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551)
EP.551 과거(科擧)(6)
───아셨죠? 꼭이에요!
───…알았다.
장료에게서 꼭 고순을 꼬드기라는 신신당부를 받고 며칠.
그녀의 말이 정말 사실인지 살짝 아리송했던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고순을 호출했다.
내가 아는 고순이라면 적어도 나에 한해서는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을 테니까.
고순이 어떤 인물인가.
본래 역사에서 충언과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가 제 주군한테 온갖 미움을 받았지만, 그런데도 그를 향해 묵묵히 충성을 바치며 죽음까지 함께 했던 장수다.
이런 인물이 나한테 이상한 질문 하나 받는다고 해서 당황할 일은 없을 터.
만약 장료가 했던 말이 맞다면 자신의 연심을 담담히 고백할 것이고, 시원하게 헛발질을 한 거라면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겠지.
…정말 그런 머쓱한 상황이 찾아온다면 나는 언제든지 장료를 팔아넘길 준비가 되어있었다.
자신만만하게 말했으면 뒷감당도 할 준비가 되어있단 뜻이겠지.
‘아, 나도 장료한테 들은 내용이거든.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아줘.’
‘…….’
내 구차한 변명을 들은 고순은 과연 어떤 반응을 드러낼까.
이런 어이없는 상상에 웃음이 나는 걸 보면 나도 참 장난기가 넘쳤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흐른 현재.
“…….”
나는 눈앞의 고순이 보이는 예상 밖의 행동에 상당히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 예상을 벗어난 고순의 행동이 과연 무엇이냐.
“…….”
고순은 나한테서 질문을 받자마자 석상처럼 굳어버린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고순?”
“…….”
평소에는 내가 말을 걸기 무섭게 반응했던 여인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리 말을 걸어도 묵묵히 침묵만 지켰다.
나는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정신을 되찾게 할 요량으로 고순에게 접근했다.
“이봐, 듣고 있나?”
“…!”
반응했네.
고순은 서로의 거리가 좁혀지자 숨을 한번 삼키더니 놀라운 속도를 보이면서 뒤로 물러났다.
사실 자백하는 것과 다름없는 행동이네.
…근데 양쪽 무릎을 꿇어앉은 상태로 어떻게 저런 속도가 나오는 거지?
고순이 비록 장료나 서황처럼 일기당천의 무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녀도 충분히 장군 직책에 걸맞은 신체 능력을 지녔다는 게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이럴 수가.”
내가 오늘도 인체의 신비에 대해 살짝 경악할 무렵 근처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여포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로…?”
고순의 속마음을 완전히 눈치채지 못한 건 나와 비슷했지만, 그래도 여포 특유의 짐승 같은 직감으로 대충 짐작은 했던 모양.
그 여포조차 경악한 걸 보면 고순이 얼마나 철저한 태도로 제 마음을 감췄는지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
서여는 주변 인물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 나한테만 관심이 있었으니 딱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행동에 끼어드는 경우는 단 하나.
바로 나를 향해 물리적인 해를 입히려고 할 때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마음을 다잡지 못한 고순을 바라보면서 현재 상황을 판단했다.
일단 여기까지 온 이상 슬그머니 물러나면 모양새만 이상해지지.
또 고순은 내가 자신을 거부했다 생각해서 알게 모르게 풀이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고순이 비록 겉으로는 티를 안 낸다지만 머릿속에선 분명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고 있겠지.
나는 고순 머릿속에 있는 미니어처 고순들이 사이렌을 울리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광경을 상상하곤 실없이 웃었다.
“고순.”
“…….”
“그대가 무슨 생각으로 나에 대한 연심을 10년 넘게 숨겨왔는지 구태여 묻지는 않겠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고순을 곁에서 지켜봤던 나는 그녀가 어떤 의도로 내게서 거리를 뒀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장료가 말하기를, 고순이 내게 품은 감정은 단순한 충성심이 아니라던가.
그 영역은 가히 숭배(崇拜)의 영역.
고순은 주군을 섬기는 단순한 충신이 아니라 신이나 부처를 섬기는 광신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충신들도 위에서 자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오면 이유라도 묻고 죽을 텐데, 고순처럼 무언가 알 수 없는 브레이크가 망가진 경우엔 이유조차 묻지 않고 즉시 제 목에 칼을 꽂을 것이다.
모든 생명은 본능적으로 제 생명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게끔 되어 있는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다니….
어떻게 보면 진짜 무서운 경우네.
하여튼 내가 아는 고순은 누군가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감히 자신 따위가 더럽힐 수 없다는 유형이었다.
왜, 가끔 그런 경우도 있잖아.
그저 곁에서 지켜보는 것에만 만족하는, 누군가가 보면 답답하다 외칠 유형 말이야.
장료도 고순의 이러한 행동을 결국 참다못해 나한테 귀띔해 주지 않았나.
확실히 20년 가까이 지켜보고만 있는 걸 보면 속이 뒤집어질 법도 해.
오히려 장료가 보살인 거지.
나였다면 5년도 못 참고 즉시 남녀 사이에 개입했을걸.
장료에게 전달받은 정보를 토대로 고순의 마음속을 전부 꿰뚫어 본 나는 눈앞에 있는 여인에게 담담히 다가갔다.
수많은 세월을 전장에서 보냈지만 여전히 백옥처럼 희며 잡티 하나 없는 피부.
보는 이에게 싱그러운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맑은 청록색 눈동자.
제 꼼꼼한 성격을 드러내는 것처럼 올림머리 모양으로 가지런히 정돈한 회색 머리카락.
누가 봐도 미인이라 부를 모습인데 이런 외모조차 부족하다며 물러나다니….
내 입장에선 이해가 안 가긴 해.
그렇게 치면 오히려 내가 더 부족한 놈 아니냐?
나도 나름 잘생긴 편에 속하지만 원술처럼 진짜배기는 아니었는데 말이야.
물론 원술은 자신의 모든 능력치를 외모에만 투자했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얼굴이 아무리 잘생겨도 커버할 수 있는 영역엔 한계가 있더라.
…물론 나는 원술과 같은 남자라서 그놈이 얼마나 잘생긴들 영향따위 없었다.
난 결코 같은 남성과 쌍검 결투를 하고 싶지 않아.
이 이상 물러날 장소가 없는 곳까지 그녀를 밀어 넣은 나는 벽에 손을 짚으면서 말했다.
“싫다면 지금이라도 이야기하도록.”
“…….”
“나는 내가 좋다며 다가오는 미인을 결코 밀어내지 않는다.”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붙잡는….
…솔직하게 말해서 조금은 질척이며 붙잡는 남자.
누군가가 보면 살짝 추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걸 어떡해?
지금 내가 품에 안은 여인들이 얼마나 능력 있고 아름다운데.
나는 그렇게 관계 정리가 확실한 남자가 아니라고.
정말 마음이 떠났다고 판단되면 보내줄 수밖에 없겠지만.
“확실하게 대답하도록. 그렇지 않으면 나도 여기서 더 움직이지 않을 테니.”
“…….”
Yes냐, No냐.
어서 네 본심을 말해!
고순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던 나는 알 수 있었다.
평소와 비교했을 때 더욱 확장된 동공.
알게 모르게 살짝 가빠진 숨결.
계속해서 움찔거리는 입술과 홍조로 인해 묘하게 붉어진 얼굴까지.
인간은 싫어하는 사람을 볼 때 동공이 수축되고 좋아하는 사람을 볼 때 동공이 확장된다던가.
이는 상대의 미세한 부분까지 확인하고 기억하기 위해 집중하는 걸 드러내는 모습이라던데….
지금 고순의 동공이 확장됐다는 것은 그녀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드러내는 것과 다름없었다.
황제 폐하나 진류왕 전하처럼 검은색 눈동자를 지닌 사람은 가까운 거리에서 진짜 뚫어지게 안 바라보면 동공을 확인하기가 어렵던데 말이야.
고순은 누가 봐도 확연히 티가 나는 청록색 눈동자를 지녔기에 상대적으로 확인하는 게 쉬웠다.
그렇게 나와 고순이 서로를 마주 보며 시간을 몇 분이나 보냈을까.
차분히 대답을 기다리던 나는 계속 달싹이던 입술이 끝내 열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제가, 제가 어찌 주군을 거절하겠습니까.”
“…….”
평소처럼 담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하지만 나는 고순의 담담한 어조 속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담겨있다는 걸 눈치챘다.
“저는 주군이 어떠한 명령을 내리더라도 따를 것이며, 그게 설령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것일지라도….”
“내가 묻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닌데.”
우충(愚忠).
어리석고 고지식한 충성심을 이르는 말.
본래 역사의 고순은 능력과 인성만큼은 정말 나무랄 곳이 없는 훌륭한 장수였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답답할 정도로 미련한 인물이었다.
제 주군인 여포가 수많은 인성적 결함을 드러내고 그로 인해 온갖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끝까지 여포를 따랐다는 점.
그리고 고순이 제 주군인 여포를 위해 끝까지 목숨을 바쳤던 것처럼, 함진영도 자기 상관인 고순을 위해 거리낌 없이 목숨을 바쳤다.
고순이 여포를 따라 형장에서 삶을 마감한 이후 함진영이란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 걸 보면 그들이 어떤 결말을 맞았을지 예상이 가지.
그가 만약 여포에게 희망이 없다 판단하고 다른 주군을 찾아 떠났다면 개인 열전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이름을 날렸을 거다.
그리고 고순을 따랐던 함진영도 헛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을 터.
충(忠)이라는 단어의 가치를 그리 얕잡아볼 마음은 아니지만, 필요할 때 적절히 그를 쳐내는 것도 미덕이 아닐까.
“나는 네 마음에 묻고 있는 거야.”
“…….”
“정말 진솔한 마음으로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면 몇 번이고 다시 물어볼 거다.”
내 진지한 물음을 마주한 고순이 과연 어떤 대답을 내뱉을까.
그건 서여와 여포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