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491)
EP.491 뒷정리(4)
나라의 역사를 도맡으며 후대에도 널리 전해질 기록을 편찬하는 관직.
사관(史官).
역사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기록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니, 이를 책임지는 사관은 능력이 있고 패기까지 있는 강직한 젊은 관료만이 역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관들 중에서도 나라의 대들보인 황제에 대한 내용을 기록할 수 있는 이는 무척 적었다.
사마천이 쓴 한나라의 역사서, 사기(史記)와 그를 제외한 다른 역사서에도 한나라를 건국한 한고조의 온갖 추태와 굴욕적인 패배마저 전부 적혀있었으니 그 당시 사관들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직무에 임했는지 짐작이 갈 터.
사기(史記)에 기록된 한고조의 욕설 횟수만 무려 12번이라 하고, 서초패왕에게 대패한 팽성대전 때는 속도가 안 난다는 이유로 마차에 탄 제 자식들을 던져버리는가 하며, 훗날 흉노 선우 묵돌에게 패배한 이후에는 이미 결혼까지 한 자기 딸을 첩으로 보낼 생각까지 했단 내용이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말 그대로 목숨이 아깝지 않은 이들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
“…으음.”
투철한 사명심으로 무장한 사관한테는 지금 눈앞의 상황을 기록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짐이, 짐이 잘못했다….”
“저는 괜찮으니 진정하십시오. 추태를 보이시면 안 됩니다.”
그 누구보다 존귀하고 존엄해야만 하는 황제가 제 남편에게 매달려 눈물을 쏟아내는 상황.
솔직히 눈앞의 광경이 당황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터.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한 판단은 후손들이 알아서 해줄 것이니, 자신은 그저 마음을 비우고 이를 기록하는 것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광희(光熹) 10년(199년).
폐하께서는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국서가 부상의 후유증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확인하고 눈물을 감추지 못한 채 잘못했다는 말씀만 반복하셨다.
눈앞의 광경을 정말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사관.
후대 사람들에게 길이길이 전해질 황제의 또 다른 이야기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
황제와 이야기를 나눈 이후 모든 상황을 파악한 나는 내가 거리낄 것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베에게 벌을 내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더라고.
만약 누군가가 끝끝내 제베를 죽였다고 가정해보자.
제베가 누군가에게 죽는다. >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부하의 돌발 행동에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 개복치 사망.
이 완벽한 논리를 깨닫는다면 그 어떤 인물도 내 의견을 거스르지 못할 터.
말 그대로 내 명령에 안 따르면 그냥 죽어버리겠다는 자해 공갈이군.
널 죽여버리겠다도 아니고 내가 죽어버리겠다는 협박이라….
어째 대상 자체가 크게 잘못된 것 같은데 이는 실제로 큰 효과가 있었다.
‘정말로 마음에 안 드는데…! 제가 참아야죠…!’
사마의는 이를 갈면서도 제베에게 손을 댈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마, 맞아.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야….’
‘제가 계속 감시할 테니 주군께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통과 제갈량도 각자의 방식으로 내 명령을 받들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포로를 쓱싹해버릴 수 있는 꼬꼬마 군사 3인방이 내 아군으로 돌아선 이상 제베가 돌연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 목숨을 담보로 해서 그런가, 협박 효과가 엄청나구만.
…이런 거에 맛 들리면 안 되는데.
“자기 목숨을 인질로 잡았으니 나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란 말이오?”
“으음…. 대충 그렇게 되겠네.”
창살 너머에서 제베를 마주 보던 나는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게 무슨….”
제베는 내가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의문을 풀어주고자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어때, 엄청나게 고맙냐?”
“…….”
“고마우면 테무진에게 말해서 보상 좀 넉넉히 가져와라.”
팔이나 눈 한쪽이 불구가 된 포로보단 멀쩡한 포로가 값을 더 받을 수 있지 않겠나.
농담이 아니라 1.5배 정도는 더 뜯어낼 수 있으리라 판단됐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소.”
제베는 아직 궁수로서의 삶이 끝나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내게 몸을 낮췄다.
“내 기필코 초원처럼 드넓은 대장군의 아량을 칸께 이야기하리다.”
“그래. 그러면 됐다.”
몽골 제국은 전혀 안 그럴 것 같지만 의외로 신의를 매우 중요시하는 놈들이니 한 번 우호 관계를 맺으면 싸울 일이 없었다.
…근데 몽골 제국과 우호 관계를 어찌 맺어야 할지가 상당히 골때리지.
하지만 원래 누군가와 친해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신의를 중요시하는 몽골 제국의 행동 방침은 개국 군주인 칭기즈 칸의 영향을 진하게 받은 것이 분명할 터.
저번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그는 배신 행위를 무엇보다 제일 혐오하는 인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 지인들한테 뒤통수를 연달아 맞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
“…….”
솔직히 이 정도나 호의를 베풀어줬는데 칭기즈 칸이 우호 관계 하나 안 맺어주겠어?
만약 그렇다면 정말 치사한 사람이다.
몽골 제국의 전투력으로도 저 멀리 있는 유럽까지 길을 뚫으려면 앞으로 2년은 더 걸릴 테니 나는 잠자코 기다릴 뿐이었다.
생각할수록 말이 안 되긴 해.
말을 제외하면 변변찮은 이동 수단 하나 없는 시대에서 전쟁까지 치르며 유라시아 대륙을 2년 만에 주파하다니.
이러니까 본래 역사의 몽골 제국이 세계사에서 가장 거대한 영토를 차지한 거겠지.
몽골 제국은 이번에도 유라시아 대륙을 주파하며 유럽까지 도달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몽골 제국과 마주치고 강제로 합병당할 중앙아시아 출신 유목민에겐 심심한 사과를 보낸다.
솔직히 게르만 대이동이 1세기 일찍 일어나는 거긴 한데, 지금 로마 제국은 세이버인가 세르게이인가 하는 뛰어난 황제가 존재하는 시기니 알아서 잘 대처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근데 로마 황제 이름이 진짜 뭐였지?
기억이 안 나네.
나는 감사를 표하는 제베에게 말을 걸었다.
“앞으로 몇 년은 이곳에서 보낼 테니까 답답하다면서 문제 일으키지 마라.”
“걱정 마시오. 내가 철저히 단속하겠소.”
“그러면 다행이고.”
수천 명이 넘어가는 포로들을 관리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만 어떻게든 감당해야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들을 관리하는데 들어간 비용은 전부 계산해서 훗날 포로를 교환할 때 배상금 명목으로 돌려받을 것이다.
살짝 바가지요금도 포함될 예정이니 최대한 빨리 데려가는 게 좋을걸.
슬슬 돌아갈 시간임을 느낀 나는 제베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난 간다. 갑자기 어디서 죽지 마라.”
“…푸른 늑대가 땅끝까지 그대를 가호할 것이오.”
푸른 늑대?
아. 그러고 보니 몽골인이 믿는 종교, 텡그리(Tengrism)에서 신성시하는 존재가 늑대였지.
이와 관련해서 다른 신화적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았었나?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원조비사엔 흰 사슴을 아내로 삼은 푸른 늑대가 바이칼 호수를 건너 몽골 땅에 정착했고, 그로부터 몽골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어쩌고 하던 내용이 적혀있는 걸로 기억한다.
한국으로 치면 단군왕검 신화와 비슷한 내용이지.
단군 할아버지의 아버지, 환웅도 인간 세상에 관심이 생겨 세 가지 신기를 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내용이 있지 않나.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둘 다 이종교배(?)를 했네.
늑대가 사슴 위에 올라타고, 천인(天人)이 곰 위에 올라탄다라….
이것 참 흥미로운 주제 아닌가.
잠시 이상한 상상을 하던 나는 어디선가 불경하다면서 날벼락이 떨어지기 전에 머릿속을 털어냈다.
하여튼 날 축복하는 말을 들었으니 이를 돌려주는 게 맞겠다 생각한 나는 머리를 잠깐 굴리다가 툭 내뱉었다.
“그래. 흰 사슴도 널 지켜보고 있을 거다.”
“……!”
제베는 내가 이리 대답할 줄 몰랐다는 듯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종일관 엄격하고 근엄한 표정만 짓던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이니까 재밌네.
어쨌든 몽골 제국과 관련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끝마친 것 같았다.
“…….”
이제 남은 건 실크로드를 연결한 칭기즈 칸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뿐.
안량과 문추를 뿌리치고 전장에서 탈출했던 수부타이도 진작 복귀했을 테니 테무진의 정복 활동은 무난하게 이어질 것이다.
지금도 마치 그를 증명하는 것처럼 날씨가 따뜻해졌음에도 북방 이민족이 국경을 침입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다.
아마 싹 다 서쪽으로 몰려가서 중앙아시아에 머무르는 유목민과 치고받는 상황 아닐까?
킵차크인가 튀르크인가 하는 놈들 말이야.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나는구만.
“…이야기 끝났어?”
“응?”
내가 발걸음을 돌리기 무섭게 근처에 있던 여포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여포를 바라보던 나는 평소와 똑같은 태도로 대답했다.
“어, 전부 끝났다.”
“…그러면 빨리 가자.”
여포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오른손을 살며시 붙잡고 옆에 나란히 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환자를 보조하는 간병인 같았는데 내 착각일까.
“…….”
나는 여포에 이어 서여까지 내 손을 붙잡아오는 상황에 살짝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아니 얘들아.
나 제대로 걸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