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54)
EP.54 호로관(4)
여포의 돌진에 호응해 군사를 이끌고 바깥으로 나온 나는 한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삼국지 연의에는 수많은 명장면들이 있지만 여포와 연관된 명장면을 꼽아보라면 대부분이 저 장면을 고를 것이다.
흑발의 여성이 여포와 똑같은 적안을 빛내며 빛살처럼 휘둘러오는 공격을 받아냈다.
쾅!
“밤톨만 한 년이 힘깨나 쓰네!”
“뭐라고 이년아?!”
쾅!
여포와 여성의 무기가 부딪칠 때마다 주변에 어마어마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보통 무기끼리 부딪치면 챙! 이라든가 캉! 같은 소리가 나는데 지금 저기서는 아예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격이 다른 전투 광경에 내 주변에 있는 병사들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지금 여포와 맞서고 있는 여성은 처음 봤지만 저 여성이 들고 있는 창을 보니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저렇게 길쭉하고 날 부분이 뱀처럼 구불구불한 창을 들고 있는 사람이 그 사람 말고 누가 있겠나.
장비 익덕(張飛 益德).
삼국지에서 무력으로만 따지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맹장.
만인지적이란 어마어마한 칭호를 부여받은 그는 게임에서도 1위 여포에 이은 무력 2위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는 인물이었다.
서여와 여포가 대련할 때도 그랬지만 지금 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기토도 무기를 휘두르는 게 안 보였다.
눈가를 좁히고 게슴츠레 노려봐도 무기의 잔상만 보인다.
한쪽 손으로 싸움을 이어나가던 여포가 양손으로 방천화극을 고쳐잡더니 그대로 장비에게 내려쳤다.
웬만한 장수들도 대처할 수 없을 섬광 같은 공격이었지만 장비는 양손으로 사모를 치켜들어 공격을 막아냈다.
“그그극…!”
서로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한동안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여포의 힘을 감당하기 버거운지 장비의 얼굴이 잘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여포는 그런 장비의 모습을 보고는 입가를 비틀었다.
“장수라는 년이 그렇게 비실비실해서야 어디다 쓰겠냐?!”
“입 다물어! 이 쥐방울만 한 년아!”
“…….”
안 그래도 여포가 신경 쓰는 점을 계속 지적당하자 여포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반박 못하겠지 이년아! 힘은 몰라도 키는 내가 이겼다!”
“넌 뒤졌어!”
“헹! 한 번 해보시지!”
저 걸걸한 입담 하나는 끝내주네.
후대 창작이기는 하지만 아비 셋 가진 종놈아! 라는 말을 내뱉을 법한 말솜씨였다.
그 말과 동시에 장비는 기합을 주고 여포를 밀어냈다.
“그렇게 조그마한데 그 큰 말에는 어떻게 올라타는 거야?!”
“조용히 해!”
“혹시 말에 올라탈 때마다 누가 도와주는 거 아니냐?!”
일기토 자체는 시종일관 여포가 유리했지만 장비는 어찌어찌 버텨가면서 계속 여포의 속을 박박 긁었다.
저걸 보면 애초에 여포와 장비라는 인물은 서로 상극인 모양이었다.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로 대충 몇 합인지 가늠하며 일기토를 지켜봤다.
대충 내 기억으로 저렇게 50번쯤 겨루다가 한 인물이 끼어들면서 다굴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적당히 이를 지켜보다가….
챙!
“어, 어라?”
“넌 이제 뒤졌어!”
응?
이제 한 40번쯤 합을 나눴는데 여포의 공격을 튕겨낸 장비가 엄청나게 큰 빈틈을 보였다.
저 당황한 표정을 보니 본인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
여포는 잘 걸렸다는 듯이 훤히 드러난 장비의 가슴을 향해 방천화극을 내질렀다.
챙!
그리고 그 공격은 갑작스럽게 끼어든 청룡언월도에 의해 무위로 돌아갔다.
절호의 기회를 노린 자신의 공격이 막히자 여포가 표정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또 뭔….”
청룡언월도를 든 여인은 장비의 붉은 눈동자와 대비되는 푸른 눈동자로 여포를 바라보았다.
“무거운 공격이군.”
“……쳇.”
장비와 똑같은 색깔의 흑발을 꽁지 머리로 묶은 여인이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어, 언니….”
관우 운장(關羽 雲長).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여포가 둘에게서 거리를 뒀다.
아마도 저 둘이 서로 비슷한 수준이라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장비가 맥없이 밀린 상황에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다.
삼영전여포.
도원결의 형제가 호로관에서 여포 한 명에게 대적한 이 일화는 여포보다 도원결의 형제를 띄워주려는 의도가 더 강한 이야기였다.
장비 혼자서도 여포 상대로 대등하게 맞서다가 관우가 끼어들고, 거기에 유비까지 끼어드니 피하기만 급급하다가 후다닥 도망친 이야기란 말이지.
유비 관우 장비를 상대로 버틴 여포도 여포지만, 그것보다 도원결의 형제가 힘을 합쳤을 때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일화였다.
연의에서 장비가 여포의 말을 도둑질하여 싸움이 붙었을 때, 그 싸움은 100합을 넘겨도 결판이 안 났다고 한다.
그러다가 유비가 말려서 겨우겨우 싸움을 멈춘 거지.
근데 지금 여기서는 단 40합 만에 장비가 죽을 뻔했다.
장비가 40합 만에 여포에게 죽을 뻔해서 보다 못한 관우가 끼어들었다는 내용은 원래 이야기에 없었다.
“보니까 혼자서 감당할 수 없겠어.”
“응. 엄청 강해.”
봐라. 그 관우와 장비가 여포의 무예를 인정하며 힘을 합치려고 하지 않나.
애초에 여포가 장비보다 강하니까 그 관우가 일기토에 끼어들었겠지만 저렇게 대놓고 인정하는 건 아예 다른 이야기였다!
나는 뒤에서 내 호위를 서고 있는 서여를 바라보았다.
“…….”
여포를 보고 있던 서여는 자신을 바라본다는 걸 귀신같이 눈치채고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과거부터 그 항적과 허구한 날 대련한 것이 여포를 더 강하게 만든 걸까?
인생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것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여포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감지했는지 살짝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 설마 비겁하게 둘이서 날 공격하는 건 아니겠지?”
“굳이 말해서 뭐 하겠나.”
관우로 추정되는 여인은 냉정한 눈빛으로 여포를 바라보았다.
“너는 천하무쌍이 맞다.”
“…….”
“그러니까 온 힘을 다해 상대해주지.”
“자, 잠깐만!”
관우와 장비가 동시에 여포에게 달려들었고, 여포는 당황하면서 방천화극을 휘둘렀다.
쩌정─!
자신들이 동시에 휘두른 청룡언월도와 사모를 어렵지 않게 튕겨낸 걸 본 관우가 살짝 미소지었다.
“훌륭하다!”
“그런 말 들어도 별로 안 기쁜데!”
장비가 찌르고, 관우가 휘두른다.
무예를 볼 줄 모르는 나조차 알 수 있을 정도로 장비와 관우의 합은 서로 잘 맞아 떨어졌다.
본래라면 관우가 끼어드는 것과 동시에 공격을 막아내기 급급했을 여포.
하지만 지금 이곳은 달랐다.
여포의 예리한 반격을 미처 피해내지 못한 장비의 뺨에 실금이 그어지며 피가 튀었다.
그런 장비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야! 인정해줄게! 너 진짜 강하다!”
“시끄럽, 다고!”
여포도 이제 여유가 없는지 표정을 찌푸리며 방천화극을 찔렀다.
“어림없다!”
콰앙!
또다시 장비의 빈틈을 노리고 날아간 공격은 관우가 휘두른 청룡언월도에 가로막혔다.
“쳇!”
여포는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차고 무섭게 찔러 들어오는 사모를 창대로 흘려냈다.
창대를 찔러 방향이 틀어진 사모가 주르륵 미끄러지며 여포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용호상박이라 했던가.
마치 하늘을 뒤덮을 듯한 거대한 용을 집채만 한 호랑이 둘이 힘을 합쳐 대항하는 모습이었다.
이미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싸움을 멈추고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슬슬 세 번째가 나올 타이밍인데.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는지 황갈색 말을 탄 여인이 쌍고검을 들고 여포에게 달려들었다.
황실의 핏줄을 상징한다는 흑발 흑안.
고민할 것도 없다.
저 여인이 바로 유비 현덕(劉備 玄德)이었다.
“현덕 언니?!”
“위험합니다!”
장비와 관우는 놀란 표정으로 유비를 말렸지만 유비는 물러서지 않았다.
슈욱!
“으힉?!”
여포가 싸우다가 저런 소리 내는 건 처음 보는데.
난데없이 찔러 들어오는 쌍고검을 고개를 젖혀 피한 여포가 불만스럽게 외쳤다.
“넌 또 뭐야!”
“유비! 자는 현덕! 기억해두시길!”
여포와 도원결의 자매의 싸움이 시작됐다.
온갖 무기가 현란하게 뒤섞이는 그 전투는 보는 사람이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어디서 갑자기 이런 년들이 튀어나온 거야?!”
유비가 합세하자 여포는 이제 반격할 틈을 찾지 못하고 막기에 급급했다.
저 자매가 서로의 빈틈을 완벽하게 메워주니 그냥 빈틈 자체가 사라진 것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잘 싸우는 유비의 모습에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전열에서 병사와 함께 싸우는 장수가 맞네.
여포는 밀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밀어붙이지도 못했다.
이대로는 시간만 질질 끌리겠지.
후세에 삼영전여포라 전해지는 이야기.
그 이야기가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연합의 지원군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가세하는 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서여.”
“네.”
“가서 구해주고 와.”
뒤에서 서여가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죽여버리지 않고 말입니까?”
“일단 좀 더 지켜보고 싶은 사람들이라서.”
유비 현덕(劉備 玄德).
인의로 사람들을 감싸는 삼국지의 또다른 주인공.
사실상 삼국 시대를 연 장본인이라 볼 수 있었다.
조조의 이야기도 좋고, 손씨 일가의 이야기도 좋지만 밑바닥에서 황제까지 올라간 유비의 이야기를 난 가장 매력적으로 생각했다.
팬심이라 말해도 좋겠지.
과연 이 세계에서 유비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나는 지금 유비라는 인물의 됨됨이에 도박을 걸어보고 있었다.
유비라는 인물은 참 여러 가지로 평이 갈리는 인물이다.
백성들을 위하고 마지막까지 한나라 황실에 충성을 다한 인의군자.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겉으로만 인의를 추구했을 뿐인 위선자.
유비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극단적인 평가들.
어려운 상황에서 온갖 모략도 마다하지 않고 배신의 오명도 감당하며 선을 추구한 인물이냐.
그저 다른 군웅들과 다를 바 없는 야망을 지니고 그러한 속내를 철저하게 감춘 음흉한 인물이냐.
나는 유비가 직접 행동으로 알려주기를 바랐다.
서여는 그런 내 감정을 눈치챘는지 이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다면 호위는….”
“내가 그럴 줄 알고 장료랑 서황 데려왔지.”
여포가 이끌던 군을 수습하고 돌아온 서황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서황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싫어?”
“어…. 그건 아닙니다.”
기병을 이끌고 돌아온 장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미소짓고 있었다.
나는 다시 서여에게 입을 열었다.
“거리도 가까우니 금방 끝낼 수 있어.”
“…….”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빨리 다녀와.”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서여는 타고 있던 말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푸르릉.
오추마는 그런 서여의 손길에 호응했고,
콰앙─!
그 순간 흑색 질풍이 전장을 질주했다.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