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457)
EP.457 격변(1)
황제와 얼핏 살벌한 대화를 나눈 이후에도 난 근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폐하께선 이제 막 아이를 낳았으니 적어도 오늘 하루는 계속 함께해야지.
“흠…. 피휘라….”
웬만해선 내 의견을 거절하는 법이 없던 황제 폐하께서는 피휘를 생각하라는 내 말을 듣고 고민에 잠겼다.
그래. 평소 온갖 고관대작과 얼굴을 마주하는 폐하라면 문학적 능력도 뛰어날 테니 평소 잘 안 쓰이는 한자도 알고 계시지 않을까?
“으부….”
아직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아이는 어느샌가 울음을 멈추고 곤히 잠에 빠져있었다.
누가 공주님 아니랄까 봐 포대기도 아주 좋은 걸로 쓰네.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짠 비단은 아름다운 색깔로 유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뭐, 황실이 좋은 물건을 쓰는 건 당연하지.
근검절약이 나쁜 건 아닌데 최소한의 위엄은 유지해야 한다고 주변 사람들이 말하더라.
지금 나만 해도 언젠가 팔아버릴 용도로 창고 안에 짱박아두었던 사치품 몇몇 개가 자택 곳곳에 장식된 상태였다.
사치품에 발이 달려서 자기 혼자 움직인 게 아니라면 필시 누군가가 명령한 것일 터.
예상가는 인물은 많았고, 찾고자 하면 못 찾을 것도 없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내 물건을 훔쳐간 게 아니라 그냥 인테리어를 해준 것뿐인데 이걸로 잔소리해서 뭐하겠냐.
솔직히 창고 안에 사치품을 박아둔 이유 중 절반 정도가 배치하기 귀찮아서 그런 거였다.
“아, 이 이름은 어떤가?”
그때 폐하께서 모든 고민을 끝마친 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짐도 스치듯이 본 문장이지만 유(劉)씨 성에 어울리는 음독이 몇 개 있다 하더군.”
“그렇습니까?”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황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흐음…. 분명 그 중 하나가….”
하늘 아래에서 가장 고귀한 자리에 앉은 만큼 수많은 서적을 탐독했을 천자(天子)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안석 정(桯)이 좋겠구나.”
“안석 정(桯)?”
…저 단어가 뭐였더라.
안석이 무엇을 뜻하는 단어인지 떠올리던 나는 꽤 오랜 시간을 고민해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
안석(案席).
글자부터가 엄청 생소한 이 단어는 벽에 세워놓고 앉을 때 사용하는 방석을 뜻하는 단어다.
좌불안석(坐不安席, 마음이 불안해서 차분하게 앉아있지 못함)에 쓰이는 글자완 또 다른 단어지.
“…크흠.”
난 단어 하나 떠올리지 못하고 끙끙대는 내 모습을 귀엽단 눈빛으로 바라보던 폐하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다면 아이 이름은 유정(劉桯)으로 결정하신 겁니까?”
“그래. 이 글자라면 오랜 관습으로 불편함을 겪을 백성도 적겠지.”
그건 그렇다.
평소 가후나 꼬꼬마 책사들에게 대필 도움을 받으면서 여러 가르침을 받았던 나조차 겨우 떠올렸던 단어 아닌가.
이런 요소를 떠올리면 적어도 피휘로 인해 고통받을 사람은 적겠지.
그러나 무언가가 신경 쓰였던 나는 폐하께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음? 무얼 말인가?”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갈 아이의 이름이 안석이라니….”
무언가 좀…. 이름으로 쓰기엔 상당히 애매한 뜻 아닌가.
왠지 폐하의 의견에 반대만 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찜찜하긴 하네.
아마 다른 평범한 인물이 나처럼 행동했다면 분위기가 엄청 싸늘해졌을 터.
그래도 결국 결정을 내리는 건 폐하니까.
난 황제 폐하께 의견만 낼 뿐, 결정이 내려진다면 잠자코 따를 뿐이다.
“후후. 참 그대다운 고민이구나.”
내 염려 섞인 의견에 폐하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안석 정(桯)에는 안석 말고도 기둥이란 뜻이 있느니라.”
“…그렇습니까?”
그건 또 몰랐네.
난 기둥이라 하면 기둥 주(柱)만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중복되는 뜻을 가진 글자도 참 많아.
이것도 어떻게든 피휘를 피해 가려 했던 흔적인 걸까?
“훗날 짐의 자리를 이어받고 나라를 떠받드는 기둥이 된다.”
폐하께서는 그리 말씀하시며 싱긋 웃어 보였다.
“어떤가. 그대가 보기에도 좋은 뜻이라 생각되지 않나?”
“예.”
그 설명을 들은 나는 공손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선 자식의 말랑말랑한 볼살을 쿡쿡 찔렀다.
“으에….”
“후후. 제 아비를 닮아 참으로 귀엽구나.”
폐하는 제 볼살이 찔리자 잠든 상태로 칭얼거리는 유정을 바라보며 쿡쿡 웃었다.
…나보다는 폐하를 더 닮은 것 같은데.
나를 닮았으면 폐하 말마따나 저리 귀여운 외모로 태어났을 리가 없잖아.
‘…주인님과 닮았습니다.’
‘이것 봐! 나 쳐다보는 모습이 정릉과 똑같아!’
하지만 과거 다른 여인들이 보였던 모습을 떠올린 나는 잠자코 수긍했다.
사랑은 인간의 눈을 멀게 만든다던가.
콩깍지가 씌어도 제대로 씌어 온갖 심미안이 날 기준으로 맞춰진 상황인데 내가 아니라고 주장해봤자 씨알도 통하지 않았다.
아무튼 자기 말이 옳다는 기세로 밀어붙이는데 내가 뭘 어쩌겠냐.
“내 귀여운 딸아. 어서 무럭무럭 자라다오.”
나는 제 아이를 진심으로 축복하는 폐하의 모습에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
이제 본격적으로 날씨가 추워지는 시기가 되자 나는 집 바깥으로 나가기 싫어하는 몸뚱어리를 억지로 움직이며 내년 방침을 정했다.
“어디 보자….”
난 한나라를 표현하는 커다란 지도 위에 패를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현 정세를 파악했다.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주(州) 단위로 커다랗게 쪼개놓은 땅덩어리.
나는 흔히 후한 13주(州)라 불리는 거대한 지역을 눈대중으로 살펴보았다.
사례주, 형주, 예주, 연주, 서주, 익주와 그 외 기타 등등.
이번 원정으로 점령한 양주, 교주 지역까지 포함하면 천하 대부분이 우리 세력 손아귀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 참고로 교지 지역은 폐하께 건의를 올려 이름을 교주로 바꿔버렸다.
살짝 불편했던 무언가가 드디어 사라진 기분이야.
“…….”
이제 남은 세력은 기주의 원소와 유주의 공손찬뿐.
뭐, 말이 두 세력이지 사실상 한 세력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한때 유주자사 유우를 물리치고 하북의 패자로 우뚝 올라섰던 공손찬은 이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신세였으니까.
계교 전투에서 자신이 자랑하는 특수 부대인 백마의종 대부분을 잃고, 그 이후 지지부진한 소모전만 계속하다가 결국 기주라는 꿀땅을 차지한 원소에게 물량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또 공손찬은 평소 행실조차 좋지 않아 그나마 있던 우호 세력조차 전부 잃어버렸지.
지역 호족은 전부 등을 돌렸으며, 백성은 온갖 폭정을 일삼던 공손찬에게 저주의 말만 내뱉었다.
이런 상황까지 몰린 공손찬이 이제 뭘 어떻게 하겠나.
공손찬은 결국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만든 역경루란 요새에 틀어박혔다.
그 와중에 희망은 버리지 못했는지 내게 서신을 보내며 앞뒤로 원소를 협공하자 제안했으나….
‘제게 좋은 계획이 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나는 이를 거절했고, 오히려 제갈량의 계책을 받아들여 원소와 내통한 다음 공손찬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어느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나.
기대했기에 배신당하는 거라고.
그렇게 기대를 제대로 배신당한 공손찬은 그 이후 역경루에 틀어박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수준을 넘어서서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반복하고 있다던데.
첩보가 가져온 정보에 의하면 자기 부하들을 일절 만나지 않고 자신의 첩을 통해 멀리서 목소리만 내며 일방적으로 명령을 전달한다던가.
나는 본래 역사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가는 공손찬의 모습에 픽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공손찬이 기행을 반복하자 지금 역경루에선 실시간으로 탈영병이 속출하고 있었다.
병사는 물론이고 그들을 지휘해야 할 부관과 장수까지 탈영한다는데, 이를 보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을 터.
지금은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고 있지만, 조만간 날씨가 풀린다면 원소군이 땅굴을 파고 역경루를 점령하리란 걸 예측할 수 있었다.
겨울에는 땅이 얼어서 삽질하기가 힘들잖아.
나는 삽 위에서 토끼마냥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억지로 땅을 파냈던 과거를 떠올리곤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튼 공손찬이 원소에게 처리당한다 치면 남은 건 하나뿐인데….
“으음.”
원소 세력을 어떻게 흡수해야 탈이 안 날까.
원소가 상황 판단이 가능하다면 지금 우리 세력에 맞서는 건 자살 행위라는 걸 알 수 있을 터.
뭐, 제 동생인 원술마냥 권력욕에 미쳐서 싸움을 걸 수도 있지만 그럴 확률은 무척 낮았다.
내가 조금 전 원소 세력이 유리하다곤 했으나 공손찬한테 입은 피해를 완전히 복구한 건 아니거든.
공손찬은 변방에서 이민족을 척살하며 명성을 드높인 인물이고, 군웅할거 초기에는 규모로만 따지면 그 원술과 비슷한 강대 세력이었다.
그런 놈이 몇 년에 걸쳐 필사적으로 저항했는데 원소가 정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을까.
공손찬을 처치하고 유주를 완전히 점령한다 한들, 내가 곧장 쳐들어온다면 어어 하다가 쭉 밀려버릴 것이다.
또 내게 대적할 명분 자체가 부족했으니 몇몇 충성스러운 인물을 제외하고는 전부 등을 돌릴 터.
이는 정치적 수완으로 엄청난 명성을 얻어낸 원소가 보일 행동이 아니었다.
으음…. 그래.
조조처럼 엄청나게 높은 관직을 쥐여주면서 살살 꼬드겨야지.
만약 내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아무런 피도 안 흘리고 하북 지방을….
“주군! 급보입니다!”
“…응?”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무렵 갑작스럽게 전령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지?”
“예! 다름이 아니오라….”
전령은 내 물음에 곧장 입을 열었고, 그를 듣던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