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473)
EP.473 이변(5)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다.
패왕(霸王)이라는 뜻을 완전히 뒤바꾼 인물이자 만인지적(萬人之敵)이란 사자성어를 만들어 낸 장수.
만인지적을 그대로 뜻풀이하면 만 명을 능히 대적할 수 있다는 뜻인데, 이게 정말로 한 명이 만 명을 베어 넘길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단지 감히 비교할 자가 없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사자성어지.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광경은….
한 명이 정말 만 명을 능히 상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카가각──!!
“으아아악!”
“커헉!”
마치 트럭에 치인 것처럼 허공을 부유하는 수많은 이민족들.
나는 지금 이 시대에서 누군가가 뺑소니를 당하는 광경을 보게 될 줄 몰랐다.
“당장 거기 멈춰라──!!”
아군이 볼링핀마냥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몽골 제국의 장수가 크게 소리쳤다.
투구와 갑옷을 철저히 갖춘 무장으로 미루어 볼 때 고위직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장군.
몽골 제국의 장군은 척 봐도 심상치 않은 기마술로 서여에게 달려들었다.
“대칸(大汗)께는 결코 다가가지 못한…!”
서걱─!
아이고.
저건 죽었네.
병사들과 함께 용감히 맞서던 장군은 가슴이 사선으로 베이면서 그대로 낙마했다.
“장군?!”
“이럴 수가…!”
웬만한 일을 겪어도 전혀 끄떡하지 않던 이민족들이 동요하는 걸 보면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었나 보다.
“…끄응.”
상처가 난 곳을 감싸면서 자리에 얌전히 앉아있던 나는 피가 다시 한번 울컥 솟아오르자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배가 그대로 관통당해서 단약 하나론 해결이 안 되나 보네.
그리 생각한 내가 또다시 단약을 상처 부위에 쑤셔 넣고 있을 때 주변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현(化賢).”
“응?”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부르자 난 등 뒤로 뻗었던 팔을 다시 되돌리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조조구나. 부대 지휘는 안 해도 돼?”
“전부 해결하고 왔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온몸에 피가 묻어있는 걸 보면 한바탕 싸우고 온 것 같기는 한데….
“애초에 지금 자기 주군을 구하겠답시고 전부 한 곳으로 튀어 나가더군.”
“…….”
그 설명을 들은 나는 잠깐 침묵했다.
확실히 조조가 이끄는 부대는 대부분 보병이었으니까.
안 그래도 거리를 두면서 싸우던 궁기병이 후다닥 도망치면 보병은 닭 쫓던 개마냥 멍하니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화살 서너 발 정도는 쏠 수 있겠지만 글쎄….
겨우 그 정도로는 유의미한 성과를 못 낼걸.
도망치는 적을 화살 한 방으로 확실하게 끝내려면 말의 머리를 노리던가, 안장 위에 올라탄 이민족을 맞춰야 할 터.
몽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말들은 생존력이 강해서 엉덩이에 화살 한두 발 꽂히는 정도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조는 내 옆에 걸터앉으면서 말을 이었다.
“남은 장수들에게 호표기를 이끌고 추격하라 했으니 그들이 알아서 하지 않겠나.”
“…그렇군.”
난 하후돈, 하후연 자매를 비롯한 수많은 조조 휘하 장군들을 떠올리고 담담히 수긍했다.
장료나 서황 같은 장수들은 내가 미리 채갔지만 조조 휘하에는 그들을 제외하고도 뛰어난 인재가 많이 있었다.
그런 인재들이 조조 세력 최정예 기병 부대를 이끌고 출진했으면 조조가 할 일은 전부 끝났지.
전투의 막바지가 다가왔음을 실감한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조조는 평소와 다른 분위기로 말을 걸었다.
“…화현.”
“응?”
“아프지는 않나?”
난 그 걱정스러운 질문에 픽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약 먹으니까 괜찮더라.”
“…….”
근데 효과가 너무 좋은 것 같기도 해.
화타가 건네준 단약은 고통을 전부 지워버렸으나 그와 동시에 다른 촉각들까지 전부 흐릿해졌다.
머릿속도 살짝 뭉게뭉게한 것이 혼자서 걷다간 어이쿠 하면서 그대로 넘어지지 않을까.
막상 넘어져도 약효 때문에 아프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이거 약 맞나?
무슨 마약 같은 거 아니지?
막 눈앞에서 공룡이 등장하는 환각 증세가 나타난다거나, 기분만 살짝 붕 뜰 뿐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는 걸 보면 부작용이 심각하진 않은 것 같았다.
“…….”
조조는 내 상처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평소와 다르게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모습.
그 엄청난 눈빛을 느낀 내가 다 부담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장난기라곤 하나도 없는 조조의 모습에 내가 살짝 곤란해할 무렵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질문이 있다.”
“…질문? 뭔데?”
“그대가 만약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저들을 어찌할 계획이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질문이네.
하긴, 이번에는 나라와 나라가 맞붙은 거대한 전쟁이니까.
만약 한나라가 몽골 제국에게서 승리할 경우 선택지는 두 가지로 나뉜다.
산맥을 넘고 드넓은 초원까지 진출해 다시 일어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모든 이민족의 씨를 말리느냐.
아니면 적당한 선에서 끝내고 적국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미느냐.
두 가지 선택을 전부 하는 건 안 된다.
이도 저도 아닌 결정은 분명 최악의 결과를 불러올 테니까.
과장인지 사실인지는 모르겠다만 유목민은 걸어 다니는 것보다 말 위에 올라타는 법을 먼저 배운다고 말한다.
환경이 너무나도 가혹하기 때문에 부족한 것을 누군가에게서 빼앗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그렇기에 늘 칼과 피를 가까이하며 살아가는 민족.
즉 몽골 제국의 백성 모두가 전사와 다름없다는 건데 그런 나라가 되살아날 수 없을 정도로 짓밟으려면 민족 단위의 대학살이 벌어져야 했다.
로마가 카르타고를 점령할 때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수십, 수백만을 죽였던 것처럼 아예 제노사이드를 일으켜야 한다는 뜻.
이는 한 번 일어난 이상 결코 번복할 수 없다.
내가 죽냐, 아니면 네가 죽냐 두 가지 결과 중 하나만 남을 따름이지.
그리고 학살을 택했다면 필연적으로 저기 북쪽 몽골 초원까지 진출해야 한다는 건데 거기서는 더욱 가혹한 전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한무제도 전성기의 국력을 끌어모아 무려 40년을 넘게 싸웠던 곳.
심지어 그렇게 싸워놓고도 북방 이민족의 세력만 좁혔을 뿐, 이들을 전부 지워버리지 못했다.
근데 아직 난세로 인한 피해도 전부 수습하지 못한 상황에서 북쪽을 밀어버리라고?
점령해봤자 어디 사용할 곳도 없는 쓸모없는 땅을?
뭐, 정말 노력만 한다면 그들을 몰살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지금 우리 세력에는 만인지적의 무장들이 있거니와 그들을 뒤에서 보좌할 책사들도 넘쳐나니까.
하지만 적어도 몇 년은 걸릴 각오를 해야 할걸.
흉노족, 오환족, 선비족, 또 갑작스럽게 끼어든 여진족의 영토까지 포함하면 참 어마어마한 크기의 지역을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하는데 그게 단기간에 뚝딱 해결되면 이상한 일이지.
칭기즈 칸이 싸울 수 있는 이민족을 전부 끌고 온 게 아니냐 할 수 있겠지만, 본래 역사에서도 칭기즈 칸이 금나라와 전쟁할 때 몽골에서 반란이 터진 적이 있다.
심지어 그 반란을 진압하다가 사준사구가 전사하는 일도 벌어지던가.
이를 보면 아직 몽골 초원 내에 이민족이 엄청나게 많다는 걸 알 수 있겠지.
…근데 그런 전략적 요소를 제외하더라도 나는 결국 화친을 택할 생각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제 전쟁은 지긋지긋하거든.
“대충 알고 있겠지만 나는 몰살(沒殺)이라던가 학살(虐殺) 같은 단어를 별로 안 좋아해.”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던가.
겪어보지 못한 자에게 전쟁이란 달콤한 것이라고.
지금 이런 생각을 하면 이상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사람이 벌레처럼 죽어나가는 게 여전히 싫었다.
어차피 내가 온갖 개고생을 하며 몽골 제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린다 한들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이민족들이 그곳에 자리 잡겠지.
몽골 초원까지 다스리면 되는 일 아니냐 할 수 있겠지만, 내가 저번에도 말했듯 한나라는 자기가 가진 땅조차 주체 못해 행정 공백이 일어나는 국가다.
저기 강동 지방도 내가 손을 대기 전까진 그냥 야생이나 다름없지 않았나.
콰아앙──!!
나는 수만 명이 모인 전장에서 고속도로를 뚫는 서여를 바라보았다.
“피를 피로 되갚고, 그 피를 또 다른 피로 되갚는다면 전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겠지.”
사실 동아시아 역사는 그것의 반복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목민이 부족한 물자를 보충하기 위해 정주민을 약탈하고, 정주민이 이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유목민을 토벌하고, 유목민은 또다시 살고자 정주민을 공격하고….
그렇게 오호십육국 시대가 일어났고, 그 이후에도 명나라나 청나라처럼 정주민과 유목민이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는 개판이 반복된 것이다.
사람을 죽여도 똑같고 안 죽여도 똑같다면 안 죽이는 길로 가는 게 맞을 터.
“나는 이 굴레를 적당한 곳에서 끊고 새로운 길을 찾아볼 생각이다.”
“…방법이 있나?”
내 대답을 들은 조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이민족들도 살고자 전쟁을 일으킨 것이니, 붙잡혀도 차라리 죽음을 택할 텐데.”
그것도 맞다.
칭기즈 칸과 처음 이야기를 나눴을 때 그녀는 자기 동족의 목숨줄을 다른 나라가 이리저리 쥐고 흔드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지.
이는 교역이나 약탈이 아니면 나라를 지탱할 수 없는 유목 국가의 한계였다.
“따로 생각해둔 방법이 있거든.”
“…그렇다면야 말리지 않겠다.”
내가 그리 말하자 조조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기억하거라.”
“응?”
“그대가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는 순간, 난 북방에 있는 놈들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지워버릴 것이다.”
“…….”
난 조조의 서슬 퍼런 선언에 살짝 식은땀을 흘렸다.
자칫 잘못하면 서주대효도가 재현되는 건가.
…근데 여긴 서주가 아니고 효도도 아니잖아.
나는 화타가 빨리 찾아와 배에 난 구멍을 빨리 메꿔주길 바라면서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