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572)
EP.572 요동(10)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면서 열심히 도망치는 적군들.
누군가는 저들을 가만히 내버려 둬도 알아서 해산하지 않겠냐는 말을 하겠지.
하지만 도망친 놈 중 절반은 무리를 다시 형성해서 주변을 약탈하고 다닐걸.
패잔병들은 원래 끼리끼리 모여서 먹고살겠답시고 힘없는 사람을 수탈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아예 이해가 안 가는 일은 아니지.
배는 고프고, 돌아갈 장소조차 없으면 엇나가지 않는 게 이상할걸.
하지만 아무리 사정이 있다고 한들 약탈은 약탈.
무기를 들고 마을을 약탈하고 다니면 그게 도적 떼 아니겠냐.
심지어 갑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훈련까지 되어있는 질 나쁜 도적 떼.
도적이라 하면 치를 떠는 내가 그런 상황을 잠자코 두고 볼 리 없었다.
“주군의 명령이다.”
“…….”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적을 제외하면 전부 베어버리도록.”
“예!”
잔혹하다면 잔혹하고 냉혹하다면 냉혹한 판단이었지만 원래 전쟁이란 것은 그런 법이다.
인간이 벌이는 짓 중에서도 가장 정신 나간 행동.
아무리 엇나가지 않게 움직인다 한들 일반적인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상황이지.
물론 그렇다 한들 선을 세게 넘어버리는 것이 잘하는 행동이란 뜻은 아니고.
살육, 약탈, 방화….
이런 행동은 적을 너무 많이 만드는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본인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냥 뇌 자체가 망가진다고 해야 할까.
상황이 거기까지 치달으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범죄자가 되는 게 부지기수였다.
…아니면 이렇게까지 비틀린 자신의 모습에 비관하며 자살하던가.
군대를 사이코 또라이 집단으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또 전장에서 승리하고 싶다면 잔혹해져야만 하는 상황에도 어느 기준선을 철저하게 지켜야 했다.
그 몽골 제국조차도 사람을 학살할 때 기준점이 정해져 있었거든.
자신에게 대항하면 죽였고, 항복하면 살려줬다.
또 도시를 약탈할 때는 반드시 자신의 공에 따라 철저하게 전리품을 나눠야 했고.
만약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자기 목이 날아갔지.
물론 기준을 지킨다고 한들 후유증에 시달리는 병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도의 차이가 있으니 규율은 지켜야 했다.
“투항하지 않는 자는 전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항복하겠소! 살려주시오!”
아군이 도망치는 적들을 끝까지 추격하면서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자 겁에 질린 공손도군의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줄줄이 항복하기 시작했다.
이미 원소가 이끌던 부대는 진작 강을 건너와 전장에 합류한 상태였고, 전령의 보고에 따르면 장합이 이끄는 부대가 북쪽에 자리 잡은 상황.
사실상 세 방향에서 공격을 받는 셈이었으니 항복하지 않고 도망친 적들이 향할 곳은 동쪽에 있는 양평밖에 없었다.
그러면 이제 양평 공략에는 며칠이나 걸릴까.
처음 계획은 1년 안에 낙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는데, 이렇게만 잘 흘러간다면 불과 반년 안에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중성적인 마녀들은 말했지.
인생이란 원래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라고.
나는 오늘도 삶의 지혜가 묻어나오는 명언을 떠올리면서 공손도의 행동을 예의주시했다.
──────────
요동왕을 자칭한 공손도의 본거지인 양평.
“요수가 뚫렸다?”
“예!”
곧 있을 전투에 대비하며 물자를 점검하던 공손도는 전령의 보고에 얼굴을 왈칵 찌푸렸다.
“아군과 정면으로 대치하던 원소군은 은밀히 별동대를 움직여서 방어선을 우회했고….”
“…….”
“남쪽에서는 대장군이 수많은 병력과 함께 상륙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나왔는가.
한나라의 대장군은 공손도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경로를 통해서 요동에 침입했다.
확실히 물길을 이용한다면 육로를 통해 이동하는 것보다 훨씬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터.
너무나도 오랜 세월 동안 말을 타고 다니는 오랑캐하고만 다퉈왔기에 자신도 모르게 생각의 폭이 좁아진 걸 공손도는 뼈저리게 느꼈다.
비록 지금은 요동의 항구가 크게 발달하지 않았기에 대장군도 은근히 골치를 앓고 있겠으나 그런 상황도 오래가지 않겠지.
요수를 뚫은 대장군이 군세를 정비하는 잠깐의 시간.
자신은 그 얼마 없는 여유 시간 동안 어떻게든 타개책을 찾아내야만 했다.
“아버님.”
“…무슨 일이지?”
공손도가 머리를 굴리면서 생각에 빠져있을 무렵 그의 후계자인 공손강이 다가와 의견을 내뱉었다.
“양평을 포기하시지요.”
“뭐라?”
세력의 본거지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포기하라는 제안에 공손도는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대장군과 원소의 군대는 적어도 수천 리를 이동한 장거리 원정군입니다.”
그토록 먼 거리를 이동했다는 것은 한나라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일.
전쟁에서 삼가야 하는 일 중 하나가 적군이 원하는 시기에 싸워주는 것이었으니 공손강은 구태여 부딪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적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으니, 장기전으로 끌고 가 기세를 누그러트리고 체력을 소진시키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자신에게 유리한 점을 이용하고 상대에게 불리한 점을 찌르는 전략.
“…과연.”
적군의 상륙을 쉽게 허용한 건 분명 치명적인 실수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느낀 공손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의견이 옳다. 조만간 양평을 포기해야겠군.”
공손도가 자신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자 공손강은 곧장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도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본래라면 청야 전술을 펼치기 위해 전부 불태우는 것이 옳겠지만….”
요동왕은 한 차례 수염을 쓰다듬다가 피식 웃었다.
“그건 왕으로서 너무 잔혹한 일이겠지.”
“…….”
“애초에 대장군의 역린이 그것 아니더냐?”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을 장안 대화재.
적에게 물자를 주지 않겠다는 이유로 장안을 철저하게 파괴한 동탁의 천인공노할 악행은 오히려 대장군의 심기를 제대로 거스르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그 결과 동탁은 사례주를 벗어나고 서량까지 쫓아온 대장군에게 불과 한 달조차 가지 못하고 멸망.
한때 조정을 장악한 군웅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꼴사나운 최후를 맞이한 동탁의 이야기는 어떤 이들에게 교훈을 안겨줬다.
아무리 전략적인 판단이라도 지켜야만 하는 선이 있다는 걸.
서초패왕이 저질렀던 신안대학살도 단순히 진나라를 증오한다는 이유로 저지른 게 아니었다.
진나라의 20만 포로를 먹일 식량이 부족하기도 했고, 포로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들려오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그 당시 서초패왕은 한고조보다 관중을 먼저 점령하기 위해 속도 경쟁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초나라의 왕이 관중을 먼저 점령한 자에게 그곳을 내주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
즉 불리한 전황에서도 진나라의 명장 장한(章邯)과 9번 싸워 9번 전부 승리한다는 엄청난 공을 세웠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보상을 한고조한테 빼앗기게 생긴 것이다.
그렇기에 서초패왕은 20만 포로를 전부 생매장하는 대학살을 저지르는데, 그 결과 상황이 일시적으로 호전됐을지언정 훗날 어마어마한 후폭풍에 시달리게 됐다.
“…그리 멍청한 짓은 할 수 없지.”
이미 한 차례 큰 패배를 겪은 공손도는 대장군을 지치게 해서 요동에서 물러나게 만드는 것에 만족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장군의 역린을 건드린다면 그는 분명 사생결단을 내기 위해 자신이 어디에 있든 추격해 올 터.
“전장에서 자그마한 이득을 취하겠다고 대국적인 판단을 저버리면 나라를 어떻게 운영하겠느냐.”
“…….”
“준비해라. 대장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요동을 벗어난다.”
──────────
“공손도가 오밤중에 병사를 이끌고 몰래 달아났다 합니다.”
“…뭐?”
요수를 뚫고 포로를 수습하며 양평으로 진격하던 나는 제갈량의 보고에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걸 도망치네.
판단 하나는 끝내주는구만.
요동의 정세가 불과 며칠 사이에 격변하자 사마의는 툭 중얼거렸다.
“으음…. 확실히 머리를 굴리긴 했네요.”
“…….”
“장거리 원정을 하는 저희 입장에서는 단기전보다 장기전이 훨씬 골치 아프니까요.”
사마의의 말대로 공손도는 전쟁에 그리 무지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제아무리 큰 피해를 당했다 한들 자기 본거지를 비우고 미련 없이 달아날 수 있는 장수가 얼마나 될까.
적어도 꿀물만 찾다 인간 수육이 되어버린 어느 가짜 황제보다는 전략적 안목이 있었다.
…근데 그런 놈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요동왕을 자칭한 거지?
공손도는 본래 역사에서도 관도 대전에서 승리한 조조를 얕잡아보며 요동왕을 자칭하던 인물이긴 했지만….
역시 모르겠네.
사람은 원래 이성적으로만 행동하는 생물이 아니니 어떨 때는 굳이 이해하려 드는 게 손해였다.
나는 눈가를 슬며시 좁히면서 상황을 잠깐 정리했다.
“공손도가 요동을 포기하고 달아났다면 역시 그곳밖에 없나?”
“예.”
흰색 머리카락을 지닌 꼬꼬마 군사는 백우선으로 입가를 가린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사군(漢四郡).”
“…….”
“공손 일가는 필시 그곳으로 도망쳐 세력을 재정비할 것입니다.”
환장하겠네.
기어코 전생 땅을 밟게 생겼잖아.
이른 시일 내 끝을 맞이할 줄 알았던 공손도 토벌전이 점차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