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388)
EP.388 유총(1)
장료와 그렇고 그런 일이 지나가고 며칠이나 흘렀을까.
유총과의 만남은 의외로 빨리 이루어졌다.
내가 황명을 언급하며 낙양을 벗어날 수 없음을 이야기하자, 유총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낙양으로 찾아오겠다고 서신을 보내온 것.
그리고 그 결과.
“으하하! 낙양을 둘러보는 것도 오랜만이구만!”
눈앞에서 호탕한 웃음으로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유총을 볼 수 있었다.
나이를 먹은 것이라고 느껴지질 않는 큰 키와 거대한 덩치.
갑옷 사이로 조금씩 드러나는 근육질의 팔은 나 같은 놈쯤이야 허리를 폴더폰처럼 반으로 접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얼떨떨한 기분은…. 그래.
유비의 스승인 노식과 처음 마주했을 때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8척 2촌(약 194cm)이나 되는 거대한 몸집은 내 감탄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지.
역시 어느 시대를 가든 키가 이상하게 큰 사람이 존재하는 법이었다.
나는 낙양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유총에게 다가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진왕 전하, 먼 곳까지 발걸음을 옮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자네는 누구지?”
그리 많지 않은 일행을 대동한 채 낙양에 들어온 유총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가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니 이런 반응이 나와도 이상할 건 없다.
나도 주변 병사들에게 보고를 받고 이 인물이 유총이란 것을 파악한 거니까.
사진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이다지도 불편했다.
누군가의 외모를 판단하기 위한 정보가 글이나 소문밖에 없어.
무슨 기골이 장대하고 남자다운 기상을 지녔다느니….
그런 문장만 봐서 사람을 어떻게 구별해낼 수 있겠냐.
본래 역사의 장료가 합비 공방전에서 손권을 놓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이 시대 사람은 그림도 특이하게 그리는지라 이를 가져와서 비교하려 해도 구별이 영 마땅찮았다.
뭔가 공들여서 그리는 건 알겠는데 내 눈에는 조금…. 그렇다고 해야 하나.
온갖 존경심을 담아서 그렸다며 나를 그린 그림을 선물로 받을 때 참 곤란했었지.
뭔가 역사 교과서에나 실릴 법한 그림체로 내가 그려졌다 하니 기분이 정말 묘했어.
이런 그림체를 후대에서는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나네.
…동양화(東洋畵)였나?
자연 풍경은 정말 엄청나게 잘 그리는데 사람은 뭔가 간략하게 그리는 그런 스타일 있잖아.
하여튼 그 그림은 내 자택에 잘 전시되어 있다.
정말 호의로 준 선물을 대충 관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내가 여전히 의문 서린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유총에게 대답하려던 찰나, 유총이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아! 그대가 바로 대장군이군!”
유총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또 검은색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길래 황족인 줄 알았지 뭔가!”
“…….”
“하지만 눈동자를 보니 아니군! 부디 내 무례를 용서하시게!”
“당연한 판단이니 그리 마음에 담아두실 필요 없습니다.”
유총 처지에선 자신이 낙양에 들어오자마자 웬 황족처럼 보이는 인물이 말을 건 상황이니 당혹스럽게 느껴졌으리라.
그나저나 내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만 보고 누구인지 알아채다니.
내가 어떤 외모를 지녔는지는 이미 천하에 쫙 퍼진 것 같았다.
하긴 검은색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를 지닌 인물이 드문 편이긴 하지.
어쩌면 나 빼고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
검은색 머리카락 자체가 황족을 제외하면 진짜 보기 힘들다고 들었으니까.
황족이 아닌 인물 중에서 검은색 머리카락을 지닌 인물은 관우와 장비밖에 못 봤다.
…이것도 일종의 돌연변이라 봐야 하나?
흰 비둘기나 백호처럼 말이야.
유총은 자신이 황족임을 증명하는 흑색 머리카락과 흑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전에 살던 세계에선 정말 흔히 볼 수 있었던 색깔인데 이 세계에서는 드물다는 게 아이러니할 따름.
하여튼 이 컬러풀한 세상 같으니라고.
개성 하나는 진짜 확실하구만.
유총은 자신이 걸친 무거운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말했다.
“계속 이곳에 서 있으니 온갖 시선이 몰리는군! 어디, 조용하게 회포를 풀 곳이 있나?”
“이미 마련해두었으니 따라오시지요.”
그렇게 큰 목소리로 외치는데 시선이 안 모일 리가 있나.
유총은 호탕하다는 인상과 어울리게 행동하는 인물이었다.
나는 진왕 유총을 진류왕 유협과 똑같이 대우하며 그를 공손히 안내했다.
왕(王).
황제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관직이니 내가 고개를 숙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흥.”
유총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내게 슬쩍 따라붙은 보랏빛 머리의 군사는 그를 보고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우리 꼬꼬마 책사님은 뭐가 또 그리 불만이실까.
설마 내가 다른 사람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조금 기특하네.
볼따구를 마구 문질러도 무죄일 것 같다.
이제 걱정되는 점은 단 한 가지였다.
유총이 과연 내게 무슨 질문을 던지느냐.
나는 이런 문답에 진짜 약하단 말이지.
…어휴.
그래도 뭐 어쩌겠어.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그저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물러서기엔 너무 늦었다.
───────────
유총과 나는 서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마련된 건물 안에서 상대를 마주 보았다.
진국(陳國)을 다스리는 제후왕과 한나라의 군부를 총지휘하는 대장군의 회담이라.
듣기만 하는데도 참 쉽지 않은 자리네.
마치 그를 증명하는 듯 현재 이 건물은 복숭아 시스터즈와 조운을 비롯한 내 부곡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과거, 폐하께서는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왕(陳王)에 대한 처우는 화현 그대에게 맡기도록 하지.’
봉토를 다스리는 제후왕을 내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충격적인 발언.
‘그가 다른 역적들처럼 나라에 혼란을 일으킬 인물이라 판단되면 목을 베어도 좋다.’
‘…폐하?’
그 살벌한 말에 난 눈을 크게 뜨며 되물을 수밖에 없었지.
곁에서 황제를 모시던 관료들도 그 대화를 듣고 당연히 경악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모든 것을 받아들인 기색으로 평온히 수긍했다.
…솔직히 폐하가 나를 엄청나게 감싸고 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
내가 십상시나 동탁처럼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나라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니 조정 관료들은 어련히 잘하겠지라는 식으로 나를 견제하지도 않았다.
그, 뭐지.
나를 너무 믿는 거 아니냐?
내가 폐하와 정식으로 혼인을 올려 황실 세력이 됐다지만, 정말 아무런 견제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물으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황제와 결혼한 외척 세력이 권력을 잡으려는 경우가 그리 드문 것도 아니니까.
한고조 유방의 아내 여태후만 하더라도 한고조 사후 권력을 사사로이 휘두르다가 본인 가문만 몰살당하지 않았는가.
그런 경우가 있는데도 조정 관료들이 나를 견제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대충 짐작 가는 게 있긴 했다.
‘제 부족한 제자를 잘 부탁드립니다.’
대학자 노식.
‘과거와 전혀 달라지지 않으셨군요. 허허, 신수가 훤하십니다.’
중랑장 황보숭.
‘제가 힘 좀 써보도록 하지요.’
후한의 사도 왕윤까지.
지금은 모두 정계에서 은퇴를 선언한 인물들이지만, 그들이 일생에 걸쳐 쌓아온 명성과 영향력은 여전히 어마어마했다.
길을 걷다가 생각이 나서 찾아가면 지금도 방문객으로 문전성시(門前成市,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집 문 앞이 시장을 이루다시피 함을 이르는 말)를 이루고 있더라고.
그런 이들이 나에 대해 좋은 말을 해주니 조정의 엄격한 관리들도 딱히 나를 견제할 필요성을 못 느낀 모양이다.
저번에 유총을 죽이면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둥 걱정하긴 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별문제 없을 것 같네.
…그렇다고 유총을 죽이겠단 이야기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예를 들었을 뿐이다.
난 유총에게 딱히 던질 질문이 없으니 먼저 이야기를 꺼내도록 해야겠지.
“아무래도 제게 질문이 있으신 것 같군요.”
“…….”
“경청하겠으니 말씀하시길.”
내가 평소와 똑같은 담담한 목소리로 화두를 열자 유총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우, 눈빛 봐라.
일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노당익장의 기세가 이런 건가?
유총은 본래 역사에서 원술이 보낸 암살자에게 죽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꿀물쟁이 황제 참칭자 원술이 맞다.
원술은 자신의 물자 요청을 거절했다는 속 좁은 이유로 암살자를 보냈고, 그 암살 시도는 의외로 성공해 유총이란 거물을 난세에서 퇴장시킨다.
근데 이런 인물을 도대체 어떻게 암살한 걸까.
괜히 어쭙잖게 다가갔다간 맨손으로 목을 비틀어 버릴 것 같은데?
심지어 그 암살자란 인물은 유총과 그를 따르던 낙준을 동시에 암살했다고 하니….
아무래도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나 보다.
심상치 않은 눈빛을 마주한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유총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대는 한나라의 충신인가?”
“아…. 그것 말씀이십니까.”
참 많이도 들었던 질문이지.
동탁을 낙양에서 쫓아내고 대장군 자리에 오른 이후 수없이 받았던 질문.
어떨 때는 간접적으로, 또 어떨 때는 지금처럼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을 받은 나는 늘 이렇게 대답해왔다.
“예.”
“…….”
“저는 새로운 왕조를 연다든가 그런 귀찮은 짓은 못합니다.”
기껏 나라를 세워도 왕망(王莽) 꼴이나 나지 않으면 다행일 터.
온갖 정치질로 한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위풍당당하게 신(新)나라를 건국했던 그는 불과 15년 만에 나라를 말아먹고 자신도 처형당하는 우스운 최후를 맞이한다.
그 이후에는 광무제가 후한을 건국하면서 얄짤없이 역적 취급을 받고 후대에는 망탁조의(莽卓操懿) 중 한 명으로 이름이 올라가지.
어떻게 보면 한나라를 전한과 후한으로 나눈 셈이니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긴 했다.
안 좋은 의미라는 게 문제지만.
유총의 질문에 담담하게 대답한 나는 평온한 표정을 되물었다.
“어떻습니까. 대답이 됐습니까?”
“…하하하! 그래! 그렇고말고!”
유총은 내 대답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매우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나는 알 수 있다! 전혀 거짓을 고하는 눈이 아니구나!”
뭐야. 그것도 구별할 수 있어?
혹시 초능력자인가.
큰 소리로 웃던 유총은 제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쾅 내려놓았다.
“이 기쁜 날에 술이 빠질 수야 없지! 한 잔 마시겠는가!”
“…….”
그, 뭐냐.
참 호방하시네.
이것밖에 할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