니다! 전령을 돌려보내고 차라리 대장군에게 직접 찾아오라고 하시지요!”
주변에 있던 문관들이 그렇게 외치자 유총은 낙준을 불렀다.
“낙준.”
“예. 전하.”
“자네는 이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지?”
유총의 질문에 낙준은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저는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답에 유총을 모시는 문관은 기다렸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지금 진심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자네는 도대체 누구를 섬기는….”
“그만.”
유총은 낙준을 나무라던 문관을 바라보았다.
“나는 분명 낙준에게 의견을 물었다만.”
“며, 면목없습니다….”
문관은 일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장수의 서슬 퍼런 눈빛을 마주하자 움찔 떨면서 몸을 숙였다.
유총이 다시 낙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잡음이 있었군. 그래서, 그런 대답을 한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난세를 피해 진국까지 피난을 온 힘없는 백성들.
그런 백성들에게 자기 재산을 풀어 정착에 도움을 준 명망 높은 인물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장군은 현재 황제 폐하의 무한한 총애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는 대장군과 대립하던 관료들을 폐하께서 직접 중재하신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굴러 온 돌에 불과한 대장군을 기존 황실의 신하가 고깝게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 입지가 줄어드는 문제도 있으나, 무엇보다 동탁이란 인물이 조정에서 무슨 패악질을 벌였는지 전부 알고 있었기 때문.
당연히 여러 견제가 있었지만, 그런 견제는 황제가 직접 나서는 것과 동시에 힘을 잃었다.
“저희가 비록 진국(陳國)을 다스리는 관직에 있지만 그조차도 전부 폐하께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지요.”
제아무리 또 다른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권력이 크다고 한들 황제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천자(天子).
하늘의 선택을 받은, 황제를 달리 이르는 말.
모든 권력의 중심점은 누가 뭐라 해도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였다.
“황제 폐하께서 저희의 관직을 다시 몰수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易如反掌, 이여반장)처럼 쉬운 일인데, 저희가 폐하의 총애를 받는 대장군을 오가라 하며 얕보는 모습을 보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낙준은 유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 주군에게 보이는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매우 무례한 행동.
“전하께서는 다른 역적들처럼 한나라에 반기를 드시려 하십니까?”
“…하하하하!”
그러나 유총은 그를 마주하고도 호탕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대를 제후왕에 임명하겠다.
강산이 여러 번 바뀌고도 남을 긴 세월.
유총은 그러한 세월의 흐름을 직접 겪은 인물이었다.
끝을 모를 줄 모르던 체력은 점차 줄어만 갔고, 늘 한몸처럼 느껴지던 갑옷이 언제부턴가 조금씩 무거워졌다.
천하를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 이런 기분이었는가.
유총은 늙어가는 사람들이 어째서 불로초와 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속아 넘어가는지 알 수 있었다.
육체, 정신….
사람이 지닌 모든 것이 쇠락해가는 긴 시간.
그러나 딱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한(漢).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 글자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이 이 이름을 어찌 놓아버리겠는가.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천하 만민을 하나로 묶어왔던 그 이름을.
유총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내가 진왕의 자리에 앉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군.”
“…전하.”
“좋다. 이 늙은 몸 하나 움직이는 것쯤은 어렵지 않지.”
노인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체구를 지닌 유총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고 지켜본 다음 판단할 것이다.
대장군이란 인물이 정말 나라에 충성하는 신하인지, 아니면 폐하의 눈과 귀를 가리고 국정을 농단할 뿐인 역적인지를 말이다.
그가 충신이라면 그저 고개를 숙이고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한나라에 충성을 바치면 그만이다.
그러나 역적이라면….
진국의 병사들은 마지막 한 명까지 그에게 대항하리라.
제 세력과 대장군의 세력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유총도 잘 알고 있었다.
천하의 절반을 넘게 차지한 대장군과, 이름만 거창할 뿐 별 볼 일 없는 약소 세력.
자신이 반란을 일으킨다 한들 그들은 귀찮은 벌레 취급만 하겠지.
하지만 불가능한 일임을 알아도 무기를 들어야 하는 때가 분명 존재했다.
“까짓것 수락하겠다고 답장을 보내라.”
“예.”
유총의 확답을 들은 낙준은 다시 공손한 자세로 예를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총은 서찰의 내용을 뚫어지라 바라보면서 군대의 지휘관을 떠올렸다.
“장료…. 장료라….”
분명 좌장군을 맡고 있던 무장이었나.
좌장군(左將軍).
대장군(大將軍)을 보필하는 일곱 장군 중 하나.
사방장군(四方將軍) 중에서 가장 권위가 높은 관직이었으나 제후왕인 유총과 비교하면 빛이 바래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높은 관직은 높은 관직이니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줘야겠지.
유총은 어떻게 등장해야 멋있게 보일지 살짝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