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RAW novel - Chapter (579)
EP.579 한사군(7)
우리는 공손도가 위치한 마지막 보루인 낙랑군까지 거침없이 진격했다.
───너희는 이곳을 결코 지나갈 수 없다!
뭐, 중간중간 전투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닌데….
───항복! 항복하겠습니다!
장수를 앞세우며 살짝 어루만져 주니까 냅다 흰색 깃발을 올리면서 항복하더라고.
하긴 나였어도 인간 병기들이 성벽 위를 기어 올라와 수십 명씩 죽이고 다니면 벌벌 떨었을 테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전부 비켜─!
───여, 여포다! 여포가 왔다──!
사다리가 걸쳐지면 어기적어기적 올라가는 게 보통인데….
도움닫기를 하면서 그냥 껑충껑충 뛰어 올라가더라.
도대체 어떻게 된 균형 감각이지.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되네.
본래 역사에서도 손견이나 감녕처럼 직접 성벽을 기어 올라갔다는 장수들은 존재하지만, 적어도 저런 묘기를 부리며 올라가진 않았을 거다.
───이야…. 저긴 그냥 몸으로 때우네.
───역시 감탄만 나오는 무예로군.
밧줄과 연결한 갈고리를 풍차처럼 돌리면서 기회를 노리던 감녕.
황개나 정보 등 강동의 노장들과 함께 여전히 전선에서 활약하던 손견.
성벽 오르기의 달인인 저 두 명이 경악하는 수준이면 말 다한 거지.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이 전략을 파훼하려면 공손도측에서도 실력자를 내보내야 했다.
───말로만 듣던 천하무쌍의 무(武)! 내가 직접 견식해보겠…. 커헉!
───너흰 어째 말하는 게 다 똑같냐?
당연히 여포를 막아낼 수 있을 만한 실력자 말이야.
여포처럼 개인의 무력에 극도로 의존하는 부대를 격파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복숭아 시스터즈처럼 3:1로 붙든가, 아니면 조조처럼 6:1로 붙든가 해서 여포를 끈질기게 붙잡는 사이 병사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면 이길 수 있지.
항적은 10면에서 매복 당해도 살아 나가는 괴물이라서 한고조가 그렇게 처맞았던 것.
서초패왕이 있는 곳은 무조건 지고, 그가 없는 곳은 무조건 승리하니 이걸 참 뭐라고 해야 할까.
환초(桓楚), 계포(季布), 종리말(鍾離眜), 용저(龍且) 등 초나라에 능력 있는 장수가 없는 건 아니었을 텐데 이상하게 항적만 보인단 말이지.
이를 보면 한고조 유방이 뛰어난 인물이긴 해.
괜히 영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방이 쇠약해진 걸 이유로 든 게 아니라니까.
하여튼 공손도에게 여포를 막을 만한 인재가 있을 리 없으니 결과는 뻔했다.
───자, 장군께서 당하셨다!
───그래. 너희 장군 죽었으니 빨리 항복해.
───어서 도망쳐──!!
───…어디 가! 항복하라고──!!
공손도군의 병사가 겁을 과하게 먹고 이성적인 판단조차 못하던 광경은 꽤 우스웠지만 말이야.
왜 콩트 찍는 것 같냐.
심지어 열심히 맞서던 적들도 한사군에 막 들어섰을 무렵에나 있었지, 어디를 가든 아군이 줄창 박살 난다는 소식만 들려오니까 이젠 수성 측에서 먼저 항복하겠단 서신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음….”
그리고 우리와 동맹을 맺은 고구려군이 한창 동래군을 박살 내고 있다는 정보.
말과 사람을 갑옷으로 철저히 무장한 개마무사는 내 예상을 저버리지 않고 공손도군을 평지에서 만나는 족족 깨부쉈다.
아마 공손도 입장에선 화들짝 놀랄 만한 상황이 아닐까.
자신과 허구한 날 부딪히던 동쪽 이민족이 어느샌가 후방에서 나타나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아마 몰래 도망치는 것도 쉽지 않을걸.
“이제 거의 다 온 건가?”
모든 상황을 정리한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구려의 왕인 산상왕….
그러니까 고연우는 이미 보급을 차단하고 후방을 교란하는 등 제 역할에 충실한 상황.
이름조차 불분명한 부여왕은 안 그래도 공손도와 혼인 동맹을 맺은 상황에서 한나라의 심기를 더 거스르면 큰일 난다는 걸 깨달았는지 얌전히 침묵만 지켰다.
내가 비록 집안싸움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지만….
부여가 먼저 건드린다면 사정이 다르지.
만약 지금 부여가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공손도를 돕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 지금까지 한나라와 부여가 맺어왔던 우호적인 관계는 끝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면 명분도 생겼으니 거리낄 게 있나.
한나라가 부여로 직접 쳐들어가든, 아니면 고구려한테 물자를 지원하며 전쟁을 돕든 만주 일대에 큰 정세 변화가 있을 것이다.
아마 직접 쳐들어가는 것보단 뒤에서 고구려한테 지원만 해주겠지만 말이야.
여기서 땅이 더 늘어나는 것도 부담스럽고, 무엇보다 부여를 직접 처리하기 위해선 요동에 더 오래 머물러야 한다는 게 문제다.
갑자기 일이 생겼다면서 본래 계획보다 오래 머무르겠다는 전령을 낙양에 보내는 순간 후환을 감당할 수 없을걸.
솔직히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하긴 한데….
호기심 하나 해결하겠다고 위험 부담을 짊어질 순 없다.
만약 그랬다간 정말 황제 폐하만의 작은 대장군이 될 수 있어.
건담 프라모델마냥 작고 튼튼한 진열장에 갇혀서 평생 못 나오겠지.
이 경우엔 낙양이라 말해야 하나.
어쨌든 부여는 꽤 복잡한 사정이 얽혀있는지라 공손도 토벌전에 섣불리 개입할 수 없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곳은 단 하나.
“…평양성(平壤城)인가.”
“네? 평양이요?”
내 혼잣말을 들은 사마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한사군이 사라지지 않은 이 시기엔 낙랑군의 중앙을 조선현(朝鮮縣)이라 불렀던가.
고조선(古朝鮮)할 때 그 조선(朝鮮) 맞다.
정말 직관적인 이름이지.
나는 사마의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해본 말이야. 신경 쓸 필요 없어.”
“흐응…. 그래요.”
사마의는 무언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내가 무슨 생각으로 평양이란 단어를 언급했는지 모르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이걸 알아채면 이상한 거 아닐까.
고조선의 수도이기도 했던 조선현은 말 그대로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내가 비록 고향 땅 어쩌고 했지만 현대에서 평양은 여러 의미로 시뻘게진 국가가 자리 잡은 곳 아닌가.
한국인으로서는 묘한 감상이 들 수밖에 없지.
알 사람은 알겠다만 고구려의 수도가 저기 위쪽에 있는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바뀐 건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론 장수왕이 아래쪽으로 천도한 것.
하필 이때 고구려란 국명이 고려로 바뀌기도 해서 여러 사람의 혼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왕권 강화의 일환인 건 알지만 역사 공부를 하는 후손 입장에선 영 골이 아프단 말이지.
이렇게 된 이상 나도 후손들에게 어마어마한 역사 과제를 안겨주겠어.
몇 년 동안 응어리진 내 원한을 맛보거라.
멀리서 평양성을 지켜보던 사마의가 질린다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와, 설마 했는데 여기도 강을 끼고 있네요.”
“…한때 수도였던 곳은 다 그렇지.”
산을 끼고 있든, 강을 끼고 있든, 아니면 한 발짝 더 나아가 더럽고 치사하게 둘 다 끼고 있든….
사람이 생각하는 건 다 비슷비슷해서 옛날 수도는 대부분 공격하기 어려운 곳에 자리 잡은 경우가 많았다.
저기 낙양만 하더라도 호로관과 동관이 협곡을 떡하니 지키고 있잖아.
그나마 있는 물길도 뻑하면 홍수가 터지는 황하라서 거슬러 올라오는 게 쉽지 않고 말이야.
“주군, 어찌하시겠습니까?”
“항복 제안부터 건네봐야지.”
전방에는 엄청난 규모의 군세가 자리 잡은 상태고, 후방에는 평소 자신과 부딪히던 이민족이 길을 끊어버렸다.
공손도 본인도 전장에서 오래 활약했던 만큼 지금 상황이 무척 안 좋다는 걸 눈치챘을 터.
나도 굳이 저런 성을 공격해서 피해를 늘리는 것보단 항복을 권유해 곱게 끝내는 것이 훨씬 좋았다.
물론 공손도가 지금 와서 항복한다고 한들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는 한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니까.
만약 공손도를 살려준다면 몇몇 위험 분자가 어떻게 생각하겠나.
‘와, 역시 자비로우시다!’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반란 한 번쯤은 괜찮구나!’라고 생각할까.
권력욕에 뇌가 잡아먹힌 이상한 놈들은 분명 후자 쪽으로 생각할걸.
지금 공손도가 항복할 경우 내가 할 수 있는 건 ‘가문’의 죄를 면해 주는 것이다.
왜, 연좌제로 역적 가문의 목이 전부 날아가는 경우 있잖아.
그걸 최대한 막아주겠다는 소리지.
즉 ‘너만 죽을래, 아니면 전부 죽을래?’란 선택지를 내어주는 셈이었다.
만약 공손도가 항복하지 않으면 어린아이를 제외한 공손씨 성인들은 전부 목이 날아가겠지.
또 공손도가 만에 하나라도 전사하지 않고 생포 당했을 경우….
으음….
절대 곱게 죽지 못할걸.
안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 여러 가지 말 못할 경험을 쌓으면서 손속이 더 잔혹해졌다고.
같은 공손씨였던 공손찬만 봐도 무슨 꼴을 당할까 예상되지 않나.
만약 내게 항복한다면 이렇게 죽을 필요 없이 곱게 죽을 수 있을 거다.
신체를 훼손하지 않고 죽는 걸 좋게 생각하는 유교 관념상 관대한 처형 방식이라 인식되는 교수형을 내려줄 수도 있고, 아니면 고통 없이 짧고 빠르게 저승으로 보내줄 수도 있다.
정말 ‘어?’하는 순간에 목이 달아나니 고통 없이 가는 게 맞지 않을까.
여포한테 목이 날아갔던 장수들은 하나 같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더라고.
…내가 목이 잘려본 적 없어서 확신은 불가능하지만.
이 호기심을 해결하겠답시고 잘려볼 수는 없잖아.
“알겠습니다. 곧 공손도에게 전령을….”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나는 제갈량의 말을 끊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코앞에 공손도가 있는데 뭣 하러 전령이 오고 가는 걸 기다려.
우리 남자답게 얼굴을 마주하면서 대화하자고.