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575)
EP.575 한사군(3)
꽤 긴 의논 끝에 앞으로의 계획을 결정한 나는 제일 먼저 고구려한테 사신을 보냈다.
사신이 고구려에게 전달할 내용은 대충 이랬다.
한나라는 조정에 반기를 든 역적, 공손도를 토벌할 것이다.
만약 고구려가 이에 도움을 준다면 섭섭지 않은 보상을 약속하겠다….
다른 나라에게 전달하는 것 치고는 상당히 간결한 내용이었지만 원래 내 글 스타일이 이러니 어쩔 수 없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문장력을 드러내기 위함인지 간단하게 끝낼 수 있는 내용도 늘어지게 쓰는 경향이 있어.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란 담백한 문장을 ‘우중충한 하늘이 한 차례 굉음을 토해내곤 메마른 대지를 물로 뒤덮었다.’ 이렇게 서술하는 사람이 대부분일걸.
아니, 오히려 내가 예시를 든 것보다 훨씬 더 길게 쓰겠지.
문장을 꾸며주는 것은 좋은데 그게 너무 과하면 오히려 역효과야.
쓰는 사람도 힘들고 읽는 사람도 집중력이 떨어져서 대강대강 넘기게 된다고.
…물론 조조처럼 글 쓰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에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지만.
하지만 나는 평범한 실력을 지녔으니 문장을 억지로 꾸미는 것보단 필요한 말만 딱딱 적는 게 훨씬 나았다.
───문장과 글씨는 의외로 많은 정보를 알려준다는 걸 알고 있나?
이와 관련해서 조조는 과거 내게 이런 말을 했었지.
───평소 성격, 글을 쓸 때의 감정…. 어지간한 인물이 아니라면 글에 전부 드러나는 법이다.
훗날 여러 사람들에게 뛰어난 문인이라 칭송받을 인물은 역시 무언가 다르다는 건가.
조조의 설명을 들은 나는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나는 어떤데?
───그야 간단하지.
조조는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곧장 말을 이었다.
───자상함, 상냥함, 성실함.
───…….
───무엇보다 시대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방식.
───나는 그대의 글에서 이러한 면모를 느꼈느니라.
도대체 어디서 그런 걸 느낀 거냐.
심지어 나는 공적인 업무를 제외하면 글도 별로 안 쓰고 다녔는데 말이야.
내가 딱히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조조도 만만치 않게 콩깍지에 씌인 상태였다.
아니면 나도 모르는 심리학이 있는 걸까.
하여튼 내가 고구려에게 보낸 사신은 답변을 들고 금방 돌아왔다.
“지금 바로 결정을 내리기에는 사안이 너무나도 중대하니, 날짜를 정하고 직접 얼굴을 마주하자는 내용입니다.”
“…그래?”
어떻게 보면 만남을 의도한 게 없잖아 있었으니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위치는 자신들이 정할 테니, 대장군께서는 날짜를 정해주시라고….”
얼씨구.
혹시 내가 매복이라도 할까 봐 의심하는 건가.
하긴, 한나라는 고구려와 비교했을 때 세력이 몇 배는 차이 나는 상황.
내가 만약 나쁜 마음이라도 품으면 아주 큰 일이 날 거다.
본래 역사에서 수나라와 고구려가 맞붙었을 때도 국력 차이가 10배 정도 났을걸.
지금처럼 전성기가 찾아오지 않은 고구려는 상황이 더 안 좋지.
괜히 위나라와 고구려가 맞붙었을 때 수도까지 쭉쭉 밀린 게 아니라니까.
보통 이런 외교적 자리에서 상대를 급습하는 건 자신들이 믿을 수 없는 놈이라 선전하는 꼴이긴 한데….
또 그런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니 조상님들 입장에서도 안심할 수 없었을 거다.
지금 한나라가 ‘오랑캐들과 지킬 의리 따윈 없다!’ 말하면서 뒤통수를 후려쳐도 국력 차이가 워낙 많이 나니 뭘 할 수 없는 상황.
그때 가서 공손도와 부랴부랴 손을 잡는다 해도 피해가 너무 커서 뭘 할 수가 없겠지.
기껏해야 소규모 기동전으로 신경을 조금 거슬리게 만드는 정도가 한계이지 않을까.
그래도 내게 회담 시간을 결정하라는 걸 보면 조상님들도 최대한 양보했다는 뜻이다.
뭐, 이를 돌려 말하자면 내가 회담 자리에서 기습당할 수 있단 뜻인데….
…고구려가 굳이 그런 선택을 내릴 이유가 있나?
진짜 천운이 따라서 내가 벼락이나 운석 같은 걸 맞아 죽었다 한들 한나라의 국력은 건재할 텐데 말이야.
그러면 이제 고구려와 한나라가 정면 대결을 벌이는 거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느라 인구수가 백만도 간당간당한 현재 고구려.
후한서에 총인구수가 약 5,000만이라 적힌 통일된 한나라.
이야, 수나라와 고구려도 국력이 약 10배 차이라고 들었는데 여기는 50배 차이네?
이건 전략이고 뭐고 통할 상황이 아니잖아.
이를 보면 전성기가 찾아오지 않은 고구려가 얼마나 약한 나라인지 알 수 있었다.
잘 생각해 보면 참 아이러니하기도 해.
중국이 오호십육국이란 희대의 암흑기를 겪을 동안 고구려에선 명군이 잇따라 출현하며 전성기를 누리다니.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휴목(休沐, 닷새) 뒤에 만나자고 해야겠어.”
“명에 따르겠습니다.”
“…잠깐.”
내 전언을 받든 전령이 곧장 움직이려 하자 나는 그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쉬지도 않고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
“그대 말고 다른 사신을 보낼 것이니 얌전히 쉬기나 하도록.”
“…예.”
충성심이 높은 건 좋은데 그래도 자기 몸은 챙겨야지.
난 가끔 휘하 병사들의 이상할 정도로 높은 충성도가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내가 다른 사신을 보내면서 뜻을 전달했으니 고구려도 조만간 반응을 보일 터.
지금 거리가 상당히 가깝기도 하니까 하루나 이틀 뒤에 답장이 올 것이다.
물론 회담 장소의 경계를 철저히 한 뒤에 말이야.
“아마 그들은 현도군 끄트머리를 회담 장소로 정할 것입니다.”
현도군(玄菟郡).
한사군과 고구려가 맞닿은 국경 지대이자, 또 부여하고도 거리가 무척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
나는 제갈량의 의견에 고개를 돌리면서 물었다.
“그래?”
“예. 한사군 안쪽에서 이야기를 나누자니 범의 입 속으로 들어온 기분일 테고, 고구려 안쪽으로 들이면 웬 범 한 마리가 안마당에 머무르는 기분이지 않겠습니까.”
결국 호랑이가 깽판을 부린다는 뜻이네.
처음부터 회담 장소가 간파당한 이상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뒤통수를 후려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니면 조상님들이 뒤통수를 후려치는 걸 역으로 후려치던가.
그러면 매복의 매복인가.
이게 무슨 트릭쇼도 아니고….
나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일단 지켜보자.”
조상님들이 어찌 나오느냐에 따라서 행동하면 되겠지.
“예.”
내 말이라 하면 무조건 따르는 제갈량이 내 의견에 반대할 리 없었다.
──────────
내가 또 다른 사신을 보내고 이틀 뒤.
조상님들은 제갈량의 예상대로 현도군 끄트머리를 회담 장소로 결정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내가 보냈던 사신의 때깔이 묘하게 좋아졌다는 건데, 아마 곧장 돌아가려는 사신을 어떻게든 붙잡으면서 여러 대접을 해준 게 아닐까.
하루면 돌아왔을 사신이 이틀이나 걸린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터.
이는 우리가 존중받는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
회담을 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실제 국경 부근에서 이색적인 차림새의 부대를 마주할 수 있었다.
말과 사람 할 것 없이 온몸을 갑옷으로 무장한 육중한 기마 부대.
이야, 이 세계에는 벌써 개마무사를 운용했나 보네.
내 예상대로라면 3세기에나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말이야.
사실 개마무사가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 나도 잘 모른다.
동천왕이 위나라와 싸울 때 철기병을 이끌었단 기록이 존재하지만 그게 한국인이 흔히 아는 개마무사란 보장이 없거든.
솔직히 지금이 너무 옛날이긴 해.
아직 백제와 신라, 가야조차 제대로 등장하지 않은 시기라니….
뭐, 개마무사도 따지고 보면 철기병이니 고구려가 벌써 개마무사를 운용한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병주 기병대는 아무래도 산을 타는 일이 많다 보니 개마무사보단 무장이 가벼운 상태.
───푸르륵….
솔직히 갑옷을 걸친 말이 엄청나게 힘들어 보였지만 파괴력과 방어력 하나는 끝내줄 테니 일장일단이 있었다.
제대로 된 산악 작전은 불가능하더라도 평지에서는 아주 깡패겠지.
물론 정직하게 힘 대결로 맞붙었을 때 가정한다면 말이야.
저렇게 파괴력과 방어력에 집중한 부대는 함정을 파서 기동력을 봉쇄하고 두들겨 패면 꼼짝도 못했다.
아니면 몽골 제국처럼 하루 종일 술래잡기만 하며 체력을 빼놓은 다음 매복 작전으로 낙마시키든가.
…왜 기마 부대만 보면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지부터 생각하는 거지.
허구한 날 이민족과 싸워온 것에 대한 부작용인가?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진 어느 오크 대족장의 말을 떠올린 나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멈춰 섰다.
“…….”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허튼짓을 하지 않을까 경계하는 상황.
“상대 파악은 이쯤 하지.”
그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난 천천히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이제 서로 대화를 나눌 때 아닌가?”
“…그 말이 맞다.”
내가 먼저 입을 열자 저쪽 진영에서도 상당히 눈에 띄는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 과연 고구려의 왕은 누굴까.
이 시기라면 산상왕이 나오는 게 정상이지만, 항적과 칭기즈 칸도 시간을 초월해서 등장한 마당에 고구려도 본래 역사를 따르라는 법은 없었다.
어서 정체를 밝혀라.
난 조상님이 누구든 놀라지 않을 준비가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