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526)
EP.526 기주(11)
구체적으로 언제부터였을까.
허유는 날이 지날수록 세력 내부에서 제 입지가 줄어들어 가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그리 멍청한 편은 아니었기에 자기 입지가 점차 줄어드는 이유야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자신이 그저 본초와의 친분만을 앞세우며 상석에 앉아있다 생각하는 것일 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기주를 다스리는 지도자인 원소와 허유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절친한 사이였으니까.
물론 지금은 사이가 예전 같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원소와 허유가 친근한 사이라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는 원소가 허유에게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기주 내부에서 허유에 대해 안 좋은 평이 돌고 있음에도 원소가 그녀를 대놓고 내치지 않는다는 건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아마 원소 본인도 과거의 친분을 생각하며 사소한 일탈쯤은 눈 감아주는 것일 터.
물론 그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 허유 본인도 선을 넘지 않는 게 중요했다.
제 입지가 나날이 줄어가는 상황에서도 뇌물을 포기하지 못하는 모습은 허유가 어떤 인물인지 극명히 드러냈다.
어쨌든 허유 본인은 나름대로 선을 잘 지키며 이익을 챙겼다 생각했지만….
머지않아 그게 우습지도 않은 착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말 한마디만 내뱉으면 자신쯤이야 소리소문없이 지워버릴 수 있는 인물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
그 관심이란 게 긍정적인 의미가 아닌 건 허유를 비롯한 모든 인물이 알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난 이제 가보도록 하지.”
“아, 알겠습니다! 살펴가십시오!”
자신이 제일 조심해야만 하는 상대가 담담하게 자리를 벗어나는 광경.
허유는 아직도 조금 전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듯 눈동자만 깜박일 따름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당분간 지켜보도록 하지.
현재 위세로만 따지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다는 대장군.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기억하거라.
오랜 병폐에 시달리며 끝끝내 여러 개로 쪼개진 한나라를 불과 수년 만에 수습한 입지전적인 인물은 허유에게 한 가지 경고를 남겼다.
───괜히 허튼 짓을 했다간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
최근 대장군에게 거역하던 인물이 무슨 꼴을 당했는지 떠올린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기주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경악을 안겨주었던 공손찬의 참혹한 몰골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온몸의 살을 저민 다음 소금을 가득 담은 항아리에 밀어 넣어 매우 고통스럽게 절여 죽였다는 그 시체.
그 시체는 마치 대장군에게 끝까지 저항하면 어찌 되는지 황제가 톡톡히 알려주는 것 같았다.
자신도 그런 꼴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어떻게든 쓸모를 증명하면서 대장군께 용서를 빌어야 했다.
처음에는 아예 다른 곳으로 도망이라도 칠까 생각했지만….
어디로 도망친다는 말인가?
이 넓은 천하 전부가 대장군의 손아귀 안에 있거늘.
대장군과 일평생 추격전을 벌일 자신은 없었으니 그저 납작 엎드리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그, 그래. 일단 정보부터 얻어야….’
생각을 마친 허유는 몸을 벌벌 떨면서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둘러 움직였다.
본래 역사였다면 관도대전에서 공을 세웠다는 자만심에 취하고, 또 조조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오만방자한 행패를 부리다가 죽음을 맞이했을 인물.
허유는 생판 남이라고 부를 수 있는 대장군과 그의 곁에 자리한 심상치 않은 무장들을 바라보고 몸을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
부패한 놈은 그와 똑같이 부패한 놈이 잘 잡는다고 하던가?
하여튼 허유에게 첩자 역할을 맡긴 나는 원소 세력의 파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걸음을 계속 움직였다.
내가 예전에도 설명했지만 원소는 자신의 엄청난 카리스마를 이용하여 신하들끼리 서로 맞붙이게 하는 전략을 통해 그들의 힘을 조율했다.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명성을 듣고 구름처럼 몰려든 인재 중에서 적당한 인물을 골라 뽑고, 그 적당한 인물의 이용가치가 다했다 판단하면 망설임 없이 내치면서 다른 인물을 뽑는 식으로 세력 내부를 끊임없이 순환시켰다.
대표적으로 한복 휘하에 있다가 원소에게 투항한 국의(麴義)가 있겠네.
국의라는 이름만 들으면 그게 누구냐면서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도 많겠지만 그는 원소가 공손찬과 맞붙을 때 엄청난 공을 세운 장수다.
공손찬 휘하에서 이민족을 학살하던 전략 병기, 무려 그 백마의종을 평지에서 보병 부대로 쓰러트린다는 어마어마한 공을 세운 것.
이를 기점으로 원소와 공손찬의 전력 차이가 서서히 뒤집히기 시작했으니 국의라는 장수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겠지.
근데 원소는 국의를 몇 번 더 써먹다가 공손찬이 틀어박힌 역경루를 점령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냅다 숙청했다.
원소가 어째서 이런 행동을 보였는지에 대해선 두 가지 가설이 있다.
원소가 제 권력을 조금 더 공고히 하기 위해 국의를 숙청했다는 가설.
국의가 전 주인인 한복의 뒤통수를 치던 제 성격을 못 버리고 원소한테도 깝죽대다가 숙청됐다는 가설.
원소의 냉혹한 성격을 생각하면 전자도 이상하지 않고, 국의가 실제로 한복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걸 생각하면 후자도 이상하지 않다.
어쩌면 둘 다 해당할 수도 있겠지.
이유야 어찌 됐든 국의가 원소에게 숙청당한 것은 확실하니까.
이처럼 원소 세력은 정치적 능력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일종의 마굴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파벌이 생기지 않으면 그게 또 이상한 일 아니겠냐.
원소의 망설임 없는 숙청 방식은 조직을 상당히 경직되고 비효율적으로 만들었지만, 지도자의 권력이 매우 강해진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었다.
사실 나라를 다스릴 때 숙청을 아예 안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
근데 원소는 조금 과했다고 해야 하나.
조금 설명이 길어졌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형성된 원소 세력의 파벌은 크게 두 가지 세력이 있었다.
첫 번째로는 원소가 막 거병했을 무렵부터 그녀를 따랐던 예주파 출신들이 있다.
순우경, 곽도, 신평 같은 인물들이 저 파벌에 속해있지.
두 번째로는 원소가 한복을 몰아내고 기주를 차지하면서 그녀의 휘하로 들어온 기주파 출신들이 있다.
장합, 전풍, 저수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지.
어째 파워 밸런스가 심하게 어긋나 있는 것 같지만 원소가 예주파 출신들을 훨씬 중용했기에 기주파 출신들은 그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힘을 영 못 쓰는 상황이었다.
원소가 기주파를 견제한 이유도 이해는 간다.
원소는 결국 수도인 낙양에서 활동하던 인물이었고, 기주가 아닌 저 아래에 있는 예주에서 태어난 인물이니 자기가 손수 쌓아온 명성을 제외하면 기주에 영향력을 뻗칠 수 있는 수단이 굉장히 제한된 상태였다.
그렇기에 기주파를 무시하고 예주파를 밀어주면서 제 권력을 공고히 하는 건 좋았는데….
그, 뭐냐.
하필 예주파 출신 문관들의 상태가 영 안 좋네.
아마 원소도 계책 성공률 0%를 자랑하는 책사가 예주파일 줄은 상상도 못했을걸.
예주파 책사들의 계책이 실패함. > 역시 기주파 책사들이 옳았다며 기주파의 힘이 강해짐. > 원소가 이를 견제하고자 또 예주파 의견을 채택함. > 또 실패. > 무한 반복.
…뭔가 이번에는 딸 수 있다면서 재산을 전부 꼬라박는 도박사를 보는 느낌인데 기분 탓인가?
만약 원소가 옳은 계책을 걸러내는 안목만 있었다면 상황은 다르게 흘러갔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
예주파고 기주파고 어린아이 힘 싸움으로밖에 안 보이는 상황에서 내가 보일 행동은 하나밖에 없었다.
“즉, 이제 파벌 싸움을 그만 조장하란 말씀이신지요?”
“그래. 이제 그럴 필요도 없잖아?”
기주를 다스리는 지배자, 원소와 독대한 나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만약 네 권력에 대항하려는 놈이 나오면 나한테 말해.”
“…….”
“그놈은 사실상 하극상을 일으킨 거나 다름 없으니까.”
이름만 황제였지 이리저리 휘둘리기 바빴던 본래 역사와 달리 이 세계의 황제는 정통성도 힘도 충분한 ‘진짜’ 황제다.
근데 황제가 임명한 관리의 말을 안 듣고 문제를 일으켜?
그런 놈은 저잣거리에 매달아도 아무런 문제 없을걸.
“…예. 알겠습니다.”
내 당당한 목소리를 들은 원소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윽고 싱긋 웃어 보였다.
“대장군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따르겠나이다.”
“어…. 그래.”
이유는 모르겠지만 평소보다도 훨씬 더 공손한 모습이네.
내 말을 듣고 무언가 느끼는 것이라도 있었던 걸까.
“…….”
“우와, 한 번 꼬신 여자를 또 꼬시고 있어….”
어째 근처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서여와 여포의 눈빛이 한층 더 진해진 것 같았지만, 단순히 내 기분 탓으로만 생각한다.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