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475)
EP.475 선택(2)
관용(寬容).
다른 사람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걸 뜻하는 단어인데….
이는 달리 말하면 제 살을 깎아 먹는 어리숙한 사람이 될 수 있단 뜻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자비와 관용의 군주라 했을 때 제일 잘 어울리는 인물이 한 명 있지 않나.
살라흐 앗 딘(صلاح الدين).
줄여서 말하면 살라딘.
그래.
유럽 국가에게서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십자군 원정마저도 줄기차게 박살 낸 이슬람 군주가 맞다.
사자심왕 리처드 1세와의 일화로도 유명한 인물이지.
그는 이슬람이라 하면 흔히 떠오르는 부정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매우 자비로운 인물이었다.
자신이 잡은 포로들은 일부 경우를 제외하면 전부 풀어줬고, 예루살렘에 있던 프랑크인들도 몸값을 받고 모두 자유롭게 풀어줬지.
심지어 몸값이 부족한 사람들은 자기가 직접 지불한 다음 떠나보냈다 하던가.
이는 수십 년 전 예루살렘을 점령한 프랑크인들이 종교적 광기에 사로잡혀 이슬람교를 믿던 사람들을 전부 학살한 것과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사실 종교적 광신이라 하면 이슬람교도 기독교에 밀리지 않는데 말이야.
아마 살라딘이 다른 무슬림처럼 피의 복수만 외쳤다면 예루살렘은 분명 폐허가 됐을 것이다.
“일단 제일 먼저 이것부터 말하지. 나는 너희를 전부 죽일 생각은 없다.”
“…?”
이미 모두 죽을 것이라 예측한 칭기즈 칸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만요! 그렇다면 저들을 전부 풀어주겠단 이야기에요?!”
근처에서 포로들을 어떻게 죽여야 할까 고민하던 사마의는 화들짝 놀라면서 소리쳤다.
“그거 진짜 멍청한 짓인 거 아시죠? 저놈들은 풀어주면 다시 공격해올 놈들…!”
“아니, 누가 전부 풀어준대?”
나는 살짝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살라딘.
기독교 세력에서는 자비와 관용의 군주라 불리고, 이슬람 세력에서는 선지자 무함마드와 동일 선상에 세우는 최고의 군주.
하지만 살라딘도 그 특유의 자비심 때문에 손해를 본 적이 많았다.
전장에서 풀어줬던 포로가 자기들끼리 뭉친 다음 어느 한 곳에서 불온 세력을 형성한 적이 있었고, 아예 십자군에 다시 합세하여 적으로 등장한 경우도 있었지.
“이들은 인질이다.”
“…?”
툭 중얼거린 나는 이곳에 잡혀있는 포로들을 바라보았다.
수천 명에 달하는 케식과 칭기즈 칸이 제일 아낀다는 사준사구(四駿四狗)까지.
제 병사들과 함께 여포를 붙잡던 쿠빌라이와 보로클은 전황이 완전히 뒤집어졌음에도 도망치지 못했다.
누군가의 발목을 붙잡는다는 건 곧 자기 자신도 발목을 붙잡힌다는 이야기 아니겠나.
결국 저 두 명은 이도 저도 못한 채 끙끙거리다가 여포에게 자진모리 장단으로 두들겨 맞고 온몸에 시퍼런 멍이 든 채 포획 당했다.
여포는 이 두 명을 일부러 죽이지 않고 보는 사람이 식겁할 정도로 두들겨 패던데, 쿠빌라이와 보로클은 선두에 서서 여포를 붙잡을 수 있을 만큼 타고난 강골이었기에 어찌어찌 살아는 있었다.
…근데 강골이라 한들 내가 안 말렸으면 두 명은 정말 얻어맞다가 죽었을걸.
아예 적토마에서 내린 다음 방천화극으로 저 둘을 두들겨 패던 여포는 내가 뒤에서 껴안으며 말리자 겨우 진정했다.
‘이거 놔! 적어도 이 새끼들은 죽여야 화가 풀린…!’
‘그렇게 날뛰면 나 상처 벌어진다.’
‘?!’
여포는 바둥바둥 날뛰려다가 내 자해 공갈을 듣고 화들짝 놀란 채 얼굴이 시퍼레졌지.
툭 치면 돌연사할 것 같은 평범한 개복치가 지금 막 부상당한 개복치로 진화한 참이다.
…진화한 게 아니라 퇴화한 건가?
아무튼 안 그래도 내게 약한 모습을 보이던 주변 제장들이 더욱 약해지리란 것은 당연한 사실.
“…….”
지금 그 누구보다 분노하고 있어야 할 서여조차 안절부절못한 기색으로 주변을 맴도며 내 눈치만 살피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 뜻하는 바가 무엇이냐.
뭐긴 뭐야.
지금만큼은 내 말 안 들으면 죽어버린다 협박하면서 내 의견을 강요할 수 있단 뜻이지.
정리하고 보니 자해 공갈단보다 더한 인간쓰레기가 된 기분인데 어쩌겠냐.
모든 일이 끝나고 내가 원래대로 회복하면 제 의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은 내가 격한 감정을 드러내다가 자칫 잘못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최대한 얌전하게 구는 것뿐이지.
소패왕 손책도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원의 말을 듣지 않고 화를 내다가 죽었는데 나라고 오죽할까.
‘으으…. 운장 언니, 진짜 딱 한 대만 더 때리면 안 돼?’
‘안 된다.’
장비는 적장이 얼마 만큼의 값어치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던 관우가 말려서 다행이지.
근데 그런 관우조차 은은히 살기를 내비치는 걸 보면 제 마음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사마의, 지금 포로로 잡힌 병사가 몇 명이지?”
“…대충 3천 정도 되네요.”
보랏빛 머리의 군사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머지는 전부 죽거나 도망쳤어요.”
“그러냐.”
예상보다 훨씬 적은 숫자였지만 상관없다.
이 3천 명은 필시 몽골 제국의 최정예 기병대인 케식이 분명하니까.
케식은 10만 명 언저리를 오가는 몽골 제국의 병사 중에서 단 1만 명밖에 없다는 칸의 호위대다.
그렇다 치면 나머지 7천 명은 어디로 갔을까?
절반은 칭기즈 칸의 명령을 듣자마자 도망쳤을 거고, 나머지 절반은 서여와 그 뒤를 따르던 기병대에게 갈려나갔겠지.
또 여포, 관우, 장비를 붙잡는 데에도 수십, 수백 정도 죽어나가지 않았을까.
나는 눈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는 칭기즈 칸에게 물었다.
“듣자하니 그대에겐 총 8명의 이름 높은 장군이 있다던데, 나머지는 어디로 갔지?”
“아….”
내 질문을 받은 칭기즈 칸은 온몸이 팅팅 불어있는 쿠빌라이와 보로클, 그리고 어쩌면 칭기즈 칸보다 더한 눈초리를 받는 제베에게 고개를 돌렸다.
“3명은 지금 붙잡혔고….”
“…….”
“수부타이는, 도망친 것 같네.”
그건 나로서도 꽤 쓰라리다.
몽골 제국에서 칭기즈 칸 다음 가는 명장을 놓치다니.
혼자서 안량과 문추를 상대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진형을 헤집으며 탈출하는 모습은 필시 만인지적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여, 여긴 못 지나갑니다!’
‘비켜라──!!’
콰앙!
‘으하악?!’
수부타이가 탈출하기 직전 한 여장수가 모습을 드러내며 그를 막으려 했지만 힘을 이기지 못한 채 뒤로 주르륵 밀려나더라고.
어째 방통과 잘 어울릴 것 같은 소심한 인상의 여장수를 떠올리고 있을 때 칭기즈 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무칼리(Мухулай)는 서쪽으로 보냈어.”
지금 익주 방면에서 마초와 투닥이고 있는 인물이 무칼리란 뜻이네.
본래 역사에서 칭기즈 칸이 호라즘을 상대할 때 혼자 금나라에 남아서 그들을 밀어버렸던 인물.
통솔이면 통솔, 정치면 정치 어느 한 곳 모자란 능력이 없는 그 인물이라면 혼자서 한 전선을 책임질 수 있을 만했다.
“그리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던 칭기즈 칸이 다시 눈을 뜨며 말했다.
“젤메(Зэлмэ), 보오르추(Боорчи), 티라운(Чулуун).”
“…….”
“전부 여기서 죽었어.”
…응?
전부 여기서 죽었다고?
진짜로?
살짝 당황하던 나는 칭기즈 칸의 눈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확인했다.
“…….”
지금도 여전히 주인 눈치를 살피는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갈색 머리의 소녀.
…전부 서여한테 죽었구나.
확실히 서여가 길을 뚫을 때 몽골 제국의 병사가 이상하리만치 동요하던 순간이 있었지.
서초패왕은 팽성대전 때 병사 30만 명 말고도 그들을 이끌던 장수 수십 명은 해치웠다던가.
이를 생각하면 서초패왕을 정면으로 가로막는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인지 알 수 있었다.
전쟁을 일으킨 이상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나리란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
자신에게 충성하던 장수들을 대거 잃었음에도 칭기즈 칸은 생각보다 차분한 모습이었다.
“…전부 죽이지 않고 볼모로 데려간다는 건, 나한테 바라는 게 있는 거야?”
“그래.”
나는 칭기즈 칸에게 말했다.
“여기서 풀려나는 건 테무진, 너 하나뿐이다.”
“…….”
이번 전투로 확실히 알아차린 것이 있다면 저기 북방 유목민을 완전히 토벌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다.
제아무리 국경 부근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한나라 안에서 싸운 건데 이민족을 수만 명이나 놓쳐버렸지.
그렇다면 제 나와바리인 남시베리아 초원은 어떻겠는가?
유목민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특유의 생활 방식 때문에 본거지라 부를 만한 곳도 없다.
그건 즉 광활한 초원 지대를 여러 번 왕복해야 할 수 있단 뜻이지.
먹을 것도 없고 걸핏하면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혹한의 땅에서 즐거운 술래잡기….
상상만 해도 즐거워 미칠 것 같네.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한나라의 전성기를 이끌던 한무제마저 50만에 달하는 병사를 수십 년에 걸쳐 갈아 넣은 끝에야 겨우겨우 개척했다는 사주지로(絲綢之路).
“서쪽으로 향하는 길을 대신 뚫어줬으면 좋겠군.”
나는 유럽과 통하는 실크로드(Silk road)를 떠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우리와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
“그렇다면 다른 해결책을 알려주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저기 유럽 쪽으로 향하는 길에는 흉노족을 제외한 또 다른 유목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튀르크(Türk)…. 아니, 킵차크(Kipchak)라 부르는 게 정확한가?
또 알란(Alani)이란 민족까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이놈들은 유럽 근처 중앙아시아에서 머무르는 유목 민족이었다.
실크로드 자체가 중동을 건너 유럽으로 향하는 방식이었으니 웬만하면 만날 일이 없겠지만, 굳이 한 경로만 고집할 이유는 없지.
실제로 몽골 제국이 중앙아시아를 전부 점령한 이후에는 그쪽 길로도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너희가 이를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중개 무역이란 것은 이윤이 엄청나게 많이 남는 장사다.”
각국 간의 거래를 성사시키는 조건으로 수수료를 떼가는 것.
이건 과장 조금 보태서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저기 안식국(安息國, 파르티아)만 해도 비단길을 통한 중개 무역으로 이득을 쏠쏠히 빼먹지 않았나.
애초에 파르티아도 유목민이 들어서고 왕조를 세우면서 나타난 나라로 알고 있는데.
어느 국가가 교역을 끊어버리면 약탈 외에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고?
그러면 교역을 끊는 것 자체가 진짜 엄청나게 손해라는 교역로를 만들면 되지 않겠나.
부(富)와 재산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라는 더욱 부강해질 테니까.
되도 않는 쇄국 정책을 펼쳤다가 근처 나라에게 따라잡히는 것은 그 어떤 강대국도 바라지 않을걸.
또 비단길을 따라서 여러 도시가 들어설 테니 몇몇 유목민이 정착해서 살아가는 상황도 기대할 수 있겠지.
하물며 이 비단길을 통해 오가는 교역품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생각하면 칭기즈 칸이 그렇게 줄기차게 주장하던 유목민의 자립이 가능해졌다.
내게 붙잡힌 이후로도 너와 난 적이라며 꿋꿋이 주장하던 칭기즈 칸에게 나는 말을 걸었다.
“대답은 행동으로 보여주길 바란다.”
“…….”
“지금 우리에게 붙잡혀 있는 인질들을 떠올리도록.”
이게 지금 내가 내릴 수 있는 최대한의 관용이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뒤통수를 친다면….
뭐, 그땐 한 가지 방법밖에 없겠지.
다른 누군가를 무조건 용서하는 게 해결책은 아니니까.
관용의 군주였던 살라딘조차 휴전을 깨고 제 뒤통수를 쳤던 십자군은 싹 다 죽여버렸던 것처럼, 나도 그땐 한무제나 광무제가 되어 칭기즈 칸과 끝장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광무제는 한무제와 다르게 재위 기간에 천재지변이 일어나 이민족이 혼자서 박살 났지만 말이야.
이게 그 손 안 대고 코 푼다는 건가.
나도 간절히 원하면 하늘이 응답해줄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