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541)
EP.541 복귀(4)
안 그래도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말 위에 성인 남성이 훌쩍 올라탄 상황.
이런 상황에서 내가 머리를 천장에 박지 않은 건 후성이 수상할 정도로 말에 진심이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런 후성이 직접 설계한 개인 마구간도 말의 덩치가 워낙 커서 상당히 비좁게 느껴졌다.
‘허, 허어….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후성은 지금 자기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대장군, 도대체 어찌하신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의외로 간단해.’
안장도 없이 말 위에 올라탄 나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까딱거렸다.
‘저기 무시무시한 여인들이 노려보고 있잖아.’
‘…아.’
후성은 내 짧은 설명을 듣자마자 전부 이해됐단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말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오추마와 적토마조차 제 수족처럼 부리는 이가 근처에 두 명이나 있는데 한낱 짐승이 어찌 기를 펼 수 있겠는가.
아마 내가 올라탄 한혈마는 서여와 여포를 보자마자 딱 이런 생각이 들었을걸.
───허튼짓하면 죽는다.
아무리 자존심이 중요해도 목숨보다 더 소중하지는 않을 거 아니냐.
짐승은 어떤 방면에선 인간보다 훨씬 더 감이 좋았기에 냅다 꼬리를 내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여기서 끝내지 않고 차차 조금씩 길들여야겠지.’
나는 채찍질도 코웃음 치면서 무시할법한 근육질 몸을 툭툭 두드리면서 말했다.
‘이제 이놈을 데려가도 되겠나?’
‘예, 옙.’
내 물음을 들은 후성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아이도 비좁은 마구간에만 있는 것보단 대장군을 따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걸 더 좋아할 테니까요.’
‘…….’
‘그리고….’
‘그리고?’
후성은 거기까지 말한 다음 잠깐 입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로?’
‘예.’
그는 내가 다시 한번 되물었음에도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크흡.’
‘…….’
…무언가가 무척 사무친다는 반응은 보였지만 말이야.
내가 이대로 나가면 입에 주먹이라도 넣은 다음 혼자 펑펑 울 기세라 해야 하나.
뭐, 이만한 선물을 꿀꺽 삼키고 아무런 보상도 안 할 만큼 염치없는 인물은 아니지.
나는 무척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 후성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10년 넘게 모은 재산이 이놈 한 마리한테 다 날아갔다고 했지?’
‘……?’
‘그렇다면 기대해도 좋다.’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는 대장군이 얼마나 부유한지 직접 체감시켜줘야지.
마땅히 쓸 곳이 없어 자택 창고에 처박혀있는 도자기랑 비단, 동물 가죽 몇 개만 처리하면 후성의 몇 년 녹봉은 손쉽게 나올 터.
아예 물건을 그대로 주는 방법도 생각해봤지만 수상할 정도로 말에 진심인 후성의 성격상 도자기 같은 걸 별로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다.
장인들의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어딘가를 장식하는 것에서 끝나는 사치품엔 영 관심이 안 가더라고.
근데 나한테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며 들어오는 선물 대부분이 그런 사치품이니, 난 기껏해야 비상금 용도로 그것들을 활용할 뿐이었다.
…근데 나한테 사치품을 주는 놈들은 보통 비리와 엮여있더라.
애초에 평범한 관리가 그런 비싼 사치품을 얻기 위한 돈들을 어디서 어떻게 얻었겠냐.
그들도 적당히 눈감아 달라는 의미에서 나한테 선물을 보낸 거겠지만, 난 알 바 아니라면서 물리적인 의미든 비유적인 의미든 모가지를 날려버렸다.
내 손으로 내 자금줄들을 날려버렸으니 나한테 선물이 오는 빈도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지.
근데 반대로 생각하면 나라가 그만큼 깨끗해졌다는 게 아닐까?
그 뭐냐.
부패한 상층부의 뇌물 요구를 거절했다가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히는 건 충신의 단골 레퍼토리잖아.
심지어 충신 중 몇몇은 너무 청렴하고 엄격하게 살아서 제 가족조차 제대로 못 돌보는 경우가 있었기에 따로 챙겨줘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사람들이 절제를 미덕으로 삼곤 하지만 그 정도가 너무 과해.
근데 이건 돈을 짜게 지불하는 조정의 탓도 어느 정도 있었으니 나는 관리의 월급 인상…. 아니, 녹봉 인상을 해주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깨끗하게 살려고 해도 당장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하면 그 누가 타락하지 않겠나.
진짜 몇몇 특이한 사람들을 제외하곤 나쁜 방향으로 손을 뻗겠지.
애초에 서류를 살펴보니까 한나라가 부패했을 당시 관리의 녹봉을 여기저기에서 떼먹은 정황이 포착되더라.
돈 떼먹은 놈 대부분이 거시기 없는 놈들이란 건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당장 그 십상시만 하더라도 한나라가 붕괴하는 데 아주 지대한 공헌을 했으니까.
나는 비틀린 것을 원래대로 되돌렸을 뿐이다.
난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 후성을 뒤로하고 움직이려다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괜히 명령을 내렸다가 이놈이 갑자기 휙 튀어 나가면 어떡하지.
난 지금 말 위에 얹는 안장도 없이 기승한 상태라 조금만 격렬하게 움직여도 그대로 낙마할 가능성이 높았다.
엉덩이가 아픈 것도 문제지만 다릿심으로 단단히 붙들고 버티는 난이도가 미친 듯이 솟는 게 문제지.
내 휘하 장수들은 안장 같은 게 없어도 그 매끄러운 허벅지로 잘 버티겠다만,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런 인간 병기가 아니다.
괜히 유비가 허벅지에 살이 쪘다며 화장실에서 엉엉 울고 유표에게 한탄했다는 비육지탄(髀肉之歎)이란 사자성어가 생긴 게 아니란 뜻.
잠깐 고민하던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천천히 가자. 천천히.’
푸르륵.
한혈마는 다행히 내 말을 영리하게 알아듣고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움직였다.
‘주군.’
‘응?’
그때 이 상황을 지켜보던 후성이 나한테 질문을 던졌다.
‘그 말의 이름은 무어라 하시겠습니까?’
‘이름?’
……그러고 보니 그게 문제네.
역사에서 유명한 말들은 죄다 멋있는 이름이 있지 않나.
오추마(烏騅馬)는 말 그대로 검은 털이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고, 적토마(赤兎馬)는 몸이 붉고 토끼처럼 잘 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절영(絶影)은 그림자가 흐릿해질 정도로 빠르게 달린다는 뜻.
조황비전(爪黃飛電)은 여러 번 언급했다시피 발굽이 노랗고 번개처럼 빨리 달린다는 뜻이 있다.
애초에 동물한테 이름을 붙인다는 것 자체가 그를 소중히 여기겠다는 뜻 아니겠나.
말은 매우 영리한 동물이라 자기 이름도 척척 알아듣고 가끔 애교도 부리는 귀여운 녀석이다.
당장 내가 타고 다녔던 발발이만 하더라도 그러했으니까.
‘자네가 붙인 이름은 없나?’
‘에이, 이제 주군께서 새로운 주인 아니십니까. 어차피 그 아이도 제가 붙인 이름 따윈 기억하지 않을 겁니다.’
내 질문에 후성은 씩 웃어 보이곤 꽤 슬픈 대답을 했다.
그렇게 말하면 진짜 미안해지는 거 알고 있냐.
‘으음….’
자리에 멈춰 선 채 잠깐 고민하던 나는 말한테 씽씽이란 이름을 붙이려 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그래도 씽씽이가 뭐냐, 씽씽이가.
요즘 어린아이도 그런 이름은 안 붙이겠다.
이쯤 되면 폐하께서 고양이한테 야옹이란 이름을 붙이고 코끼리한테 뿌오란 이름을 붙인 이유가 내 탓이 아닐까 생각됐다.
…아니, 진짜 내 탓 맞는 것 같은데.
폐하의 자가 백련(伯戀)인 것과 아이의 이름이 유정(劉桯)인 걸 떠올려봐라.
사실 이름 센스가 좋으신 게 아니겠나.
그저 제 남편이 동물한테 귀여운 이름을 붙이니 자신도 따라 했을 뿐인 거지.
이렇게 생각하면 난 도대체 폐하께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까.
이윽고 모든 고민을 끝마친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황마(靑黃馬)라 하지 뭐.’
‘…꽤 직관적인 이름이군요?’
후성은 한혈마의 푸른색 눈동자와 백금색 몸체를 바라보곤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뭐 임마.
그러면 더 직관적으로 청안황체(靑眼黃體)라 부를까?
사실 청색은 그 청명한 색깔에서 나오는 긍정적인 인상 덕분에 좋은 뜻이 많고, 황색은 아예 황제의 상징으로 자주 언급되는 색깔이니 나로서도 무척 좋은 이름을 지어준 거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청황이다.’
───…….
봐라.
비록 상당히 미묘한 반응을 보일지언정 대놓고 마음에 안 든다는 반응을 보이진 않잖아.
진짜 마음에 안 들었으면 인상을 팍 찌푸리곤 거칠게 투레질을 했겠지.
근데 청황마가 아니라 청황이라 부르니까 은근 어감이 착 감기네.
앞으로도 자주 불러야지.
‘아, 그리고 주군.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정보가 있습니다만….’
‘중요한 정보?’
‘예.’
내가 되묻자 고개를 끄덕인 후성은 곧장 말을 이었다.
‘그 말, 암컷입니다.’
‘…….’
‘어디 근본도 없는 하찮은 말의 새끼를 배지 않도록 관리 잘해주십시오!!’
‘그, 그래.’
난 눈을 부릅뜨며 외치는 후성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에서 아들이 결혼하는 걸 반대하는 시어머니 캐릭터의 모습이 이랬던 것 같은데.
진짜 말한테는 진심이라니까.
“주군! 곧 배가 도착한다는 소식입니다!”
“알았다.”
어느샌가 하북 지방과 관중 지방을 가로지르는 황하(黃河)에 도착한 걸 깨달은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청황이 위에 올라탄 채 그녀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푸르륵.
내 예비 목숨이나 다름없는 천리마는 햇빛을 반사하면서 황금빛으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나저나 폐하를 만나면 또 어떤 변명을 해야 할까.
당분간은 또 낙양에서 못 나가겠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