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546)
EP.546 과거(科擧)(1)
가족과 소박한 일상을 보낸 지 며칠.
시간이 흐르고 흐른 끝에 나는 결국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근신 처분을 끝마칠 수 있었다.
불과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지.
일도 별로 하지 않고 가족들과 노닥거리는 시간이었는데 즐겁지 않으면 무엇이 즐겁겠나.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는 법.
쿵─!
“요 며칠간 밀린 일이에요.”
“…….”
“어디, 오늘도 최선을 다해보죠?”
누가 봐도 엄청나게 많아 보이는 죽간을 내 앞에 내려놓은 사마의가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대충 이런 일이 일어날 건 예상했지만 막상 눈앞으로 닥치니 눈물만 나오는구나.
“거, 걱정마세요!”
내 의기소침한 모습을 본 방통이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류 자체는 저희가 전부 한 번씩 확인해봤으니 도장만 찍어주시면 돼요!”
“진짜로?”
내가 얼굴을 활짝 피면서 묻자 방통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자세히 살펴보시는 것도….”
“…….”
사람한테 희망을 줬다가 다시 절망 속으로 빠트리는 솜씨가 엄청나군.
이런 면모가 있으니까 죄수를 그렇게도 잘 고문한 건가.
“괜찮습니다. 주군.”
그때 제갈량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제가 곁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오, 방금 그 말은 고백 같았어.”
“……?!”
내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제갈량은 화들짝 놀라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그게, 어, 저는….”
요즘 따라 제갈량이 말 떠는 모습을 자주 보는 것 같네.
백발을 지닌 꼬꼬마 군사께선 나와 관련된 그렇고 그런 대화가 오갈 때만 유독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아마 내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닐 터.
…설마 제갈량도 사마의처럼 때를 기다리는 건가?
초목이 우거진 곳에 매복했다가 결국 사냥감을 확 낚아채는 데 성공한 호랑이처럼, 개천 속에 있는 용도 끝끝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승천할 기회를 엿보는 게 틀림없었다.
근데 호랑이나 용과는 달리 봉황은 적절한 표현이 안 떠오르네.
아무래도 이 둘에 비해 존재감이 적어서 그런가?
“주군.”
“응?”
내가 자리에서 우물쭈물하는 두 명을 바라보며 죽간에 손을 대려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편적으로 거의 모든 책사가 그랬지만, 그들 중에서도 특히 속마음을 짐작할 수 없는 극도로 차분한 음성.
고요한 청색 눈동자를 마주한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후, 무슨 일이지?”
삼국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인정할 처세술의 대가.
제 안위를 먼저 생각해 나라에 혼란을 불러왔단 평을 들을지언정, 그 뛰어난 능력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책사가 내게 인사를 올렸다.
“주군께서 제게 명하신 업무를 전부 처리했습니다.”
“업무?”
그 말을 들은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윽고 그녀가 언급한 업무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는 살짝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과거.
몇 년 전의 나는 분명 가후에게 한 가지 임무를 맡긴 적이 있었다.
───기존에 존재했던 천거 제도 말고도 새로운 등용 제도를 만들어 볼까 하는데.
───…예?
그때가 구체적으로 언제였더라.
아마 엄백호가 동오덕왕 어쩌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이에 내가 강동으로 출진해 그녀를 진압하기 직전이었던 때로 기억한다.
착융인가 뭔가 하는 도적놈이 나한테 유총의 시종으로 위장한 암살자를 보냈던 시기도 그때였지.
───기존에 자리를 차지한 인물들에게 추천받는 방식이 아니라, 시험을 보고 아예 새로운 인재를 뽑는 방식.
───…….
───어떤가. 그대라면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보는데.
본래 역사에선 수백 년의 난세를 거쳐 세워진 수나라가 처음으로 도입한 제도.
난 자식 농사 빼고는 모든 게 완벽했던 명군, 수문제(隋文帝)가 새로운 인재를 뽑기 위해서 추진했던 제도를 시행하고자 가후에게 일거리를 맡겼었다.
대운하 건설도 그렇고 수문제가 알았으면 자신의 업적을 가로채지 말라며 울부짖었겠지만 어쩌겠는가.
꼬우면 몇백 년 더 일찍 태어났어야지!
…근데 이런 말을 내뱉으면 정말 몇백 년 더 일찍 태어날 것 같으니 말을 아끼도록 하자.
지금 내 근처를 위성처럼 맴도는 서여도 그렇고, 저기 북방 유목민만 하더라도 훗날 금나라 송나라 때에서야 등장해야 했던 칭기즈 칸이 난장판을 부리고 있지 않나.
이 세계는 아무리 생각해도 출생 시기가 이상해.
난 저기 서쪽 로마에서 벌써 콘스탄티누스나 유스티니아누스 같은 이름이 튀어나와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
그건 조금 놀랄지도 모르겠네.
벌써부터 대제(大帝)가 튀어나오는 건 조금 아니지 않나 싶으면서도, 이미 대칸(大汗)이 나온 마당에 뭔들 못하겠나.
…생각이 잠깐 다른 쪽으로 빠졌네.
하여튼 나는 가후에게 아이디어를 주고 부탁한다며 대량의 일거리를 투하한 적이 있었다.
갑자기 까마득한 일거리가 생긴 가후는 그때 어떤 심정을 느꼈을까.
에이, 모르겠다.
원래 높은 사람은 대략적인 방침만 정해주고 유능한 아랫사람을 위잉 갈아버리면서 결과물을 내뱉을 때까지 굴리는 게 맞아.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전부 처리했다고?”
“예. 이제 계획서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근신 처분도 끝났겠다, 가후의 안내에 따라 관청까지 기대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갑자기 어디 가시려고요?”
“…….”
사마의가 자리에 앉아있던 나를 뒤에서 껴안으며 말했다.
근처에서 보면 사랑이 넘치는 애정 행각이라 볼 수 있고, 사마의가 내게 품은 감정을 생각해 볼 때 아마 그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니겠지만….
꾸구국.
“눈앞에 쌓인 급한 일들은 전부 처리하고 가셔야죠.”
“그, 그래.”
나는 미묘하게 힘이 들어가 있는 사마의의 손길을 느끼면서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레슬링이었으면 탭이라도 쳐야 했을 것 같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마의에게서 풍겨오는 향긋한 들꽃 냄새를 맡으면서 손을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우와아….”
“어찌 저리 대담한….”
살짝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와는 달리 방통과 제갈량은 사마의의 행동에 감탄사만 내뱉고 있었다.
…도대체 어쩌다 이런 꼴이 된 거지.
──────────
방통이 언급했던 대로 내용 자체는 잘 정리되어 있었기에 내가 할 일은 죽간을 한 차례 훑어보고 대장군의 인장을 찍는 것뿐이었다.
정책 대부분은 여기서 더 올라갈 필요도 없이 곧장 시행될 테고, 내 수준에서도 처리할 내용이 아니다 싶은 건 황제 폐하께 전해지겠지.
물론 황제 폐하께서 내가 승인한 건의안을 거절할 리 없었다.
이럴 때는 내가 한나라의 비선 실세라는 게 팍팍 느껴진다니까.
“…끝났군.”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시력이 나빠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죽간을 살펴보고, 살짝 이해가 안 되는 건 주변 꼬꼬마 책사들에게 물어보며 일을 처리하던 나는 끝끝내 마지막 서류를 처리했다.
글 읽는 거 싫어.
이제 하고 싶지 않아.
사마의는 자리에 흐물흐물 늘어진 나를 바라본 다음 만족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잘하셨어요. 이제 일도 끝났으니 전 슬슬 돌아갈 준비를….”
“누구 마음대로.”
“으읏?!”
나는 조금 전 사마의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팔을 휙 끌어당겨 품에 껴안았다.
“난 아직 일이 많이 남았는데 혼자 돌아가겠단 거야?”
“이, 일단 이것부터 놓고 이야기해요!”
“싫은데.”
애초에 벗어날 마음도 없잖아.
내가 살짝 손을 놓으려 하자 다른 사람한테 티가 안 나도록 몸을 슬그머니 밀착해 오는 사마의의 모습.
속으로 피식 웃은 나는 그녀의 귓가에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와줄 거지?”
“으으…!”
나만 보면 끔뻑 죽는 꼬꼬마 군사께서 이 부탁에 무슨 대답을 내뱉을지는 일목요연하지.
방통과 제갈량은 자극이 너무 강하다는 듯 이제 자기 눈을 가리거나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등 아예 시선 처리를 했다.
이를 혼란스럽다면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할 수 있을 터.
“…….”
“…능숙하네.”
근처에서 날 지켜보던 서여와 여포는 그런 말을 내뱉으면서도 이제 반쯤 체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사마의를 놀리면서 시간을 보내길 잠깐.
나는 집무실로 돌아갔던 가후가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자 하던 행동을 멈추고 우뚝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저것들이 다 뭐지?
책상 위에 가지런히 쌓여있는 수많은 죽간을 확인한 내가 고개를 돌렸다.
“양을 최대한 줄였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더군요.”
가후는 내 당혹스러운 시선에도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주군.”
“…그래.”
아마 그녀가 처리했을 양은 이것의 수십, 수백 배는 됐을 터.
가후의 노력을 알고 있던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한숨과 함께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래, 미래 지식 좋다는 게 뭐겠냐.
세세한 것까지 바로잡을 수는 없더라도 큰 틀을 잡아 주는 것 정도는 도움이 되겠지.
나는 곧 처음 시행될 과거 제도(科擧 制度)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