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397)
EP.397 강동(1)
시간은 모두에게나 평등하고, 늘 어떻게든 흐르는 법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지.
분명 과거에는 언제 봄이 찾아오나 이러고 있었는데 어느샌가 찾아오지 않았나.
으슬으슬한 바람을 맞으면서 부들부들 떨던 게 어제 일어났던 일 같은데 말이야.
하북의 패권을 두고 서로와 다투던 원소와 공손찬의 대결은 이제 그럭저럭 결판이 난 것 같았다.
저번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공손찬은 정치 활동이란 걸 모르는 깡패 군인이었고, 원소는 그런 공손찬을 압박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냥 끊임없이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키더라고.
무리한 대규모 토목 공사로 잃어버린 민심,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지는 병사, 희망이 없다 느끼고 서서히 등을 돌리는 호족까지….
공손찬이 홀로 남겨지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던 것이다.
공손찬의 얼마 안 되는 우호 세력은 이놈이 성격은 난폭해도 이민족을 보는 족족 대가리를 깨버리던 미친놈이니까 따르던 건데, 원소와의 전쟁에선 이상하게 힘을 못 쓰고 지지부진한 모습만 보이니 등을 돌리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애초에 깡패 군인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낄 인간이 얼마나 될까.
있다 하더라도 매우 극소수겠지.
그저 안 따르면 죽을 것 같아서 공손찬을 따랐을 뿐인데, 저기 기주에 있는 원소가 그 공손찬을 서서히 밀어붙이네?
심지어 공손찬은 자기 식구만 챙기느라 자신들은 뒷전이고 재산과 백성까지 무리하게 징발해간다.
이에 대해 뭐라 입을 여는 순간 목이 달아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이렇게 업보가 쌓이면 우호 세력은 자연스럽게 줄을 갈아탈 준비를 하지.
처음에는 공손찬의 힘이 두려워 눈치만 살피던 놈들도 뒤통수를 치기 위해 슬그머니 손을 올린 상황.
그렇기에 일정 영토를 지배하던 호족은 원소의 군세가 근처까지 밀고 들어온다 싶으면 곧바로 백기를 들며 항복했다.
그냥 자동문이야. 자동문.
원소가 요새에 당도하면 그 요새의 문이 띵 소리를 내면서 열리는 것이다.
제 업보 때문에 믿을 만한 아군은 한 명도 없고, 자신이 직접 나서도 원소의 본대와 엎치락뒤치락 진흙탕 싸움만 반복한다.
이런 상황에 처한 공손찬이 보인 행동은 간단했다.
자기 영토의 백성을 갈아 넣어서 만든 대규모 요새, 역경루(易京樓)에 틀어박힌 것이다.
속된 말로 우주 방어 메타에 들어갔단 거지.
자. 그러면 여기서 첩보가 가져온 역경루의 스펙을 살펴보자.
역경성은 10중의 참호가 있고 참호 뒤에 각기 5, 6장 정도(12~14m) 높이의 벽이 있다.
즉, 성벽에 다가가기 위해선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는 구덩이를 열 개나 넘어야 한다는 뜻이지.
심지어 성벽에 어찌저찌 다가가도 공성군을 맞이하는 건 14m에 달하는 거대한 성벽이었다.
그리고 성벽 위에 망루만 수천 개에 이르렀으며, 공손찬 자신이 거주하는 중앙의 망루는 특별하게 건축하여 벽의 높이가 10장(23m)이 넘었고, 그 위에 고층 누각을 세웠다고 한다.
또 군량미 3백만 섬을 쌓아두며 장기전에도 대비했기 때문에 성 안에서 둔전까지 가능하다 하네.
어마어마하게 높은 성벽과 그 성벽을 지키기 위해 세워진 수천 개의 망루.
심지어 농사를 지으면서 자급자족까지 가능한 땅.
이게…. 고대의 건축 실력?
가슴이 아주 웅장해지네.
피라미드도 그렇고 옛날 사람의 건축 실력은 확실히 대단하구만.
어째서 그 원소가 4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이 요새 하나에 끙끙거렸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건 그럴 수밖에 없는 요새야.
아니, 어쩌면 4년이나 걸려서 뚫은 것도 빠른 게 아닐까.
역경루에 틀어박힌 공손찬이 정말 말 그대로 편집증적인 증세를 보여서 부하들이 도망치거나 투항하지만 않았더라도 몇 년은 더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원소도 정면에서 성벽을 뚫은 게 아니라 두더지마냥 땅굴을 파서 겨우 점령한 요새.
그렇다고 역경루에 틀어박힌 공손찬을 무시한다?
제 아무리 공손찬이 원소에게 밀렸다지만, 군사력 자체는 여전히 원소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공손찬이 어떤 인물인가.
인성은 길거리 깡패와 비슷한 지랄 맞은 수준이고, 지력과 정치력도 감히 노식에게 가르침 받았다 주장하는 것이 부끄러울 낙제생 수준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을 이끌면서 적과 맞붙는 통솔력과 무력만큼은 엄연히 상위권에 위치한 장수지.
언젠가 소규모 병사와 함께 북방을 순찰하다가 이민족에게 포위당했는데, 공손찬은 싸우지 않으면 죽을 뿐이라면서 홀로 이민족 수십 명을 죽이며 탈출했다 한다.
소규모 군세로도 이런데, 이런 인물이 대규모 병사를 이끌면서 본격적으로 이민족 대가리를 깨부수고 다니면 어떻게 될까?
허구한 날 지들끼리 싸우면서 전투 병기로 거듭난 이민족이 괜히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 부르며 두려워하던 게 아니지.
그저 잘 싸우는 것 하나만으로 유주의 패자로 우뚝 선 장수.
그게 바로 공손찬이란 인물이었다.
역경루를 무시하자니 언젠가 뒤에서 뒤통수를 창으로 찌를 것 같고, 성벽을 뚫어내자니 도저히 답이 안 보인다.
오죽하면 역경루를 공격하던 원소조차 ‘야, 우리 그만 싸우고 화해하자….’ 이런 서신을 보냈겠는가.
하지만 공손찬은 엿이나 먹으라며 군량을 더욱 비축하고 전투를 준비하지.
공손찬이 이렇게 필사적으로 저항하자 결국 득을 본 건 조조였다.
원소가 공손찬에게 발목을 붙잡힌 동안 연주에 있던 조조는 제 나름대로 할 일을 하면서 쑥쑥 크고 있었지.
이각과 곽사를 피해 달아난 황제를 보호해 협천자도 하고, 서주에 눌러앉은 여포와 유비의 사이를 이간질하며 열심히 중앙을 정리하고 있었다.
만약 공손찬이 원소에게 빨리 처리당했다면 관도대전이고 뭐고 조조는 그냥 압도적인 세력 차이에 압사당했을걸.
지금은 내가 그 조조 입장에 있을 뿐이다.
원소가 공손찬에게 발목을 붙잡힌 동안, 나는 천하 대부분을 집어삼키면서 세력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커졌지.
이제 와서 어느 한 세력이 유주와 기주를 차지한다 한들 덩치 차이가 나는 수준이다.
천하 인구 3분의 1이 하북에 몰려있다고?
괜찮다.
난 나머지를 집어삼키면 되니까.
내가 아직 점령하지 못한 강동은 사실 대부분이 미개척지라 넓은 땅에 비해 인구수가 무척 적었다.
그냥 장강을 넘어서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고 해야 할 수준이지.
“…….”
나는 눈앞에 놓여있는 두 개의 서신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하나는 공손찬에게 온 서신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
원소에게 온 서신이었다.
하북에서 각자 할 일을 이어나가던 세력이 드디어 나와 접촉하기 시작한 것.
서신도 마치 누군가가 노린 것처럼 비슷한 시기에 같이 날아왔다.
그러면 누가 보낸 서신부터 읽어보는 게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공손찬이 보낸 서신부터 꺼내 읽어보았다.
───분무장군(奮武將軍) 공손백규가 고귀하신 한나라의 대장군께 인사 올리오.
아이고, 우리 손찬이 형이 많이 공손해졌네.
분명 내가 유비에게 시켜 유우를 빼낼 때만 하더라도 북방 사나이의 거침없는 비난을 갈기지 않았었나?
문체는 고상했지만 내용은 분명 나를 욕하고 있었지.
뒤에서 비겁하게 계략이나 쓰며 내 뒤통수를 치는 꼴이 참으로 음습하며 비열하다던가.
그 뒤로 자기 자신을 유주자사라 자칭하며 유우가 있던 자리를 멋대로 꿰찼을 땐 얼마나 감탄이 나왔던지….
‘대장군, 훗날 공손찬을 붙잡는다면 꼭 짐에게 데려오거라.’
그때 폐하께서 공손찬이 보낸 서신을 확인하고 내게 지어 보인 표정은 지금 떠올려도 살벌했다.
하지만 그랬던 손찬이 형도 지금 와선 자신을 잡호장군 중 하나인 분무장군으로 칭하며 내게 예의를 지켰다.
공손찬이 자신을 유주자사가 아니라 분무장군이라 칭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게 조정에서 정식으로 임명한 공손찬의 관직이거든.
그러니까 공손찬은 지금 내게 완전히 몸을 숙인 상황이라 볼 수 있었다.
원소야. 도대체 어떻게 때렸길래 이 깡패가 내게 공손해진 거냐.
이거 완전 예절 주입기구만.
───내가 대장군에게 서신을 보내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오라….
그 이후 서신에 적힌 내용은 당연하다면 당연할 정도로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자신이 역경루에서 원소를 붙잡는 동안 뒤쪽에서 그녀를 공격해달라는 것.
그러면 자신 또한 성문을 열고 공격에 호응하겠다고 적혀있었다.
흐음…. 확실히 나쁜 제안은 아니다.
지금 원소 세력이 강성하다곤 하나 우리 세력은 그 원소 세력도 따위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거대하니까.
정면으로 맞붙어도 지는 게 이상한 상황인데 공손찬과 앞뒤로 협공한다?
그러면 아주 적은 피해로 기주를 지배하는 원소 세력을 끝장낼 수 있을 것이다.
근데 내가 원소를 공격하기에 앞서 딱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원소가 과연 내 적이 맞느냐는 것.
어찌 보면 원소는 아직 세력이 합병되지 않았던 조조 세력과 입지가 비슷했다.
적이라 하기도 뭐하고, 아군이라 하기도 뭐한 애매한 상황.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공손찬의 서신을 대충 정리하고 또 다른 서신을 손에 들었다.
───오랜만입니다. 혹시 저를 잊어버리신 건 아니겠지요?
마치 오랜 친구에게 보내는 듯한 친근한 내용.
누가 사대삼공의 명문가 아니랄까 봐 어마어마한 달필이었다.
───맹덕에게 듣기로는 대장군께선 쓸데없이 긴 내용을 싫어한다고 하셨으니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어…. 아무래도 조조와 원소는 평소에도 자주 서신을 주고받았나 보다.
도대체 무슨 대화를 나눴길래 나에 대한 정보가 원소에게 흘러들어간 걸까.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하니 굉장히 신경 쓰였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점은 그게 아니지.
난 곧바로 내용을 계속 읽어나갔다.
───그대는 어떤 선택을 내리실 건가요?
꽤나 두루뭉술한 질문이네.
한 쪽은 자신과 힘을 합쳐 적을 치자 종용하고 있었고, 다른 한 쪽은 그저 순수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듣자하니 원소는 원술의 잔당이 자신에게 몸을 의탁하러 오자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전부 목을 베어버렸다고 한다.
나라에 반기를 든 역적은 삼족을 멸하는 게 원칙이지만, 죄 없는 어린아이는 신분을 강등하는 것에서 멈추겠다던가.
이건…. 마치 누군가를 따라 한 듯한 행동이 아닌가.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도 정치적 쇼맨십에 대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 굳이 이런 행동을 보인다는 건 분명 어떠한 뜻이 있는 게 분명했다.
또 조조처럼 원술이 창설한 연합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대립 구도를 세우면서 꿀물쟁이의 심기만 박박 긁었다는데.
뭐, 상대가 이만큼 힌트를 줬으면 알아들어야 하는 게 사람이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피식 웃은 다음 서신 한 장을 골라 눈앞에서 치워버렸다.
솔직히 넌 업보를 너무 많이 쌓았어.
다음 생에는 착하게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