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474)
EP.474 선택(1)
내 예상대로 서여가 나서는 것과 동시에 전장의 분위기가 제대로 뒤집히기 시작했다.
저지 자체가 불가능한 인간 탱크와 그 뒤를 뒤따르며 적들을 무찌르는 기병대.
본래 역사에서 서초패왕 항적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다던 강동 8천이 저런 모습을 보였을까?
이민족이 사방에서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들었음에도 그들은 묵묵히 온갖 방해를 뿌리치며 단 한 곳을 향해 전진했다.
“…….”
수십만 명이 뒤얽히는 전장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적발의 여인.
멀리서 전장을 지켜보던 칭기즈 칸은 자신의 상식이 아예 박살 나는 광경에 살짝 놀란 모습이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적에게 달려들던 아군이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하는 상황.
──…….
이를 지켜보던 칭기즈 칸은 무언가 느끼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려 근처 부관들에게 무언가 중얼거렸다.
──……!
거리가 워낙 멀어서 뭐라고 하는지 들리진 않았지만, 휘하 부관들의 경악한 표정을 보니 뭔가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리는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칭기즈 칸이 단호한 태도로 말하자 부관은 결국 뭔가 수긍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고선 말머리를 다른 곳으로 돌려 사방팔방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아무리 봐도 전장에서 후퇴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허, 그렇게 나오겠단 건가.”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툭 중얼거렸다.
상황이 불리해지자마자 병사들에게 후퇴를 명령할 줄이야.
아마 전쟁터에서 많이 활약했던 인물답게 자신은 여기서 도망칠 수 없다고 견적이 나온 모양.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자신을 두고 도망치라 명령한 군주도 놀랍고, 또 그 명령을 휘하 병사들이 얌전히 따랐다는 게 놀라웠다.
본래 역사에서 칭기즈 칸을 따르던 병사는 그가 물을 가리키면 물에 뛰어들었고 불을 가리키면 불에 뛰어들었다고 전해지던가.
충성심이 어마어마한 건 알았지만 저런 명령까지 들을 줄은 몰랐다.
칭기즈 칸 곁에서 머무르던 부대가 달아나자 다른 몽골 제국의 부대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한 듯 전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칭기즈 칸도 순순히 잡힐 생각은 없는지 말머리를 돌려 도망쳤지만….
쒜에엑──!!
콰직!
“…아.”
추격전을 이어나가던 서여가 제 손에 든 초진창을 힘껏 내던져 칭기즈 칸의 말을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
“…….”
분명 잘 맞췄는데 서여가 살짝 아쉬운 반응을 보였던 건 기분 탓이리라 믿는다.
…근데 보면 볼수록 궁금하네.
서초패왕한테서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나 도망쳤던 한고조는 도대체 뭐 하는 인물인 걸까.
뭐 축지법이라도 쓰면서 도망갔나?
나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빠진 기분이었다.
──────────
그렇게 서여를 비롯한 여러 장수의 활약으로 전투가 끝난 이후.
나는 포로로 잡힌 인원들을 확인하면서 탄식을 내뱉었다.
“…기가 막히는군.”
칭기즈 칸이 이끌고 온 10만.
그리고 전투 도중 수부타이가 지원군으로 이끌고 도착한 10만.
나는 도합 20만에 달하던 대규모 이민족 군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으나 어째 이긴 것치고는 그렇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몽골 제국의 군대에서 사상자가 절반은 넘게 발생하긴 했다.
단지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수만 명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꽁무니를 뺐다는 게 문제지.
그 결과 포로로 잡힌 인물은 끝까지 칭기즈 칸을 호위하기 위해 남았던 수천 명 정도밖에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수천 명 사이에 몇몇 알짜배기가 있었다는 걸까.
케식과 함께 여포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던 쿠빌라이와 보로클.
“…….”
또 내 배때지에 구멍을 뚫어버렸던 제베까지.
제베는 관우와 맞붙었을 때 무기를 잘 흘려내며 선전했으나, 곧이어 그를 보자마자 온갖 욕을 내뱉으면서 달려든 장비에게 얻어맞아 그대로 포획 당했다.
…어째 복숭아 자매는 한 명을 집중적으로 쥐어패는 상황이 많은 것 같네.
지금은 아이 때문에 낙양에 있는 유비까지 존재했다면 호로관 전투가 재현되지 않았을까.
이들을 제외하면 딱히 눈에 띄는 포로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제일 중요한 일을 해야겠지.
칭기즈 칸은 자신이 기승한 말 위에서 떨어진 다음, 눈동자만 멀뚱히 깜빡이다가 곧이어 자신을 따라잡은 적들한테 밧줄이 꽁꽁 묶인 상태였다.
“으음…. 잡혔네.”
“그래. 너 잡혔다.”
나는 최악의 상황에 처했음에도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보이는 칭기즈 칸에게 시선을 향했다.
“일단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이것 하나만 물어보겠다.”
“…뭔데?”
“만약 이곳에서 살아나간다 치면 어쩔 계획이었지?”
“살아나갔을 때 계획?”
내 질문을 받은 칭기즈 칸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대를 수습하고, 다시 공격할 거야.”
“…….”
그것 참 되게 솔직하네.
칭기즈 칸은 다른 사람에게 기묘하리만치 솔직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일생 동안 겪어온 수많은 사건이 그녀에게 영향을 준 거겠지.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칭기즈 칸의 인생은 배신의 연속이라 봐도 좋았다.
그가 다른 사람의 뒤통수를 치는 게 아니라, 칭기즈 칸이 다른 사람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거지.
일단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가 따르던 부족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그 이유가 뭔가 하니, 이름 높은 전사였던 아버지가 죽어서 너흰 이제 쓸모가 다했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테무진이 따르던 부족은 그들을 초원에 방치해두고 슝 떠나버렸지.
심지어 칭기즈 칸의 아버지인 예수게이도 독이 든 물을 마셔 사망한 것이었으니, 이는 달리 말하면 잔치에서 뒤통수를 얻어맞았다는 뜻이었다.
몽골에는 제아무리 적이라 한들 손님으로 찾아오면 크게 환대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를 이용해서 죽여버린 것.
아버지는 잔치에서 뒤통수를 맞아 죽고, 이를 들은 부족은 원수한테 복수해주기는커녕 다 큰 성인이라곤 여인 한 명밖에 없던 테무진의 일가를 초원에 버려두고 떠났다.
이 행동은 곧 다가올 겨울에 얼어 죽거나 굶어 죽으란 뜻과 마찬가지였지.
이때가 아마 열 살이었나.
즉 그는 어린 나이에 뒤통수를 연달아 맞으면서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맛본 셈이었다.
그 이후에는 이복형이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자 원한이 폭발해서 그를 화살로 쏴죽이는 일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이 발생하자 테무진 일가를 버려두고 떠났던 부족이 돌아와 테무진을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명목 상으로는 범죄자를 가만히 둘 수 없다는 이유였는데…. 글쎄?
아마도 테무진이 예상외로 잘 살아남자 훗날 자신들을 버린 것에 대해 보복하지 않을까 두려워 추격자를 푼 거겠지.
실제로 그와 관련된 기록도 있고 말이야.
가족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는 이를 무시하고 남시베리아 초원에 버려두었다가, 훗날 물어뜯을 구실이 생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모습.
노예로 잡힌 테무진은 그렇게 목에 칼을 차고 생활하다가 이를 안쓰럽게 여긴 노인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테무진의 뒤통수 맞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
훗날 자신의 큰아버지였던 옹 칸에게도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아 흙탕물이나 마시는 신세로 이리저리 도망쳤던 걸 생각하면 그는 일생이 뒤통수 맞기의 연속이었다.
자, 그러면 이제 생각해보자.
어렸을 때부터 배신의 배신의 배신을 당하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배신을 당해 온갖 고생을 겪었던 테무진이 과연 어떤 사상을 지니게 되겠는가?
그는 배신이란 행위 자체를 극도로 혐오하며, 약속을 맺으면 결코 먼저 어기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칭기즈 칸의 이러한 성향은 그가 훗날 몽골 제국을 다스릴 때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
“내가 여기서 널 풀어줘도 몇 년 뒤에 똑같이 쳐들어오겠단 뜻인가?”
“응.”
지금 이렇게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도 그러한 성향 때문이 아닐까.
“…….”
사실대로 말하자면, 칭기즈 칸이 항복할 테니 내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 빌었으면 여기서 이들을 베어버렸을 것이다.
이건 누가 봐도 너무 속 보이는 거짓말이었고 훗날 내 뒤통수를 후려치겠다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칭기즈 칸은 이 자리에서 죽을지언정 꿋꿋이 제 신념을 따라 너와 나는 적이라고 말했다.
이는 자신이 증오하는 이들처럼 비겁하게 뒤통수를 후려치는 짓은 할 수 없다 선언하는 것.
“…그렇단 말이지.”
칭기즈 칸과의 짧은 대담으로 모든 고민을 끝마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관용(寬容).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거나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걸 뜻하는 단어.
이제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누군가는 연약한 심성을 지녔다며 얕볼 것이고, 미래의 화근을 잘라내지 않았다며 적잖이 비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수십만을 이끌고 한나라에 대적하던 남만족과 산월족을 한나라에 받아들여 한족과 똑같이 대우했을 때에도 이런 말이 나왔었지.
하지만 전쟁이란 것은 옛부터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기 위해 벌어지는 일.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걸어나갈 뿐이었고, 이로 인해 전쟁이 걸려온다면 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