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403)
EP.403 동오덕왕(東呉徳王)(3)
엄백호 덕분에 강동이 한바탕 난리가 났다고는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
그때 강동에 도착하기는커녕 이제 막 절반쯤 도달했을 때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래도 아예 나쁜 상황만큼은 아니었다.
강동에서 제일 유명한 세력이 비록 내부의 배신으로 어이없이 큰 피해를 입었다지만, 아직 제 영토를 전부 잃은 것은 아니었고 그를 중심으로 뭉친 호족 연합군도 여전히 건재했다.
강동 호족들도 유요가 완전히 무너진다면 다음은 자신의 차례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엄백호를 비롯한 산월족의 목적은 강동에서 한나라를 완전히 쫓아내고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기 때문.
그들과 손을 잡아 아군의 뒤통수를 후려친다면 지금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훗날 토끼 사냥을 끝마친 사냥개처럼 삶아 먹히리란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나를 암살하려 했던 착융이란 놈은 몰랐던 것 같지만.
도적치곤 드물게 대국적인 시야를 가졌지만 도적은 결국 도적이라는 걸까.
물론 유요가 뒤통수를 맞았을 때 목숨이라도 잃었다면 상황은 완전 이상해졌겠지.
지도자를 잃은 유요 세력은 당연히 공중분해가 될 거고, 구심점이 사라진 호족 연합군도 다른 구심점을 찾으며 어영부영하다가 산월족에게 각개격파 당할 것이다.
호족은 말 그대로 호족일 뿐이니까.
유요처럼 조정에서 직접 관직을 임명받은 인물이 아닌 이상 같은 호족 위에 올라설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제 손길이 닿는 영토 안에서는 어깨 좀 펴고 다닌다고?
그건 다른 호족들도 똑같은데?
수준이 서로 비슷비슷한 놈끼리 모이면 당연히 명령받기 싫지.
호족들이 유요 휘하에서 연합군으로 활동하는 이유도 유요가 무려 한 주(州)를 책임지는 양주자사 관직에 앉아있기 때문이었다.
명령을 무시하자니 그럴 만한 명분도 없고, 난 너 인정 못한다면서 대들면 오히려 한나라 관료에게 대항한 역적 무리라면서 단번에 고립당한다.
그러면 본래 역사에서 그들을 다 줘패고 다녔던 손책은 뭐냐고?
어….
그건 아주 예외적인 상황이다.
십상시, 동탁, 이각과 곽사.
심지어 조조까지.
이런 환상적인 콜라보 덕분에 한나라의 권위는 말 그대로 나락까지 추락한 상태였고, 나라를 이끌어야 하는 황제조차 모든 권력을 박탈당한 채 그저 명분만을 위한 병풍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때 손책 뒤에는 원술이라는 거물급 인사가 든든히 자리 잡고 있었으니 문제 될 게 뭐가 있겠나.
물론 원술이 정말 든든할 리는 없겠지만, 일단 겉모습만 따지면 그는 사세삼공 가문의 적자이자 관직도 무려 사방장군 중 하나인 후장군(後將軍)에 올랐던 놈이다.
그나저나 진짜 이름 적응 안 되네.
어떻게 관직 이름이 후장군….
후장군은 당연히 그렇고 그런 뜻이 아니라 단순하게 후방을 담당하는 장군이란 뜻이다.
후방…. 후방….
…후방을 담당해?
윽, 또 이상한 생각이….
원술과 후장, 아니 후방을 연관 지어 무언가 이상한 걸 상상하려는 몹쓸 머리를 나는 세차게 휘저었다.
“…?”
근처에서 이를 지켜보던 서여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난 이에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이건 내 존엄성과 관련된 문제야.
난 다시 생각을 원래대로 되돌리며 강동의 상황을 판단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강동의 터줏대감 노릇을 해왔던 산월족과 그에 맞서며 제 영토를 지켜내려는 호족 연합군.
누가 봐도 한 판 크게 붙을 모양새였고, 실제로 이미 여러 번 크게 붙으며 자기들 사이가 나쁘다는 걸 온 천하에 다 알려주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무엇이냐.
아주 간단하지.
강동이 혼란스럽다면 나도 그 틈을 타서 어느 카드 게임의 험상궂은 손님마냥 싸움에 끼어들면 된다.
비록 강동으로 향하기 위해선 장강을 넘어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긴 한데, 지금 강동 자체가 워낙 개판이 된 상태라 별다른 문제 없이 상륙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러면 수군 훈련을 왜 2년이나 한 건지 의문이 들긴 하는데, 원래 전쟁이란 것은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 법이니까.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이 있듯이 굳이 싸울 생각이 없더라도 군대 육성은 언제나 열심히 해야 했다.
산월족은 내가 강동에 상륙한 다음 눈에 띄는 족족 머리를 깨부수고 다니면 되겠지.
수백 년 동안 한나라에 저항하며 강동에서 온갖 문제를 일으키던 녀석들이고, 본래 역사에서도 강동에 자리 잡은 오나라와 수십 년 동안 치고받으며 머리끄댕이 붙잡고 영혼의 한타를 벌이던 놈들이다.
이런 놈들이 과연 평화적인 해결 방법에 동의하고 한나라와 힘을 합칠까?
그럴 리가.
오히려 이 땅에서 썩 꺼지라며 화살 비나 내려주겠지.
대화는 나눠보겠다만, 아마 높은 확률로 맞붙게 될걸.
말이 안 통한다면 결국 남은 것은 주먹뿐이다.
유요를 비롯한 호족 연합군은…. 일단 내게 보이는 태도를 보고 처우를 결정할 것이다.
형주 호족처럼 제 이익을 위해 호시탐탐 내 뒤통수를 후려칠 기회만 노리던 승냥이 같은 놈들일까.
아니면 익주 호족처럼 힘의 차이를 깨닫자마자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는 놈들일까.
전자라면 아주 높은 확률로 자신이 저지른 죄에 연루되어 목이 날아가는 거고, 후자라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적당한 관직 하나 대충 던져준 다음 예의주시할 생각이었다.
물론 형주 호족 중에는 방덕공처럼 훌륭한 인재도 숨어 있었고, 익주 호족 중에도 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키다가 목이 댕겅 날아간 호족이 있었다.
사람 사는 곳은 대충 다 비슷하지.
이런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융통성 있는 행동이었다.
방침은 대충 정했으니 이제 장강을 건너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해야 할 시간이다.
그래서 그 일이 무엇이냐.
뭐긴 뭐겠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군.”
수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손책과 만나는 거지.
아, 그리고 수군을 지휘하던 주유도.
“…….”
물론 그녀들 말고도 기존에 손견을 따르던 황개와 정보 같은 노장들도 그의 자녀인 손책을 따라 종군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백전노장이라 느껴지는 노인들에게 인사를 받을 때마다 기분이 묘하단 말이지.
내 가슴 어딘가에 있는 유교의 혼이 울부짖는 걸까.
나는 눈앞에서 공손히 예를 표하는 두 여성을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군.”
“…예.”
내 말을 들은 손책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솔직히 오랫동안 가족을 못 보는 것은 섭섭할 테니, 나는 뭣하면 주유에게 며칠 동안 자리를 맡기고 낙양으로 찾아와도 된다 말한 적이 있다.
…잘 생각해보니 며칠이 아니구나?
강동이 낙양과 워낙 멀어야지.
아니, 손책 수준의 무인이라면 밤낮 할 것 없이 달려서 며칠 만에 오겠네.
원술도 광정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조조의 호표기를 피해 연주에서 강동까지 쉬지 않고 달아나지 않았는가.
그 원술도 했던 일을 손책이 하지 못하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손책은 이런 내 권유를 거절하고 수춘에 쭉 머무르며 언젠가 있을 전투에 철저히 대비했다.
뭐래더라.
굳이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 괜찮다고 말했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제 가족을 잘 보살펴주리라 믿는 모습이었다.
나를 너무 신뢰하는 거 아니냐.
난 손책을 잠깐 바라보다가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거다만, 쓸데없는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원한을 사진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손책은 전혀 찔리는 점이 없다는 듯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를 본 나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
손책은 성격이 너무 거칠어서 온갖 곳에서 원한을 사 습격을 받지 않았는가.
누가 그 소패왕 아니랄까 봐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도 자객들을 혼자서 죽이긴 했다만, 치료 도중 또 그놈의 성질머리를 참지 못하고 날뛰다가 상처가 터져 20대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제 아버지인 손견을 누구보다 닮은 빛나는 별이 허무하게 떨어진 것이다.
이런 역사를 알고 있는 내가 손책을 신경 쓰는 건 당연하지.
아, 삼국지 연의에선 도사 우길의 혼령도 나타나 손책을 괴롭히던가.
관우도 그렇고 왜 이렇게 저주를 거는 인물이 많지.
이러다가 나도 조만간 귀신을 볼 것 같아 두려울 따름이다.
손책도 내가 아버지의 은인이다 보니 성격을 죽이고 내 명령에 따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나 또 뭔가 억제기 비스름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손책에게 시선을 뗀 다음 곁에 있던 주유를 바라보았다.
“…….”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네.
참고로 주유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낙양으로 찾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손책이 권유였다면, 주유는 명령이지.
내 입장에선 주유가 잠깐 시선을 떼면 언제 돌연사할지 모르는 개복치로 보였기에 어쩔 수 없다.
솔직히 검을 휘두르는 몸놀림을 보면 나같이 평범한 놈은 금방 베어버리겠던데 왜 그리 몸이 약한 걸까.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병약 미소녀 천재 검사인가?
…주유가 본래 역사에서 30대 중반에 병에 걸려 요절한 모습을 생각해보면 병약 속성은 맞는 것 같다.
다른 평범한 관료는 꿈도 못 꾼다는 화타의 정기 검진을 받고, 몸에 좋다는 약재를 내가 꾸준히 보내주는데도 여전히 불안했다.
나는 주유에게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말을 걸려 했으나, 여러 인물이 지금도 내게 몸을 숙인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으음….
역시 불편하네.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이 몸을 숙이는 광경에 우월감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속이 더부룩해지는 게 취향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이럴 필요가 없다 말하고 싶은데 아랫사람 처지에선 오히려 그게 더 부담이겠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인사는 그쯤하고 일어나거라.”
“예.”
머쓱한 심정이 든 나는 눈앞에 있는 모든 인원에게 말하고 수춘을 바라보았다.
“일단 배고프니 밥부터 먹어야겠군. 서둘러 들어가자.”
“…예.”
한나라의 대장군치고는 너무나 가벼운 말투였으나, 현재 이곳에서 이를 지적할 인원은 없었다.
“…….”
…아니, 한 명 있나?
평소에도 높은 자리에 걸맞은 위엄을 챙기라는 둥 온갖 잔소리를 내뱉던 꼬꼬마 군사의 눈초리.
그 심상치 않은 눈초리를 느낀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