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458)
EP.458 격변(2)
병주 삭방군(幷州 朔方郡).
명목상으로는 한나라 영토로 편입되어 있으나 이미 오랜 부정부패로 통치력을 상실한 지역.
병주에서도 가장 최북단에 있는 삭방군은 이미 그 일대를 지배하던 흉노족에게 넘어간 지 오래였다.
이민족에게 삭방군이 완전히 넘어가자 그곳에서 머무르던 백성들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아있었다.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부 몰살당하느냐, 아니면 고개를 숙이고 흉노 부족에 합류하느냐.
헛되이 목숨을 잃고 싶지 않았던 백성들은 후자를 택했다.
삭방군이란 외딴 지역에서 살아가던 백성은 가혹한 초원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 방법은 이민족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기에 한족이 또 다른 흉노족이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삭방군과 비슷한 사정을 지닌 영토가 병주 일대에 널리 퍼져있었다.
오원군(五原郡), 운중군(雲中郡), 정양군(定襄郡), 상군(上郡)….
사람이 수만 명씩 머무르는 다른 주(州)의 군(郡)과 비교하면 무척 적은 인구를 보유했지만, 그런데도 수천 명이라는 무시 못할 숫자가 머무르던 지역.
환령지말(桓靈之末).
환제(桓帝)와 영제(靈帝)가 즉위하며 후한이 본격적으로 무너져 내리던 시기.
이 두 명의 암군이 후한을 무너트리는 광경을 마주한 남흉노족은 곧바로 이빨을 드러내며 세력을 급격하게 불리기 시작했다.
어떨 때는 항복한 지역의 사람들을 징집하고, 또 어떨 때는 같은 흉노족을 흡수하기를 몇 년.
한나라에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힘을 길러왔던 이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규모는 삽시간에 불어났다.
그렇게 대가 이어지며 남흉노의 19대 선우가 된 어부라는 무려 수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한나라를, 구체적으로는 병주를 침공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뚜렷한 목적이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지역을 약탈하고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물러날 생각이었을 뿐.
───여포다! 여포가 왔다!
───야 이 겁쟁이들아─! 그만 도망쳐──!!
그렇기에 남흉노족은 상황이 불리하게 흘러가자 곧장 말머리를 돌리며 도망쳤다.
대장군이 이끄는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퇴각했음에도 수천 명의 사상자가 생겨난 전투.
이는 분명 흉노 선우의 권위를 실추시킬 만한 결과였고, 병사 자체만을 따져보더라도 꽤 뼈아픈 피해였다.
그리고 지금, 고비 사막 일대에서 두 군세가 서로를 마주한 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형성했다.
“하! 이 늑대 같은 년이, 내가 약해질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나!”
“…….”
어부라는 군을 제대로 수습하기도 전에 자신을 공격한 북흉노들을 노려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 말을 들은 북흉노의 선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칭찬해도, 안 봐줄 건데?”
“뭐라….”
일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던 어부라는 이윽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다.
본디 초원에서 사람을 늑대에 비유하는 것은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제 무리를 통솔하고 이끌 수 있는 지도력이 있다는 뜻이고, 한 번 노린 사냥감은 며칠 동안 추적하며 가장 취약한 때를 노려 기습하는 치밀함과 인내심도 지니고 있단 뜻이었으니까.
어부라 입장에선 너희가 한낱 금수 무리와 다를 바 없다는 의미로 내뱉은 모욕이었지만….
이는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한나라에 물들었는지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
오랫동안 한나라에게 몸을 낮추며 교류를 나눴던 남흉노족.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닥치지 못할까!”
제 검을 뽑아든 어부라는 이를 갈면서 소리쳤다.
“지금까지 우리만 보면 도망치기 바쁘던 놈들이 이제 와서 모습을 드러내?!”
“…….”
“오냐!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랜 싸움의 끝을 내보자!”
한때 서초패왕을 물리치고 한나라를 건국한 한고조마저 무찌르며 감히 대적할 세력이 없다 일컬어지던 북방 초원 민족.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국력을 회복한 한나라에게 반격당하고, 그 공세에서 겨우 살아남은 흉노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서흉노와 동흉노로 쪼개졌다.
흉노에게 복속되어 있던 선비족과 오환족 등은 그런 상황을 지켜보다가 독립을 선언하며 흉노와 적대했다.
가면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서흉노와 동흉노가 쪼개진 것을 수습하니 이제는 또 계승 문제로 북흉노와 남흉노로 쪼개져 버렸다.
뛰어난 지도자가 없으면 서로 자기 살만 깎아 먹으며 지리멸렬하는 모습.
이는 유목 민족의 단점이자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전원─! 돌격해라──!!”
“…….”
북흉노의 선우는 담담한 표정으로 제 화살을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일단 정면에 있는 바보 같은 동족부터 손 봐주고 세력을 하나로 합친다.
그리고 동쪽으로 내달려 자신들에게서 독립을 선언했던 오환족과 선비족을 흡수한다.
그렇게 초원의 모든 민족을 하나로 통일한 다음에는….
“끄아악!”
자신들에게 부족한 것을, 우리 민족에게 부족한 것을 손에 넣으리라.
그리 생각하며 적을 쏘아죽인 인물의 눈빛은 남쪽을 향해 있었다.
──────────
전령에게서 소식을 전달받은 나는 믿기 어렵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다시 한번 말해봐라. 북쪽에서 뭐가 내려와?”
“북방 이민족들이 장성을 넘고 국경을 침입했다고 합니다!”
“북방 이민족….”
난 그 단어를 곱씹다가 질문을 던졌다.
“흉노, 오환, 선비가 힘을 합쳤다는 이야기인가?”
“그, 그렇습니다! 마치 그들이 한 군대처럼 움직이는 것 같다고….”
“보고는 똑바로 하시죠.”
내 질문을 받은 전령이 어버버거리면서 당황할 무렵 근처에서 꼬꼬마 군사가 등장했다.
보랏빛 머리카락을 지닌 사마의는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었다.
“한 군대처럼 움직이는 게 아니라, 한 군대가 된 게 맞아요.”
“…….”
“…물론 이게 상황이 더 안 좋은 거지만요.”
사마의가 한숨을 푹 뱉으면서 말했다.
“지금 저희와 비슷하게 한 사람이 저기 북쪽 초원 지대를 전부 통일했다고 하네요.”
“우리와 비슷하다니?”
“…그걸 진짜 몰라서 물어요?”
내 얼빠진 표정을 마주한 새침데기 군사는 툴툴거리면서 설명했다.
“저희도 몇 년 전까진 저기 북쪽 이민족마냥 세력이 이리저리 쪼개져 있었잖아요.”
“어….”
“솔직하게 말해서 어느 누군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서로 죽여대기 바빴을걸요.”
그를 들은 나는 사마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칭찬 고맙다?”
“휴우…. 이걸 겸손하다고 해야 할지,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내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사마의는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
“이제 어쩌실래요? 군을 출진시킬 건가요?”
난 사마의의 질문을 듣고 잠깐 고민에 빠졌다.
사마의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질문을 던졌느냐.
그건 아주 간단했다.
지금 내게 원소를 도울 거냐 물어보는 거겠지.
이미 원소를 어찌 대우할지 결정을 내렸던 나는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수 있나. 도와주는 수밖에.”
아무리 생각해도 저놈들이 약탈만 하고 돌아갈 것 같진 않다.
애초에 사마의가 유목민 세력이 하나로 합쳐진 상태라 하지 않았나.
나는 사방팔방 흩어져 있던 유목 민족이 하나로 통일됐을 때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요나라(遼), 금나라(金), 청나라(淸).
…그리고 몽골(蒙古).
솔직하게 말해서 전부 이 시기에 등장할 놈들은 아니지.
근데 난 본래 역사가 틀어졌단 걸 충분히 인지한 상태였다.
───네 이놈, 역천자야!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느냐!
───…?
───이미 천기(天機)가 뒤틀렸다! 이제 와서 네놈이 죽는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야!
언젠가 도시 거리를 걷던 도중 한 노인이 내게 달려들며 외쳤던 말.
───너의 그 얄랑한 동정심이 끝내 더욱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될…?
마치 요술이라도 부린 듯 갑작스럽게 나타난 노인은 알 수 없는 말을 외치다가 근처에 있는 서여를 보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었지.
그리고 노인은 잠깐 멈칫한 사이 서여의 발차기에 복부를 얻어맞고 근처 건물 벽에 처박혔다.
…그 노인이 이상한 소리를 하긴 했지만 날 해하려던 것은 아니니까.
아마 죽이지 않고 붙잡을 생각이었나 본데, 한 가지 기묘한 점은 벽을 부술 기세로 날아간 노인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는 것이다.
서여에게 얻어맞고도 멀쩡한 것에 감탄해야 할까.
아니면 요술을 부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에 감탄해야 할까.
───쯧쯧. 누가 들으면 하늘이 살아있는 줄 알겠어.
───…??
───천기는 애초에 어그러져 있었거늘.
또 파란색 눈동자를 지닌 소녀가 근처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사라지는 광경은 내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안겨주었다.
이 세계에 괴력난신이 실존한다는 건 알았지만 당혹스러울 따름이지.
“으음….”
나는 탁자 위를 전부 뒤덮은 거대한 지도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사분오열 쪼개진 유목민을 하나로 합친 인물이라.
모든 역사를 통틀어 봤을 때 후보자는 많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라면 한 명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