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577)
EP.577 한사군(5)
서둘러 선택하라는 내 제안에 고구려의 왕은 잠시 고민하다가 끝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로서도 이토록 좋은 제안을 거절할 순 없었을 거다.
이미 고연우는 자신의 형인 고발기를 지원해 내전까지 일으킨 공손도와 원수가 된 상태.
그 원수를 다른 나라와 힘을 합쳐 토벌하고 오래전에 잃은 땅까지 수복한다는 일석이조 제안은 누가 봐도 매혹적이었다.
심지어 여기서 이 제안을 거절하면 내가 곧장 부여에게 사신을 보낼 것이 자명한 상황.
적어도 고연우는 고구려를 제 국가한테서 떨어져 나온 열등인 취급하며 업신여기는 부여왕에게 기회를 줄 얼간이가 아니었다.
“…결국 변화가 필요한 때인가.”
인간의 가장 큰 장점은 대화를 통해 다른 이와 싸움을 멈추고 협력할 수 있다는 것.
누군가는 말한다.
인간이 본격적으로 거대한 문명을 이루며 발전하기 시작한 때는 다른 사람에게 처음으로 욕을 내뱉은 시절이라고.
그 이전에는 누군가가 마음에 안 들면 냅다 창칼부터 날아갔을 테니 협력이든 약속이든 의미가 있었겠나.
인간이 계속 그 상태였다면 아무런 공동체도 형성하지 못하고 다른 포식자들한테 ‘약육강식’ 당했을걸.
괜히 사람을 두고 사회적 동물이라 일컫는 게 아니지.
아마 창칼부터 날리던 놈들은 홀로 떠돌다가 후계를 남기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대화를 통해 갈등을 최대한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사람만이 부족을 형성하고 나라를 형성하며 쭉 생존한 것일 터.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데 하물며 같은 종족인 인간의 발버둥은 어떻겠나.
한 번 적으로 돌아선 다른 누군가를 영원한 적이라며 일말의 타협도 없이 끝까지 적대하는 행위.
…적어도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가 보일 태도는 아니지.
아마 그런 집단은 멸망을 피할 수 없을걸.
지금은 젓갈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되어버린 공손찬도 본래 역사에서 사방에 적만 만들다가 폭삭 멸망하지 않았나.
유우, 원소, 오환족과 같은 이민족 등….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 처해도 적과 화친할 바에야 성에서 불타 죽는 걸 선택했던 인물.
역경루 단 하나만 남은 상황에서도 원소의 화친 요청을 거절한 걸 보면 진짜 이상한 놈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뚝심 있는 놈이긴 해.
안 좋은 의미로 뚝심이 있어서 문제였지만.
“우리 고구려는, 이제부터 한나라를 적대하지 않겠다.”
“잘 생각했다.”
고연우는 그래도 공손찬 같은 경우가 아니었는지 국익을 따져가며 순순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공손도만 처리하면 고구려는 이제 부여와 싸우는 것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겠네.
저기 남쪽에 있는 삼한은 자기들끼리 치고받느라 정신없을 때니까.
하지만 부여도 그리 만만한 국가가 아니다.
국력만 따지면 지금 고구려의 두 배 이상일걸?
본래 역사에서 부여와 대립하며 조상님들을 지독하게 괴롭혔을 선비족은 테무진한테 두들겨 맞은 뒤 합병당했다.
그들은 지금 저기 중앙아시아에서 같은 유목민을 쥐어패며 유럽으로 향하는 길을 뚫고 있을 테니 부여도 온전히 고구려와 싸우는 데 집중할 수 있다는 뜻.
부여가 본래 역사에서 선비족을 이끄는 모용 뭐시기한테 털리고, 아직 피해를 복구하지 못하던 때 시기적절하게 등장한 광개토대왕한테 연이어 털리면서 흡수당한 걸 떠올리면 이 거대한 집안싸움의 향방은 알 수 없었다.
혹시 모르는 일이지.
부여가 고구려를 흡수하고 새로운 삼국시대를 열어버릴지도.
그러면 부여, 백제, 신라인가.
전부 두 글자로 딱딱 맞아떨어지네.
광개토대왕이 등장하기 전에 고구려를 멸망시켜야만 하는 시간제한 미션이라….
이제 한 200년쯤 남았나.
꽤 넉넉하구만.
물론 그 전에 소수림왕이라는 걸출한 인물도 등장하니 사실상 150년 정도 남은 게 아닐까.
…그래도 여유롭네.
한반도를 통일하는 국가는 과연 누가 될까.
부여? 고구려? 백제?
아니면 본래 역사대로 신라?
가야는 나가 있어.
중앙 집권화도 제대로 안 된 나라가 어딜 통일을 넘보냐.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엔 결정되지 않을 테니 이 궁금증이 해결될 일은 없을 것이다.
살짝 아쉽기도 하고.
“…우리가 언제 공격하면 되겠소?”
“음?”
갑자기 말투가 바뀌었네.
이제 오랫동안 갈등을 빚은 적국이 아니라 동맹국으로 취급하겠단 뜻인가?
상대가 먼저 나를 향한 존중을 보였으니 이에 응하지 않으면 도리가 아닐 터.
솔직히 괜한 트집 잡히지 않게 먼저 예의 없는 말투를 건넨 건데 말이야.
만약 내가 존중하는 말투를 썼는데 고구려가 냅다 반말로 대답하면 상황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상황이 대차게 꼬일걸.
고구려가 자존심을 굽히지 않은 채 똑같이 반말로 대답해도 좋고, 만약 지금처럼 국익을 위해 무시당하는 걸 참으며 예의를 보여도 상관없다.
내가 말투 하나로 화를 낼 사람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적어도 한 달 안에는 한사군을 공격할 계획이오.”
“……!”
“그대가 동맹국으로서 의리를 지킬 것이라 믿겠소이다.”
상대가 예의를 보이면 똑같이 행동하면 되는 일이니까.
…근데 하오체가 영 적응되질 않네.
아무래도 하오체를 쓸만한 인물이 없어서 그런가?
황제 폐하께 이런 말투를 쓰는 건 당연히 어불성설이지.
폐하께는 당연히 ‘─하옵니다’ 같은 궁중 말투를 써야 하지 않겠나.
물론 나를 무작정 감싸고 도는 황제 폐하한테 무슨 말투를 써도 목이 달아나는 일은 없겠지만 말이야.
…실제로 같이 밤을 보낼 땐 분위기에 취해서 말투가 이상해지기도 하고.
내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투를 바꾸자 고연우는 상당히 경악한 반응을 드러냈다.
아마도 내가 끝까지 자신을 아랫사람 취급하며 반말만 틱틱 던질 거라 생각한 것 아닐까.
자기를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한(漢)족 특유의 이상한 중화사상을 떠올리면 이상한 일은 아니지.
…이것도 어떻게든 뜯어고치긴 해야 하는데 말이야.
자기 민족에 자긍심을 가지는 건 좋은데 이게 이상한 쪽으로 향하니 문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중화사상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때가 아니라는 걸까.
한나라 때는 한(漢)족의 정체성을 버리고 기꺼이 이민족이 되어 중국을 약탈하는 백성도 많았다.
특히 병주처럼 이민족의 침입이 잦은 지역에서 자주 일어났던 상황이지.
이 망할 놈의 땅덩어리.
병주자사를 지냈던 인물의 기록을 찾아보면 이민족으로 전향한 한(漢)족을 설득하기 위해 가족을 인질로 삼았다는 내용이 종종 있다.
근데도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약탈을 일삼다가 가족이 처형된 경우가 있을 정도.
중화사상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당나라나 명나라 입장에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한나라 때는 진짜 있었던 일이라니까?
사실 지금 한나라가 강족, 저족, 남만족이나 산월족처럼 다른 민족과 열심히 융화되는 이유도 이런 영향이 크겠지.
한나라는 서로 다른 민족 취급을 하던 진나라나 초나라 등 여러 국가가 하나로 합쳐지며 거대해진 통일 국가니까.
아무래도 모두 한(漢)족이라는 사상이 짙게 깔린 상태에서 통일된 당나라나 명나라와는 사상 차이가 있지 않겠나.
지금도 한족이 제일 우월한 민족이라 주장하며 문제를 일으키는 연놈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 중국을 생각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 새 발의 피) 수준이었다.
…너무 옛날이니까 오히려 좋은 점이 있네.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동방에서 어마어마한 권위를 자랑하던 중화 제국.
서양에서 어마어마한 권위를 자랑하던 로마 제국.
이 두 국가의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이것이지.
중화 제국은 다른 민족을 오랑캐라 부르며 멸시했으나, 로마 제국은 다른 민족에게도 기꺼이 시민권을 주며 굳이 문화의 우열을 가라지 않았다.
로마 제국을 늘 골치 아프게 하던 요소도 외부에서 침입한 이민족이었고….
그런 로마 제국을 기꺼이 도우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든 것도 자신을 로마인이라 믿는 이민족이었다.
그 결과 중원을 차지한 제국이 기껏해야 수백 년을 버틸 때 로마 제국은 무려 천 년을 넘는 세월 동안 존속했지.
───대장군.
───그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체계는 무엇인가?
언젠가 황제 폐하께서 나를 바라보면서 던지셨던 질문.
그땐 내 불편한 기색을 읽은 폐하께서 금군에게 명해 오랑캐란 단어를 운운한 관리를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가는 상황이었던지라 모두가 눈치를 살피는 상황이었다.
나는 곧 관직을 잃게 생긴 관리를 바라보다가 피로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 어떠한 나라도 홀로 걸어 나갈 순 없는 법입니다.
피를 피로 씻을수록 더욱 많은 피를 부른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현실적인 면모를 생각해야 하는 게 쉬울 리 있겠냐.
───압제와 탄압이란 단어보다는, 협력과 통합이란 단어가 더 듣기 좋지 않겠습니까?
───…….
그러나 이런 묘한 괴리감에 무너지지 않는 것도 위정자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왕관을 쓰려는 자는 그 무게를 견디라는 말도 있지 않나.
…왕관을 벗으면 견딜 필요도 없단 건가?
역시 은퇴가 답이군.
난 어떻게든 자유로워질 것이다!
나는 오늘도 은퇴를 위한 동기를 찾아내고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