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482)
EP.482 움직임(5)
역경루 근처에 자리 잡은 나는 어느 날 갑작스러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조만간 역경루의 성문이 열릴 테니 그에 호응하라는 편지가 왔다고?”
“예.”
“…….”
이건 너무 뜬금없는데.
과거 장각이 이야기했던 ‘바람’이란 게 지금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이 상황이 어째서 바람이라 불리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원래 예언이란 것은 두루뭉술한 말로 표현되기 마련이니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영화나 소설에서 묘사되는 예언 같은 걸 보면 온갖 은유적 표현과 수사적 표현을 사용하잖아.
‘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해와 달이 서로 맞닿는 때, 광야에서 빛이 저물 것이라고.’
‘…그 예언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있겠나?’
‘모릅니다.’
‘…….’
아무래도 예언 능력은 시를 잘 지어야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긴, 초월적인 존재가 구체적으로 시간과 장소까지 다 알려주는 건 멋이 안 살긴 하지.
‘신께서 말씀하셨습니다. XXX년 X월 XX일 XX시 XX분에 XX에서 XX가 XX를….’
‘아, 알았소….’
…그쯤 되면 신이 아니라 무언가에 사사건건 참견하는 시어머니라 불러도 되겠네.
잠시 엉뚱한 상상을 하던 나는 다시 생각을 되돌려서 의문의 편지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역경루 공략에 대해 권한 대부분을 위임받은 원소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편지를 전달한 인물도 무언가에 홀린 듯 전혀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
여기서 갑자기 신비주의자가 나타나네.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는 원소의 설명으로 짐작해볼 때 내게 편지를 전달한 인물은 아무래도 괴력난신을 다루는 사람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해!”
그때 내 근처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여포가 외쳤다.
“성문 여는 척했다가 우리 뒤통수 치는 거 아니야? 그, 공 어쩌고 하는 계략 있잖아!”
“…공성계(空城計) 말하는 거야?”
“그래! 그거!”
공성계(空城計).
성문을 활짝 연 다음 도시 안으로 적들을 끌어들여 기습하는 계략.
이는 의심이 많은 인물일수록 잘 통하는 계책이기도 한데, 실제 역사에서도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 지략의 소유자인 조조와 사마의가 이 계략에 홀라당 넘어간 전적이 있다.
조조는 조운에게, 사마의는 제갈량에게 그대로 속아 넘어갔지.
오히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진다고 해야 할까.
여포도 본래 역사에서 성격 하난 끝내주는 인물이었으니 이런 의견을 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으음…. 아마도 괜찮을걸요?”
여포의 의견을 들은 사마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도 몇 년은 버틸 수 있는 요새가 굳이 수성의 이점을 버릴 이유는 없어요.”
“…….”
“성공해서 성과를 올려도 병사가 많은 저희는 피해를 금방 복구할 테고, 만약 실패한다면 그대로 끝.”
보랏빛 머리의 군사는 내게 시선을 향했다.
“쓸데없이 위험하기만 하고 돌아오는 이익이 적은 계략을 공손찬이 쓸 이유가 있을까요?”
“그렇군.”
즉, 리스크는 큰데 리턴은 적으니 공성계가 아니란 뜻이다.
애초에 진짜 공성계라 해도 상관없지만.
매복이란 것도 급이 어느 정도 비슷해야 통하는 거지, 힘 대 힘으로 쾅 부딪치는 정면 힘 싸움에선 결코 밀려본 적 없던 우리 세력이 패배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
“…그 눈빛은 뭐죠?”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사마의의 질문을 어물쩍 넘어갔다.
본래 역사에서 공성계에 속아 넘어갔던 사마의가 이를 간파했다는 게 새삼스러울 뿐.
뭐, 그때 사마의의 상대는 제갈량이었으니까.
든든하고 안전한 계략만을 사용하던 제갈량이 그때 처음으로 도박수를 던질 거라 예상하지 못한 것일 터.
이는 사마의가 모자랐다기보단 제갈량이 매우 뛰어났던 경우였다.
“너희는 어때, 편지에 적힌 내용이 함정인 것 같아?”
난 고개를 돌려 근처에 있던 다른 꼬꼬마 군사들에게 물었다.
“함정이라기엔 너무 조잡합니다.”
“저, 저도 함정은 아닌 것 같아요.”
제갈량은 진짜 가차없는 평가를 내렸고, 방통은 소심한 표정으로 제 의견을 드러냈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내릴 결정은 하나뿐이지.
나는 한 차례 고개를 주억거린 다음 곧장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을 추스르고 곧 벌어질 전투에 대비해라. 우리는 내통자에 호응하겠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원소는 공손한 태도로 내 명령을 받들었다.
“…주군.”
“응?”
그때 엄격한 표정으로 주변을 경계하던 관우는 내게 말을 걸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 드리는 겁니다만, 전장에 직접 출진하실 마음은 아니겠지요?”
“뭐?!”
관우의 질문에 멍한 표정으로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던 장비가 화들짝 놀랐다.
“그건 절대 안 돼! 전장으로 나갈 거면 나를 쓰러트리고…. 뺘악!”
“너한테 물어본 게 아니다.”
머리에 주먹이 내려꽂히자 오늘도 어김없이 병아리 단말마 비슷한 소리를 낸 장비를 뒤로하고 관우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
“…….”
어우, 주변 사람들 눈빛이 아주 심상치 않은데.
여기서 내가 출진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강제로 감금당할 수도 있었다.
나를 밧줄로 묶는 짓은 하지 않겠지만, 그런 방법을 제외하고도 나를 기발하게 가두는 방법은 많지 않겠나.
막말로 서여가 날 꼭 끌어안으며 버티기에만 들어가도 난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힘이 센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움직일 수가 없더라고.
천근추에 속박당한 무협 소설의 등장인물이 이런 기분일까?
…근데 잘 생각해보면 이것도 밧줄로 내 몸을 묶는 것과 별 차이가 없네.
단지 더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소녀가 밧줄 대신 날 속박한 것이 다를 뿐.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서여까지 갈 필요도 없이 힘 좀 쓴다 하는 사람이 날 작정하고 묶어버리면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내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는 서여가 유일하게 거절하는 것이 내 신변과 관련된 일이기도 했고….
나는 회의장에 있는 모든 인물들의 눈빛을 받으면서 담담히 대답했다.
“난 이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그렇습니까.”
확답을 들은 관우는 마치 다행이라는 듯이 한결 풀어진 표정을 지었다.
엄격한 몸짓으로 챙겨줄 건 전부 챙겨준단 말이지.
비록 겉모습은 무뚝뚝해도 정이 많은 참한 여인이었다.
──────────
편지에 적힌 날짜까지는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아무래도 역경루 내부에선 공손찬에게 반항하는 인물이 오래전부터 밑작업을 끝내놓았던 모양.
뭐, 점령하는 날짜가 빠르면 빠를수록 나야 좋은 일이니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렇게 거사가 일어나는 날이 찾아오자 모든 전투 준비를 끝마친 부대가 눈을 번뜩였고,
그그그긍──
적어도 몇 년간은 움직일 일이 없으리라 여겼던 역경루의 성문이 정말로 열리기 시작했다.
“…돌격──!!”
12m 높이의 성벽에 걸맞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성문이 열리자 안량과 문추를 비롯한 원소 부대의 장군들이 일제히 명령했다.
와아아아──!!
서서히 거리를 좁히면서 때를 기다리던 아군 병사들은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함성을 내지르며 돌격했다.
“내가 제일 먼저 들어간다──!!”
“배, 백부?!”
…손책은 누가 소패왕 아니랄까 봐 제일 먼저 튀어 나가고 있네.
주유가 경악한 표정으로 따라붙는 게 참 피곤해 보였다.
“으하하!! 이번만큼은 나도 딸에게 질 수 없지!!”
“아버님──!!”
그 딸에 그 아버지라고, 손견조차 끓어오르는 피를 주체 못한 채 돌격하는 상황.
혹시 모르는 일이라며 화타와 장각이 나와 동행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 두 명이라면 저번처럼 유표를 공격했다가 화살이 한가득 꽂힌 채 돌아와도 손견을 억지로 살려내겠지.
손권은 제 혈육들이 전부 날뛰는 광경을 보고 안절부절못했으나 그래도 내 부관이라는 임무에 충실하겠다는 듯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는 상태라서 부대 자체가 반으로 쪼개진 상황.
하지만 병사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규모가 줄어들어도 역경루를 집어삼키기엔 충분해 보였다.
성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수비 태세를 갖춰야 했던 공손찬군은 이상할 정도로 당황하다가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선택해라! 항복하지 않으면 죽음뿐이다!”
“하, 항복! 항복하겠소!”
그저 지레 겁을 먹고 무기를 버린 채 벌벌 떠는 것을 반복할 뿐.
이는 병사와 부관, 심지어 장군까지 예외가 없었다.
명령체계 자체가 아예 무너진 듯한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역경루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저 높디높은 망루 위에서 병사들을 지휘해야 할 공손찬이 꽥 죽어버리기라도 했나?
공손찬이 모습을 드러내고 다시 활동을 시작한 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오히려 역경루가 너무나도 어이없이 함락당하자 물음표를 띄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